<수영장>
La Piscine / 감독 자크 드레이 / 1969년
작열하는 태양과 이국적인 풍경, 보기 좋게 그을린 근사한 외모의 부르주아들과 기저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은 <태양은 가득히>(1960)와 더불어 여름을 배경으로 우아한 스릴러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영화감독들에게 귀감이 되는 작품이다. 당대 유럽영화계의 스타배우,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프랑스 남서부의 여름 휴양지에서 펼쳐지는 네 남녀의 은밀하고도 위험한 관계맺음에 주목하고 있다. 작가 장 폴(알랭 들롱)과 그의 연인 마리안(로미 슈나이더)은 친구의 고급 빌라에서 낭만적인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평화롭던 그들의 일상은 마리안의 전 남자친구이자 음반 프로듀서인 해리(모리스 로네)가 딸 페넬로페(제인 버킨)와 함께 빌라를 찾으면서 점점 위태로워진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 다시 가까워지는 마리안과 해리, 진짜 해리의 딸이긴 한 건지 알 수 없는 페넬로페의 미스터리한 존재감이 긴장감을 서서히 고조시키는 가운데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전진한다. <수영장>은 특히 부르주아의 은밀한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탐구하는 유럽 감독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루카 구아다니노와 프랑수아 오종이 그들인데, 이들은 각각 <비거 스플래쉬>(2016)와 <스위밍풀>(2003)이라는 영화로 자크 드레이의 이 매혹적인 스릴러에 오마주를 바쳤다. 마리안을 완전히 다른 인물로 재해석한 틸다 스윈튼(<비거 스플래쉬>)과 뤼디빈 사니에르, 샬롯 램플링이 맺는 기묘한 관계(<스위밍풀>)를 원작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시체들의 새벽>
Dawn of the Dead / 감독 조지 로메로 / 1978년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 이후 등장한 모든 좀비영화는 조지 로메로의 영향 아래 있다. 미국 감독 조지 로메로는 ‘좀비’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장본인이다. 부두교 의식에서 유래해 ‘주인에게 복종하는 의식 없는 노예’라는 뜻으로 통용되던 좀비는 로메로의 ‘시체 3부작’(<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날>)을 거치며 인간을 먹는 존재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됐다.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현실감과 긴장감 넘치는 공포, 비정한 세계관을 겸비한 로메로의 좀비영화는 리얼리즘 호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시체 3부작’의 두 번째 영화인 <시체들의 새벽>은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난 로메로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오래 기억돼야 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좀비들이 점령하다시피 한 세상에서 쇼핑몰에 고립된 이들이 좀비와 맞서는 한편 좀비보다 더 끔찍한 인간의 탐욕과 마주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 오마주를 바치는 의미로 자신의 좀비영화에 <새벽의 황당한 저주>(Shaun of the Dead)라는 이름을 붙인 에드거 라이트는 조지 로메로의 작품이 “호러의 외피를 두르고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트로이의 목마 같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계급, 인종,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는 <시체들의 새벽>은 공포영화가 말초적인 두려움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공짜 쇼핑에 매혹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망을 조명하는 쇼핑몰 시퀀스는 좀비영화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대니 보일의 <28일후…>(2002) 등의 좀비영화에서 변주되었고, 샘 레이미는 <이블 데드> 시리즈를 통해 로메로가 선보인 스플래터 영화의 계보를 이어갔다.
<행잉록에서의 소풍>
Picnic at Hanging Rock / 감독 피터 위어 / 1975년
1900년의 성 밸런타인데이, 호주의 바위섬 행잉록에서의 소풍날, 세명의 학생과 한명의 교사가 실종된다. 그들과 함께였던 한 소녀만 무사히 돌아오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학교와 지역사회는 발칵 뒤집히고, 사람들은 특히 아름답고 기품 있는 소녀 미란다의 실종에 주목한다. 호주 작가 조앤 린제이의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이 영화는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서정적인 풍경, 아름다운 소녀들의 이미지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실종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들이 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이 작품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1975년이란 제작연도를 고려하면 실험적이고 혁신적이었다.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비극적인 사건 그 자체의 진상보다 그 사건을 접하는 사회 분위기에 주목하는 영화들에 영향을 주었고, 소피아 코폴라의 <처녀 자살 소동>(1999)과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1992)가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소피아 코폴라는 <처녀 자살 소동>에 이어 최근작 <매혹당한 사람들>(2017)에 이르기까지 <행잉록에서의 소풍>의 영향력이 명백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꾸준히 선보였다.
<찬스>
Being There / 감독 할 애시비 / 1979년
웨스 앤더슨, 주드 애파토우, 알렉산더 페인, 데이비드 O. 러셀…. 이들은 미국 감독 할 애시비로부터 영화적 영향을 받은 후배감독들이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면면만 보아도 알 수 있듯, 할 애시비는 위트와 풍자를 담아 현대 미국 사회의 풍경을 묘사하는 후대감독들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삶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노년의 여성과 자살소동을 벌이는 60살 아래 청년의 사랑을 다룬 <해롤드와 모드>(1971), 중년의 덜떨어진 남자가 중후한 지식인으로 오해받고 정치까지 개입하게 되는 이야기를 조명한 <찬스> 등 할 애시비는 기발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꼬집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할 애시비의 적자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후대의 감독이 바로 벤 스틸러다. 그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에서 중년이 되어 처음으로 안온한 현실을 떠나 진짜 세상을 체감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구상하며 <찬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워리어>
The Warriors / 감독 월터 힐 / 1979년
목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다. <워리어>는 월터 힐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되는 영화다. 뉴욕의 영향력 있는 갱스터 집단 리프의 두목 사이프러스가 암살되고, 그를 암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갱단 워리어스의 멤버들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여러 갱단과 맞붙는다는 이야기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싸움에 주목하는 <워리어>는 순수한 장르적 쾌감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2002)에서 “이리 와서 같이 놀래?”라는 <워리어>의 명대사를 차용했고, 에드거 라이트는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7명의 전 남자친구와 대결을 펼치는 록밴드 멤버의 이야기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에서 ‘일 대 다’ 구도를 재현한다. 한국영화로는 류승완 감독의 <짝패>(2006) 거리 패싸움 신에서,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 야구 유니폼을 입고 야구방망이를 든 <워리어>의 갱단 베이스볼 퓨리즈와 똑같은 패거리가 등장한다.
<브라질>
Brazil / 감독 테리 길리엄 / 1985년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은 SF 팬들 사이에선 <블레이드 러너>만큼이나 영향력 있는 1980년대의 걸작 SF로 추앙받지만, 생각보다 대중에게 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환상적이면서도 기괴한 이미지와 신랄한 블랙 유머를 장전한 이 영화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독창적인 SF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감독들에게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왔다. <브라질>은 모든 것이 정보화된 관료주의적인 미래 사회에서 벌레 한 마리가 불러온 파국을 조명한다. 프린터에 들어간 벌레 때문에 테러리스트를 지목하는 정보국 문서의 활자가 ‘터틀’에서 ‘버틀’로 바뀌고, 버틀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고한 시민이 죽임을 당한다. 이 사건의 뒤처리를 맡은 정보국 공무원 샘은 버틀의 죽음에 대한 뒷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꿈에 등장하던 여인을 만나게 되고, 테러리스트로 몰린 그녀를 돕다가 반란자 취급을 받는다. 관료주의의 병폐를 블랙코미디적인 필치로 꼬집는 방식은 조엘 코언의 <허드서커 대리인>(1994)에 영향을 미쳤고,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과장된 프로덕션 디자인은 팀 버튼의 <배트맨>(1989)에 영향을 주었다. 잭 스나이더는 <써커 펀치>(2011)에서 중세풍의 갑옷을 입고 일본 무사와 규모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오마주로 바쳤다. 한국 감독으로는 <설국열차>(2013)의 봉준호 감독이 테리 길리엄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해외 평자들은 말한다. 특히 틸다 스윈튼이 연기하는 <설국열차>의 메이슨은 거대한 안경과 틀니, 과장된 옷차림의 우스꽝스러운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무자비하게 서민을 탄압하는 양면적인 모습이 길리엄의 영화 속 관료들과 유사하다.
<런던의 늑대인간>
An American Werewolf in London / 감독 존 랜디스 / 1981년
<런던의 늑대인간>은 몰라도 좀비와 늑대인간이 등장하는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뮤직비디오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 뮤직비디오는 <런던의 늑대인간>을 본 마이클 잭슨이 존 랜디스 감독을 기용해 제작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로도 유명하다. <런던의 늑대인간>은 늑대인간이 등장하는 영화 가운데 가장 자주 언급되는 작품 중 한편이다. 영국 북부의 황야를 여행하던 두명의 미국인 대학생이 늑대인간의 습격을 받고, 그로부터 살아남은 한명이 런던의 병실에서 깨어나며 시작된다. 병원에서 몸을 추스르던 데이비드는 그곳의 간호사 알렉스와 사랑에 빠지는데, 죽은 친구의 모습이 보이고 어느 날 아침 정신을 차려보니 동물원의 늑대 우리에서 깨어나는 등 이상한 일을 겪게 된다. 장르영화로서 이 작품의 성취는 할리우드 특수분장 장인 릭 베이커가 구현한 완성도 높은 늑대인간의 모습(그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수분장상을 수상했다)과 호러와 코미디 장르를 적절하게 섞을 줄 아는 존 랜디스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에 있을 것이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정말로 끔찍한 상황에 소리내어 웃을 수밖에 없는 유머”를 결합한 이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고, 에드거 라이트 역시 온갖 장르가 혼종되어 있는 이 영화의 구조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말했다. <언더월드> 시리즈는 이 영화의 늑대 울음소리와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는 장면에 오마주를 바쳤고, <도니 다코>(2001)는 <런던의 늑대인간>의 또 다른 중요한 개성인 죽은 자와의 대화 장면을 영화에 마련했다.
<플래시 고든>
Flash Gordon / 감독 마이크 호지스 / 1980년
페데리코 펠리니, 세르지오 레오네, 니콜라스 뢰그…. 과거 SF영화 <플래시 고든>의 연출자로 거론되었던 사람들의 목록이다. 조지 루카스가 <플래시 고든>의 판권 획득에 실패하자 대신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들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마이크 호지스의 1980년작 <플래시 고든>은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모험 만화”로 평가받는 알렉스 레이먼드의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우주를 배경으로 마초적인 영웅이 거대한 악과 맞서는 모험담을 다룬 이 작품은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캠피한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컬트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총천연색 이미지와 근육질 슈퍼히어로, 우주를 배경으로 한 모험이라는 영화적 설정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토르: 라그나로크>(2017)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플래시 고든>의 리부트를 계획 중이던 매튜 본 감독은 마블이 앞서 두편의 영화를 선보이자 자신이 구상한 작품과 유사점이 많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19곰 테드> 시리즈는 두 주인공을 <플래시 고든>의 열혈팬으로 언급하며 주연배우 샘 존스를 두편의 영화에 모두 출연시켰다.
<오독>
五毒 / 감독 장철 / 1978년
장철 감독은 1960~70년대 홍콩 액션영화를 대표하는 연출자로, 호금전과 더불어 홍콩 무협영화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1978년작 <오독>은 장철 감독이 쇼브러더스를 떠나 자신의 독립영화사를 차려 만든 베놈스(Venoms) 영화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영화로, 다섯명의 무림고수를 없애야 하는 수련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독문파에는 지네, 뱀, 전갈, 도마뱀, 두꺼비 권법을 쓰는 다섯 무림고수가 있다. 이들의 존재가 강호의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한 사부는 문파의 여섯 번째 수련생, 양덕에게 문파를 없앨 것을 명한다. 장철 감독이 직접 발굴한 다섯명의 배우, 일명 베놈스가 영화에서 선보이는 박력 넘치고 화려한 액션은 아시아 액션영화에 열광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등의 서양 연출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타란티노는 <킬 빌> 1편에서 다섯명으로 구성된 암살단 ‘데들리 바이퍼스’를 선보이는데, 이들이 바로 <오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 감독 로버트 알트먼 / 1973년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을 얘기할 때 로버트 알트먼으로부터의 영향은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그의 탐정영화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 역시 알트먼의 <기나긴 이별>의 주인공, 필립 말로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기나긴 이별>은 친구의 자살 사건, 실종된 소설가의 행방을 좇는 탐정 필립 말로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알트먼이 선보인 고양이 먹이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한량의 초상은 여타의 누아르영화 속 냉철하고 프로페셔널한 탐정에 익숙하던 당대의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술과 마약에 찌든 인물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주는 <인히어런트 바이스>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기나긴 이별>이라는 선배 영화에 기인하고 있다. 코언 형제 또한 복잡한 사건에 휘말린 한량의 이야기를 다룬 <위대한 레보스키>(1998)를 준비하며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
<입크리스 파일>
The Ipcress file / 감독 시드니 J. 퓨리 / 1965년
뿔테 안경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스파이, ‘해리 파머’는 제임스 본드와 판이하게 다른 유형의 영국 스파이도 존재한다는 걸 알게 해준 장본인이다. <입크리스 파일>에서 납치된 과학자를 쫓던 해리 파머는 해외를 무대로 화려한 활약을 펼치며 아름다운 여성들과 마티니잔을 부딪히기는커녕 실수만 연발한다. 걸핏하면 악당들을 놓치고, 정보원은 위험에 처하며, 악당들에게 감금돼 실험 대상이 되는 <입크리스 파일>의 해리 파머를 보고 있자면 MI6 출신 영국 스파이의 글래머러스한 매력이 산산조각나는 걸 경험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든 무심하고 쿨한 태도로 일관하는 불완전한 스파이의 초상은 새로운 첩보물에 목말라 있던 창작자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대표작 <입크리스 파일>과 <베이징 익스프레스> <미드나 잇 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해리 파머 시리즈’에 영향을 받은 최근작으로는 매튜 본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4)가 있다. 매튜 본은 이 영화에서 해리 파머와 유사한 뿔테 안경을 해리 하트(콜린 퍼스)에게 씌우는가 하면(이름도 ‘해리’다), 왕년의 해리 파머였던 마이클 케인을 킹스맨의 수장으로 출연시켰다. 코믹 첩보영화 <오스틴 파워: 골드 멤버>(2002) 역시 해리 파머의 노년 버전과도 같은 나이젤 파워스 역을 마이클 케인에게 맡김으로써 <입크리스 파일>에 오마주를 바쳤다. 한편 <007 어나더 데이>(2002)에도 해리 파머의 존재감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제임스 본드가 찾아간 유전자 치료 클리닉에서 들리는 세뇌음은 <입크리스 파일>에 나왔던 그것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프로듀서 중 한명인 해리 살츠먼이 <입크리스 파일>의 제작도 겸하고 있어서일까.
<딥 레드>
Profondo Rosso /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 1975년
다리오 아르젠토는 마리오 바바, 루치오 풀치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3대 호러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특히 잔혹함과 예술성을 겸비한 지알로 영화로 유명했는데, <딥 레드>는 그가 연출한 지알로 장르의 영화 중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국내 비디오 출시명은 <써스페리아2>인데, <서스페리아>(1977)와 내용상 별 관련이 없을뿐더러 제작연도 역시 빨라 <딥 레드>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이 작품은 바에서 일하는 연주자 마크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동요를 틀고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가 등장하는 <딥 레드>는 강렬한 붉은색의 이미지와 ‘헌티드 하우스’ 호러로 주목받았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팬을 자처하는 제임스 완은 오컬트 호러영화 <컨저링>(2013)을 연출하며 <딥 레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고, <할로윈2>(1981)는 뜨거운 물속에서의 살인 장면을 재구성했다. <쏘우3>(2006)는 <딥 레드> 속 인형의 웃음소리를 재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