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살면서 배우 오디션을 딱 2번 본 적 있다. 바로 <이재수의 난>(1999)과 <박하사탕>(1999)이다. 때는 바야흐로 1998년, 그 어떤 일이든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입사원서를 뿌려대던 시절이었다. 당시 진짜 배우를 꿈꿨다기보다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박광수, 이창동 감독님의 얼굴을 실제로 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이재수의 난> 오디션은 황당한 제주도 방언을 구사하며 1분 만에 끝났지만, <박하사탕>은 1차를 통과하고 2차까지 봤다. 최근 CGV아트하우스의 한국영화 헌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된 <박하사탕> 상영 GV가 끝난 후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 조심스레 고백했더니, 이창동 감독님이 약간 믿지 못하는 눈치였는데 당시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어떤 의외의 배우가 있었는지 얘기했더니 그제야 헛헛한 웃음과 함께 민망하게 믿는 눈치였다. 그리고 오래전 그때 접수된 오디션 원서를 분류하고 관리했던 이가 바로 당시 이스트필름 기획실 직원이었던, 현재 <독전>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이해영 감독이다.
당시 오디션 경쟁자였던(-_-;) 배우 설경구도 내 얘기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면 <박하사탕>은 설경구를 포함해 당시 쟁쟁한 신인급 무명배우들이 하나같이 탐내던 작품이었다. 당시 탈락했던 배우들 명단을 다 밝혔다가는, 이제 워낙 유명해진 배우들도 많아서 곤란할 정도다. 아무튼 이창동 감독이 새로운 얼굴을 원했기에, 바로 전해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로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던 배우 김여진은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의 부인 홍자에 ‘너무 유명하다’는 이유로 캐스팅 단계에서 망설일 정도였다고 한다. 역시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출연했던 배우 김경익은 <박하사탕>에서 영호에게 고문당하는 남자로 출연했고, 설경구와 <송어>(1999)를 함께했던 배우 김인권은 군인으로 출연했다. 영호의 동료 형사로 출연했던 공형진은 물론이고 최덕문, 조한철 배우도 그렇게 <박하사탕>에 모습을 비췄다. 또한 역시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배우 한석규와 비슷하게 연기했던’, 만화가 규식 역의 배우 설경구가 주인공 영호 역할로 최종 낙점됐다. 이후 그가 <박하사탕>의 영호로 시작하여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의 재호에 이르기까지 지난 20여년간 어떻게 한국영화와 함께 성장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박하사탕>은 1999년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다. 이제는 부산 영화의전당이 생겨서 더이상 볼 수 없는 수영만 야외상영장에서 그 첫 번째 상영을 본 것도 뿌듯한 추억이다. 유난히 싸늘하고 어두컴컴했던 야외상영장에서 부상당한 군인 영호가 “워커에 물이 차서요”라고 흐느끼며 워커 속의 핏물을 쏟아낼 때 얼마나 공포스럽고 서러웠는지 모른다. 많은 관객이 함께 울었다. 그렇게 <박하사탕>은 2000년 1월1일이라는 의미심장한 개봉일만큼이나 2000년대를 시작하는 한국영화계의 어떤 상징과도 같은 영화였고, 1998년 당시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제작을 시작한 영화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처럼 어떤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의도하지 않은 운명을 부여받는다. <박하사탕>은 바로 그런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박하사탕>을 그때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 시대도 변했고 나라는 인간도 그때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 또한 이후 <밀양>(2007)과 <시>(2010)를 통해 다른 차원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그의 6번째 영화, 그가 가장 긴 8년이라는 공백을 보내고 만든 영화 <버닝>이 진심으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