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계. 잠시 눈을 감고 디즈니가 만든 장편애니메이션의 이름을 말해보자. 막힘없이 술술 나왔을 것이다. 그중에서 실제로 본 작품이 얼마나 되는가? 그래도 제법 된다면, 장하다. 우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아니, 좀더 솔직해지자면 꽤나 잘 알고 있는 체할 수 있다. 대개의 레퍼토리는 이러하다. “어렸을 때 참 즐겨 봤었지. 그땐 보고 또 보고 했다니까.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시시해지더군. 뻔하잖아. 특히 디즈니가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는 참을 수가 없지. 디즈니는 자기네 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그나마 픽사가 봐줄 만하지.”
2단계. 다음 작품들을 디즈니 스튜디오 작품과 픽사 스튜디오 작품으로 구분해보자. <겨울왕국>(2013), <굿 다이노>(2015), <빅 히어로>(2014), <인사이드 아웃>(2015), <주토피아>(2016), <코코>(2017). 몇몇 작품은 헷갈릴 수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 3D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정말 알고 있나요?
아무튼 우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웬만큼 안다. 그리고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처럼, 보지 않았어도 아는 척을 한다. 심지어 안 보았는데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그만큼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우리를 어렸을 적부터 포위하고 거기에 흠뻑 적셔들게 했다. 흥미로운 점은 국내의 수많은 영화제에서 이제껏 디즈니 작품을 한데 모아서 선보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이미 보았거나 잘 알기 때문이라는 판단이었을까? 물론 디즈니의 콧대 높은 작품 관리도 한몫한다. 혹은 깐깐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접촉조차 시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제 그것들을 다시 바라볼 자리가 마련되었다. 극장에서, 그것도 날 좋은 5월에 열리는 영화제의 꽃방석 위에서 말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스페셜 포커스: 디즈니 레전더리’ 섹션을 통해 선보이는 디즈니 장편애니메이션은 30편이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이제껏 몇편의 장편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논란이 있다. 단순히 ‘장편’이라는 분량만을 기준으로 꼽는다면, 디즈니(그리고 픽사)에서 극장 상영보다는 비디오·DvD 판매를 겨냥한 스핀오프와 같은 작품들이 들어갈테다. 픽사의 작품들도 기준이 애매하다. 지금은 디즈니·픽사이지만 그 이전에는 별개의 스튜디오와 다름없었으니, 어디까지를 디즈니 라인업에 포함시켜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첫 장편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부터 <인사이드 아웃>까지를 선정하였다(개인적으로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지난해에 제작 80주년이었기 때문에 왠지 뒤늦은 감은 있지만 중요하지는 않다). 30편의 면모를 보면 <피노키오>(1940), <판타지아>(1940), <덤보>(1941), <밤비>(1942),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피터팬>(1953),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까지 이른바 디즈니 클래식 반열에 드는 작품들과 <인어공주>(1989), <미녀와 야수>(1991), <라이온 킹>(1994), <뮬란>(1998), <판타지아 2000>(1999), <릴로 & 스티치>(2002)처럼 1990년대 무렵부터 디즈니의 제2 전성기를 이끈 대표작은 물론이고, 그 사이에 만들어진 <아더왕 이야기>(1963), <아리스토캣>(1970), <곰돌이 푸의 모험>(1977), <생쥐 구조대>(1977), <토드와 코퍼>(1981)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색다른 매력을 지닌 작품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1995), <벅스 라이프>(1998),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 <인크레더블>(2004), <라따뚜이>(2007), <월·Ⓔ>(2008), <업>(2009), <인사이드 아웃>(2015)처럼 픽사의 대표작들도 함께한다.
시기로 따지면 1937년 작품부터 2015년 작품까지, 우리네 한평생의 삶과도 같은 약 80년의 세월을 아우른다. 그사이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얼마만큼 바뀌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디즈니 애니메이션보다도 ‘시네마’라는 영화 자체가 그사이에 더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번 상영 목록에도 빼놓을 수 없는 <토이스토리>는 영화 탄생 100주년(으로부터 이틀 후)인 1995년 12월 30일에 개봉하였다. 영화가 100살이 되었을 때, 이제 장편영화는 그 어떤 실재하는 피사체도 필요로 하지 않은 새로운 존재, 즉 디지털 시네마로 거듭났음을 선포한 작품이다.
세 가지 감상법을 소개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디즈니의 클래식에 해당하는 초기 작품들을 영화관에서 제대로 감상한 적이 없다(하물며 언제 어디서 정식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첫 개봉하였는지에 대한 기록도 모호하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 때 초기 장편애니메이션이 선보였다거나, 50년대에 미군 부대 주변에서 작품 상영이 이루어졌다거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야메’로 상영된 적도 빈번했다는데, 이 모든 것은 개인적인 회고에 의존한 진술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작품들이 tv 화면에서 벗어나서 극장 스크린에 펼쳐졌을 때의 ‘맛’이라는 걸 이제야 비로소 확인해 볼 기회가 마련된 셈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tv와 컴퓨터 모니터로 수백번 본 작품도 영화관에서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그 작품들은 극장의 스크린에 영사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기에, 거기에 맞춰 레이아웃과 컬러 팔레트와 움직임 동선과 타이밍, 그리고 대사와 사운드, 음악이 결정되었다.
성찬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리가 훤히 꿰뚫고 있다고 여기는 작품을 보면서 그 작품에 대한 우리의 기억(나아가 가상의 기억)을 조정하는 감상법이 첫 번째. 아마 여러 작품을 보고자 한다면 시기별로 디즈니의 작품 경향이 어떤 식으로 변하였는지, 기술적으로는 어떠한 성취를 이루어냈는지를 발견하는 법이 두 번째. 그러다보면 긴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디즈니만의 원형도 찾을 수 있다. 세 번째는 디즈니와 픽사를 교차시켜서 서로를 비교해보는 방법도 있다. 누가 더 디즈니 다운지에 대한 경쟁이 보일 것이다.
한때나마 애니메이션을 즐긴 적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지금 다시 그 작품들을 보면서 그때의 매력 속으로 들어갈 문이 열렸다. 당시 우리는 영화 속에서 꿈과 환상, 희망과 용기, 그리고 달콤함을 느낄 줄 알았던 꽤나 근사한 관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