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홍경표 촬영감독 - 때로는 포커스를 바람에 내주며
2018-05-31
글 : 김성훈 | 사진 : 백종헌 |
<버닝> 홍경표 촬영감독 - 때로는 포커스를 바람에 내주며

이창동과 홍경표, 홍경표와 이창동. 홍경표 촬영감독이 이창동 감독의 신작을 촬영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아무리 이리저리 놓고 봐도 둘의 조합은 선뜻 상상이 되질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적이 한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이창동 감독과 항상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충무로의 야생마 같은 홍경표 촬영감독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지난해 겨울, <버닝> 촬영현장을 두 차례 찾아 두 사람이 어떻게 호흡을 맞추는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는데, 그 결과 기자의 예상은 선입견에 불과했음이 곧 드러났다. <버닝>에서 홍경표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이창동 감독의 전작에서 줄곧 보여준 사실적인 시선을 유지하되 종수(유아인)가 진실을 찾아나서는 서사의 중·후반에는 마법 같은 순간을 펼쳐내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 크랭크인(5월 18일)을 이틀 앞두고 경기도 일산에서 만난 홍경표 촬영감독은 “<버닝>처럼 자연마저 도와줘 행운이 깃든 현장이 또 없었다”라며 “이 이야기를 촬영하게 해 준 이창동 감독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과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인데.



=전작 <곡성>(2016)이 끝난 뒤 이창동 감독님이 마음에 드셨는지 같이하자는 연락을 주셨다. 깜짝 놀랐다. 왜 나를? (웃음) 감독님이 그동안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어오셔서 나와 잘 안 맞을 줄 알았다.



-이창동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은 선뜻 상상하기 쉽지 않은 조합인데. (웃음)



=이창동 감독 하면 공직에 계셨기 때문인지 알게 모르게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같은 ‘쟁이’와는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웃음)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니 통하는 게 많았고, 생각보다 훨씬 더 오픈되어 있어서 여러모로 잘 맞았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



=시놉시스가 재미있었다. 좋아하는 요소들이 꽤 많았다. 청춘이 등장하고, <곡성>도 그랬지만 새벽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좋아하는 재즈가 들어가는 데다 고양이가 나오기까지 한다. (웃음) 이창동 감독님의 전작과 결이 많이 달라서 나를 찾나 싶어 함께하기로 했다.



-시나리오가 여러 차례 바뀐 걸로 알고 있다.



=극장 상영 버전과 초고는 뉘앙스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초고는 눌렀다가 폭발시키는 격렬함이 있는데 수정을 하면서 그 울분에 대한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면서 이야기가 많이 바뀌었다. VIP 시사회가 끝난 뒤 열렸던 뒤풀이 자리에서도 그 얘기를 했는데, 지금이 초고보다 낫다는 얘기를 나눴었다.



-원작은 읽어봤나.



=읽었는데 원작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님이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와 다른 방향을 잡았던 것 같다.



-촬영 전 이창동 감독과 어떤 얘기를 주로 나눴나.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집이 감독님 댁과 5분 거리다. 파주 로케이션 장소가 집에서 20분 거리다. 감독님을 만나 커피를 마시면서 장소 헌팅을 다녔다. 보통은 제작부가 후보 촬영지를 물색해오면 키 스탭들이 단체로 확정 헌팅을 다니는데 이번에는 감독님과 단둘이 헌팅을 하러 다녔다. 그렇게 작업한 건 감독님도, 나도 처음이었다.



-무척 어색했겠다. (웃음)



=처음에는 어색했었지. ‘여기 아시죠?’라고 물으면 감독님이 ‘어, 어, 어, 영화가…’라는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답하시고. (웃음) 하루, 이틀 지나니 금세 익숙해졌고 시네마, 공간, 빛, 특히 빛에 대한 생각이 나와 잘 맞았다. 이 영화는 서사가 있지만 서사를 완벽하게 구축해주는 건 공간과 빛이다. 어떤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대에 그 공간에서 발생하는 기운, 배우가 그 공간에 들어갔을 때 또 다른 마술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미지의 힘이 바로 영화가 아닌가 싶다. 대사 한마디 없어도 공간이 어떤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시나리오만큼 지문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나리오가 없을 거다. 소설처럼 인물의 감정과 행동 그리고 공간 묘사가 매우 잘됐다.



-자연광으로만 찍기로 했다고.



=인공적으로 빛을 만들어내기보다 빛의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을 담아내자고 얘기를 나눴다. 특정 공간에서 빛이 하루 중 언제 가장 자연스러운지 찾은 것도 그래서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첫 디지털영화이기도 하다. 필름으로 찍을 생각은 없었나.



=감독님에게 말씀드렸지만 이제는 필름과 디지털을 구분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극장에서 보면 되는 거니까. 테스트 촬영 때 감독님에게 결과를 보여드렸더니 디지털의 장점을 아신 것 같다. 특히 해 뜰 때와 해질녘 같은, 필름으로는 담을 수 없는 풍경을 찍는 게 가능하다는 장점 말이다.



사진01

-공간마다 어떻게 촬영을 설계했는지 얘기해보자. 서울 후암동에 위치한 해미(전종서) 집은 공간이 매우 작고, 창밖으로 남산이 보이며, 그 창을 통해 방 안으로 빛이 들어오는 설정이 관건이었을 텐데. 사진 01



=헌팅한 장소에 가보니 집 위치는 딱 좋은데 남산이 보이는 방향에 창이 없었다. 세트에서 ‘뎅깡’ (촬영을 위해 세트 벽을 떼내는 일)해서 찍어야 하나 아니면 빛이나 창밖 풍경을 CG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우리 영화가 인공적인 공간에서 찍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마침 주인집에 확인해보니 창고로 쓰는 옥탑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앵글이 확보되던가.



=카메라가 종수를 따라 건물 복도에서 올라와 문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한숏으로 보여주지 않나. 이야기의 초반에는 20대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가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전부 사실적으로 찍어야 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좁은 공간에 인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좁으면 좁은 대로, 답답하면 답답한 대로 찍은 것도 그래서다.



-창이 시나리오와 정반대인 남산 반대 방향으로 났는데 빛을 어떻게 남산 방향에서 들어오게 한 건가.



=오후에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 맞은편 창에서 반사판을 이용해 빛이 들어오게 했다.



사진02

-서래마을의 고급 빌라에서 찍은 벤(스티븐 연) 집은 직접 가보았는데 넓고 호화로운 공간이라 인상적이었다. 사진 02



=전체 촬영 일정 중에서 후반부에 그곳에서 총 5회차를 찍었다. 재즈를 포함한 벤의 고급스러운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은은한 공간이다. 실제 그 집의 어떤 조명은 좋은 빛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뜻한 앰버 톤이나 약간 노랗고 고급스러운 조명으로 빛을 설계했다.



-다른 공간에 비해 대사가 많은 공간이기도 한데.



=김(성훈) 기자가 놀러온 날에 찍은 장면은 벤이 종수와 자신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파티를 하는 장면이지 않았나. 해가 떨어질 때 찍기 시작했는데 날이 추워서 입김이 계속 나와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했다. 기술적으로 특별한 시도를 했던 공간은 아니지만 서사에 긴장감을 확 올려야 하는 중요한 장면이라 조명을 좀더 어둡게 했다. 집 복도를 어둡게 해서 공포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 이상한 느낌을 주는 게 포인트였다.



사진03

사진04

-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있는 종수의 집은 마당 앞은 벌판이 보이는 반면, 집 안은 아버지가 쓰던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인 다소 답답한 공간이다. 사진 03, 04



=처음부터 빛을 굉장히 누르고 간 공간이다. 모두 자연광으로 찍었고, 의도적으로 건드린 빛은 하나도 없다. 시간대에 맞게 장면들을 하나씩 찍어나갔다. 집 안은 어두워도 창문을 열면 밖은 눈부신 공간이라는 컨셉은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벤이 사는 집은 잘살지만 하늘이 작게 보이는 반면, 종수의 시골집은 못살고 답답해 보이지만 하늘이 확 트여 있다. 그런 밸런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종수 집은 주로 새벽이나 해질녘에 찍은 장면이 많다보니 하루 중 찍을 수 있는 시간대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오는 오후 시간대에 주로 찍어야 했다. 그때부터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공간, 빛과 관련된 모든 촬영 환경을 미리 체화했던 까닭에 세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파주는 안개가 많기로 유명한데, 촬영하는 동안 안개가 얼마나 끼었나.



=새벽에 촬영이 끝난 뒤 집으로 가는 길에 안개가 깔려 있을 때가 많았다. 안개가 너무 멋지게 찍혀서 막상 영화에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시나리오에 종수가 경운기를 타고 가는 장면도 있었는데 그 또한 그림이 너무 멋지게 나오는 바람에 편집됐다. 후반부에 종수가 달리는 장면도 같은 이유로 많이 덜어내야 했다.



사진05

-종수 집 앞마당에서 종수, 해미, 벤이 대마초를 피우다가 해미가 팬터마임을 선보이는 롱테이크 장면은 촬영이 서사를 더욱 풍부하게 해 매혹적이었다. 사진 05



=시나리오에서 그 장면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해미가 팬터마임을 보여주는 엔딩 부분이었다. 그때 나오는 음악이 마일스 데이비스의 <Lift to the Scaffold>다. 원래 좋아하는 곡인데, 시나리오에 그 곡이 명시된 걸 보고 다시 들었다. 어떻게 하면 그 장면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을까. 돈 많고 여행을 많이 다니는 정체불명의 존재인 벤이 자연스럽게 대마를 꺼낼 수 있는 환경, 해미가 대마를 따라 피우게 된 사연, 대마를 자연스럽게 피우기에 더없이 훌륭한 풍경 등 모든 설정들을 헌팅할 때 계산해 촬영을 설계했다. 처음에 장소 헌팅하러 그곳에 갔을 때 해가 떨어지는 풍경을 보고 ‘우와’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에선 정서적으로 예뻐야 하는 장소는 아니지만 실제 풍경은 예뻤다. 특히 구름이 깔리면 더 아름다워지는 풍경이었다. 그걸 그대로 찍으면 과할 수도 있어서 빛만 보여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슛 들어갈 때 역광에 비친 해미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감독님도, 나도 감탄했다. 장면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기본 원칙을 정해두고 찍기 시작했는데,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니 또 다른 빛이 프레임에 들어오고, 그 빛을 따라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카메라가 하늘 위로 점점 올라갔다. 나중에 감독님도 그걸 원했다고 하니 서로 통한 거지. 원래는 음악이 끝나면 컷이 되어야 하는데 배우도, 나도 모든 게 마법처럼 계속 찍었다. 신들린 듯 그 장면을 찍고 나서 감독님에게 이걸 찍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사진06

-그 장면을 찍기 전에 리허설을 얼마나 했나. 사진 06



=촬영 전날 딱 한번 했었다. 감독님이 주도면밀하게 짜인 동선을 원하지 않았던 까닭에 배우에게도 느끼는 대로 알아서 춤을 추고, 카메라도 자유롭게 움직이라고 주문하셨다. 처음에는 핸드헬드로 찍을까 생각도 했다. 보여줘야 할 포인트가 몇개 있었는데 해미의 뒷모습을 따라가다보니 갑자기 나뭇가지에 바람이 확 불더라. 그때 포커스를 바람쪽에 살짝 넘겨주었을 때 되게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후반부,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찾기 위해 달리는 장면이 많던데.



=감독님이 달리는 장면을 이번처럼 많이 찍은 것도, 그래서 스콜피오 헤드, 스테디캠 같은 장비들을 동원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카메라가 인물을 자유롭게, 정교하게 쫓아가기 위해 그런 장비들을 동원했다. 영화 초반에는 거칠게 시작했지만 서사가 전개되면서 이창동 감독님의 새로운 스타일을 정확하고, 정교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장면들이 쌓이면서 스타일이 바뀌는 거니까.



-마지막 시퀀스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꽤 정교하게 설계됐더라.



=리허설을 3번에 걸쳐 진행했다. 이 영화는 콘티 없이 찍었다. 현장에서 감독님과 서로 의견을 주고받은 뒤 내가 설계한 카메라 움직임을 보여드리면 감독님이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 장면은 처음에는 핸드헬드로 찍기로 했다가 핸드헬드 특유의 거친 느낌이 의도적인 것 같아 감독님도, 나도 ‘별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촬영 당일, 배우의 동선을 대충 맞춘 뒤 카메라가 종수를 따라가면서 찍었는데 그것도 재미가 없었고, 단순했다. 그다음 테이크 때 카메라가 종수의 차 근방에 위치한 뒤 종수의 나체를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 같은 몇 가지 포인트만 잡고 지금의 카메라 동선을 완성했다.



-벤의 차인 포르셰를 태울 제작비가 없었을 텐데. (웃음) 그 장면은 카메라가 포르셰를 안 태우기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포르셰가 불타는 것보다 관객이 인물(종수와 벤)에게 빠지게 하는 게 중요했다. 원래는 원신 원컷으로 설계됐었는데 카메라워킹이 재미가 없어서 컷을 분할했다. 원신 원컷이라 테이크가 길다보니 카메라가 존재한다는 사족이 생기고, 그러면 촬영이 안 좋아진다. 나도, 감독님도 컷을 분할해도 관객이 충분히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 장면을 찍기 전에 눈이 오면 참 좋겠다 싶었는데 카메라를 들자 진짜 눈이 내렸다. 운이 좋았다.



-자연이 마법처럼 도와준 장면이 많은 영화는 행운이 아닌가.



=<마더>(2009) 때도, <곡성> 때도 이렇게 자연이 도와준 적이 없었다. 해미가 전화를 받지 않고, 벤이 태운다는 비닐하우스가 무엇인지 찾는 과정에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종수가 논두렁을 달리는 시퀀스가 있다. 시나리오에는 ‘개가 짖는다’라는 지문 정도가 있었던 장면인데 막상 촬영할 때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프레임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긴장감이 있고, 음산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상상을 초월할만큼 많은 새 떼가 약속이라도 한 듯 카메라에 담긴 것이다. 두 번째 테이크가 새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첫 번째 테이크가 영화에 쓰였다.



-색보정 작업할 때 신경 쓴 건 뭔가.



=특별히 색을 보정하지 않았다. 원본 소스 그대로 썼고, 미세한 부분만 약간 매만졌다.



-인터뷰가 끝나면 차기작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찍으러 가는데.



=<버닝>이 공간을 보여주는 영화였다면, <기생충>은 다양한 캐릭터가 나오는 만큼 인물 위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전주시, 고양시, 서울에 위치한 외딴 동네를 주로 돌아다닐 것 같다. 어쨌거나 이창동 감독님과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꼭 써달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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