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버닝> 평론 - 無의 몸짓
2018-05-31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극장에 걸려 있는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은 영화적 감흥이 충만한 영화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서사를 강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현재 충무로에서 <버닝>은 ‘영화란 이미지’라는 명제에 충실하다.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보내온 긴 글이 영화를 본 독자들에게 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 이창동 감독과 처음 작업한 홍경표 촬영감독을 만나 <버닝>의 이미지에 대한 자세한 작업기를 들었다. <버닝>은 수많은 메타포가 촘촘하게 연결된 영화이지만 메타포가 어떤 뜻인지 일일이 해석하기보다 아무런 선입견과 프레임 없이 바라보았을 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나는 <버닝>이 이창동 그 자신의 영화 경력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이미지로 서사를 부숴버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에 묘사된 관념적 메타포를 끌어와 더 확장시키고 여러 개의 연관된 메타포들을 겹겹이 배치해 이야기의 윤곽을 만든 다음 그것들을 무너뜨려버린다. 없다는 것을 잊는다는 것, 그런데 잊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런 것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초록물고기>(1997)에서 <시>(2010)에 이르기까지 이창동의 이전 영화는 단단한 인과론적 서사의 얼개를 지어놓고 이미지로 틈을 만들어 리얼리티의 복합성을 증명하려 했다. <박하사탕>(1999)에서의 거꾸로 가는 기차 이미지로 제시된 시제의 역행, <오아시스>(2002)에서의 현실과 환상의 도치, <밀양>(2007)에서의 보는/보이는 시점의 정교한 교차, <시>에서의 피해자 시점을 향해 나아가다 동일화되는 구조와 결말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에 비하면 <버닝>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 한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미지로 이야기의 메타포를 부수고 대치하려는 이창동의 노력이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시기의 한국영화계에서 이창동이 <버닝>에서 보여준 것만큼, 영화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아가 영화란 무엇인가를 깊게 파고든 성취는 드물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러저러하다, 또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신념 또는 상투형만이 진영논리와 상업주의의 장벽 아래 똬리를 틀고 진부한 명제를 윤색해 분칠한 영화들만이 넘쳐나는 가운데 이창동은 영화의 이미지가 진실한가, 그것은 인간과 현실의 복합성을 드러낼 만한 그릇인가를 형식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우선, 어느 문을 프레이밍한 화면이 보인다. 우리는 그 문에서 누가 나오거나 누가 그 문으로 들어갈 줄 예상하고 지켜본다. 그렇지 않다. 그 문 옆 오른쪽 벽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화면 안으로 들어와 문을 열고 물품을 꺼내 등에 걸치고 이동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이종수(유아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의 시선을 교란시키며 우리의 예상을 깨는 프레임 인 방식을 보여준다. 이것은 영화 전체의 시각적 전략이다. 관객의 예단을 허용한 다음 그걸 깨트린다. 시각적 긴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예단하는 과정의 확인이라는 영화 문법의 틀을 깬다.

영화는 고향 친구인 이종수와 신해미(전종서)의 만남과 갑작스런 섹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이별을 묘사한 다음,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가 종수에게 소개한 벤(스티븐 연)이라는 부자 청년과 만나는 과정을 통해 세 사람의 삼각관계 비슷한 것을 담아내고, 해미가 갑작스레 사라진 후 종수가 벤에게 느끼는 열패감과 의심을 다룬다. 영화 속 대사에 나오지만(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벤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와 같은 인물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돈이 많고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지녔으며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타인이 알기 힘든 결핍을 지닌 사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곧잘 변주된 이 유형의 ‘개츠비 서사’에서 주인공은 개츠비 인물에게서 자신의 다른 이면, 또는 되고자 하는 에고를 보며 그게 다 무(無)라는 것을 깨달을 때 다시 태어난다.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메타포와 그 반복

<버닝>은 느슨하게 그런 개츠비 서사를 차용하지만 서사의 연쇄는 촘촘한 인과론에 매달리지 않는다. 대신, 이종수와 벤, 신해미를 축으로 놓고 서사적 긴장감을 자아내는 일차적 도구는 문학적 메타포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서 끌어오고 확대시킨 그 메타포들은 주인공들의 말을 통해 전달된다. 문예창작과를 다니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 준비 중인 소설가 지망생 이종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행사 도우미로 일하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고향 친구인 신해미를 만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신해미는 귤을 먹는 팬터마임 동작을 연기하면서 말한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진짜 침이 나오고 그럼 맛있어.” 압운을 맞추듯이 이 화두는 이후 영화의 여러 장면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해미는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메타포를 주었다. 해미의 집에 종수가 처음 갔을 때 해미가 여행 가 있는 동안 돌봐줄 보일이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가 정말 있기는 한 거냐고 물었을 때 해미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 같으냐고 반문한다. “혹시 보일이도 상상 속에만 있는 거 아냐? 내가 너 없는 동안 여기 와서 상상 속의 고양이한테 먹이를 줘야 되는 거 아냐?” 해미는 종수의 말을 반박한다. “그래도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거야…. 어떤 것은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너무 좋은 거 같아. 지금 네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영화 내내 고양이는 보이지 않지만 고양이의 흔적은 남아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서 해미는 어렸을 적 자신이 우물에 빠졌을 때 종수가 와서 구해줬다고 말한다. 해미의 가족은 해미의 그 말이 거짓이라고 한다. 종수 자신도 기억이 없다. 해미의 예전 집을 찾아가지만 우물의 흔적은 없고 마을 이장도 그 사실을 부정한다. 그런데 오래 떨어져 있던 종수의 어머니는 오랜만에 만났을 때 해미의 집 앞에 우물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야기는 우리 삶에 대한 어떤 메타포다. 그런 점에서 해미는 스토리텔러다. 이 점은 아이러니하다.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초반에 해미 앞에서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하기 때문이다. 벤의 말처럼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메타포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메타포는 해미가 준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메타포를 주는 이는 벤이다. 벤은 그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메타포를 주었다. 파주에 있는 종수 집에 해미와 함께 찾아온 벤은 대마초를 피우고 해미가 잠든 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자신의 취미를 고백한다. “한국에는요… 비닐하우스들이 진짜 많아요. 쓸모없고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거 같아요. 그리고 난 그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거지요.” “그게 쓸모없고 불필요한 건지는 형이 판단한다고요?”라고 종수가 힐난하자 벤은 “나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그것들이 태워지길 기다리고 있다는 거를… 그건… 비 같은 거예요. 비가 온다. 강이 넘치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해요? 거기에 옳고 그른 건 없어요.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 존재 같은 거예요.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파주에도 있고 방배동에도 있다. 서울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다. 그런 거… 그런 균형….”

물질적으로 모든 걸 다 갖춘 벤은 초월자 행세를 한다. 약육강식 질서에 따른 생성 소멸의 원리를 직접 집행함으로써 삶의 권태를 태운다고 하는 벤의 행동은 종수에게는 다른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벤이 어떤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인지 탐색하는 가운데 종수는 그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태울지도 모른다는 강박을 느낀다. 어떤 이는 권태 때문에, 어떤 이는 분노와 상실감 때문에 불을 지르려 한다. 종수는 아직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소설가이며 그의 아버지는 사회적 분노로 감옥에 가 있고 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가출했으며 그가 욕망하는 여자친구 해미는 벤의 곁에 있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벤이 정말 종수 집 근처의 비닐하우스를 태웠는지는 증명되지 않는다. 종수가 나중에 만난 벤은 비닐하우스를 이미 태웠다고 했지만 종수는 그걸 확인할 수 없다.

등장인물들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말을 통해 긍정 또는 부정하지만 정작 그게 화면에 증명되어야 할 때 이미지의 증거력은 불확실하다. 해미는 없는 것을 잊으라고 했지만 동시에 있는 것은 있는 거라고 수정한다. 그가 말한 고양이는 종수 앞에 나타나지 않지만 고양이의 흔적은 해미의 방 안에 늘 있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벤의 행동은 종수에게 태우고 싶다는 강박적 충동을 자극했지만 증명되지 않았다. 해미는 귤을 먹는 팬터마임을 연기하면서 없다는 것을 잊으면 진짜로 귤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종수가 벤이 태울 비닐하우스를 지레짐작하고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장면으로 공명된다. 먹고 싶다/태우고 싶다는 것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마치 유령 같은 그들

문학적 메타포에 매달리면 <버닝>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개츠비 서사’의 틀에서 보자면 종수는 벤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성장한다. 영화의 말미에 그는 드디어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 자기만의 메타포를 지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해미의 방 안에서 열심히 뭔가를 쓰는 종수를 카메라는 줌아웃으로 빠지면서 보여준다. 마치 영화의 흔한 엔딩처럼 그 장면은 끝난다. 명확하진 않지만 에필로그처럼 이어지는 그다음 장면들은 종수의 소설에 나오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종수의 결핍감과 분노는 마침내 목표를 정했고 비닐하우스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 벤을 태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단편소설의 마지막은 “밤의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라는 문장으로 끝나지만 영화 <버닝>에선 벤을 태워 죽인 종수가 자기 옷가지도 태워 나체로 이동하는 걸로 끝난다. 그는 벤에게서 부의 편중이라는 사회적 모순의 세속적 은혜와 영광을 보았지만 그의 내면에서 무의미, 허무를 보았다. 두개의 결말, 소설을 쓰는 종수와 살인을 저지르는 종수 모두 새로 거듭난 사람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사는 공간의 심상이 있다. 영화의 중·후반부터 이창동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외형을 취하는 척하면서 <버닝>을 일종의 로드무비로 만들어버린다. 종수는 차로, 달리기로 파주 집 주변을 탐색한다. 새벽의 여명에 보이는 파주의 공간들,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는 사람을 밀어낼 듯 느껴지기도 하는 그 공간은 종수의 아버지가 은행 빚을 얻어 축산업을 하려다 망했던 곳이며 과거의 흔적을 지웠지만 새로 태어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 불모의 공간이다. 종수가 비닐하우스 탐색을 멈추고 벤의 행적을 뒤쫓을 때부터 영화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처럼 상당수 상영시간을 미행 장면으로 채운다.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영원과 찰나, 삶과 죽음의 이원구도를 아름다운 여성 마들레인의 매혹을 통해 제시한 <현기증>과 달리 <버닝>은 대남방송이 지속적으로 들리는 종수의 고향 마을 파주 곳곳의 풍경과 강남 방배동의 부촌을 왕복하며 용산참사를 재현한 큰 그림이 걸려 있는 미술관을 거치기도 하면서, 인적이 드문 파주를 차로 유랑하는 벤의 포르셰와 종수의 낡은 트럭을 따라 담는다. 종수는 보고 벤은 보이며, 벤이 위에 있으면 종수가 아래에 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의 결핍에 시달린다. 인적이 드문 파주에서 그들은 마치 유령같다.

이창동 감독 본인은 이 영화를 ‘젊은이들의 분노’를 다룬 영화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나는 그의 자평과는 별개로 이 영화를 ‘젊은이들의 삶에 관한 공감의 영화’라고 본다. 연민이나 동정과 같은 수직적 태도로 접근한 것이 아닌, 수평적 태도로 접근한 공감의 기운은 이 영화 곳곳에 넘쳐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어릴 적 우물에 빠졌다는 해미의 말,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그 말에 대해 종수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일축하는 해미의 가족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해미가 일곱살 때요. 몇 시간 동안 우물 밑에서 울고 있었대요. 울면서 위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누가 나타나기만 기다리면서… 파랗고 동그란 하늘… 그걸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때 해미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해봤어요.”

그런 공감의 질긴 끈 속에서 이창동은 턱없이 강인해 보이는 부조리한 현실과 그 속에서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개인들의 면면을, 역시 허약하고 불완전한 매체인 영화로 어떻게 담을 수 있는지를 신중하게 고민하는 서사와 형식을 만들어냈다. 현실인지 소설 속의 환상인지 애매한 두개의 결말 사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믿을 수 있다고 믿는 우리의 통념에 불과한 것인가, 라고 묻게 된다. 진짜와 가짜,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서사의 윤곽에 자리해 메타포를 던지지만 영화의 이미지는 그걸 확증하지 못한다. 메타포들을 증명하거나 지탱할 것 같은 이미지들은 메타포의 보조 수단으로 자리하는 게 아니라 메타포를 지워버리며 종국에는 이미지 그 자체로 관객의 뇌리에 자리한다. 이를테면, 해미의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북향집에 떨어지는 빛의 이미지가 있다. 해미의 말에 따르면 하루 동안 딱 한번만 그녀의 방에 떨어지는 빛이다. “남산 전망대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돼서 여기까지 들어와. 짱이지? 근데 아주 잠깐 들어오기 땜에 진짜 운이 좋아야 볼 수 있어.” 종수가 해미와 섹스를 할 때 남산 전망대에서 반사된 햇빛이 들어와 벽에 걸려 있다. 날카롭고 길게 자리한 그 빛을 종수가 올려다볼 때 그것이 실제 빛인지 아니면 종수의 환상인지 알 수가 없다.

종수는 이후 해미가 없는 동안 그 방에서 몇 차례 자위를 한다. 없는 해미를 상상하는 게 아니라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고서. 영화 속 한 장면에서 해미는 느닷없이 종수의 시야에 자리해 섹스를 하고 그것은 종수의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해미의 방에서 자위를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욕구의 해결이지만 그 욕구는 해미와 더불어 넘어서고 싶은 다른 삶을 향한 욕망이다. 거의 이뤄지기 힘든, 하루에 한번 운이 좋으면 드는 빛처럼. 그와 해미의 삶은 빛을 온전히 바랄 수 없는 삶이다. 해미의 지저분한 방에 붙어 있는 해미의 사진처럼 종수의 파주 집, 종수의 아버지가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한 지저분한 집 마루에는 종수의 스무살 무렵 사진 액자가 붙어 있다.

의미의 강박적 굴레에서 떨어져

끝으로, 가장 강력하게 남는 이 영화 속 이미지에 관해 말하고 싶다. 영화 중반 종수의 집 앞에서 대마초를 피운 해미가 몰아 상태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종수가 처음 해미를 만났을 때 이벤트 도우미인 해미는 고객의 눈길을 끄는 춤을 추고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후에 해미는 벤의 친구들 앞에서 부시맨들이 추는 춤을 보여준다.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인 ‘리틀 헝거’의 춤,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의 춤. 어떻게 이름을 붙이건 간에 다 헛소리이고 해미는 원숭이처럼 벤 친구들의 은근한 놀림감 상태로 춤을 춘다. 해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고 맹렬하게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역시 벤처럼 텅 빈 기호이다. 그녀는 메타포를 던지며 자기 삶을 정의하려 하지만 그의 속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로 그녀를 우리는 비난하지 못한다. 종수의 집 마당에 해가 지고 빛과 어둠이 교차할 찰나 해미가 추는 춤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슬프다. 아름다운 것은 그의 춤이 삶의 무의미에 격렬하게 항거하면서 동작을 통해 뭔가를 의미하려는 갈구를 드러내기 때문이고 슬픈 것은 그 몸짓의 아름다움에 비해 그것이 함의하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앞선 장면들에서의 춤과 달리 이 장면에서 해미가 추는 춤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춤이 아니었다. 해미는 자신의 내적 요동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어린아이의 본능에 따른 움직임처럼 싱그럽다. 그것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음으로 해서 역설적으로 그것은 해미가 그토록 갈구하던 의미의 강박적 굴레에서 떨어져 나온 몸짓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이창동이 젊은이들의 삶을 깊은 공감의 태도로 착취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형상화한 결과물들이라고 본다. 서사적 메타포는 여전히 언어로 확정될 수 없는 상태로 떠돌고 이미지는 강력하게 잔상에 남아 뇌리에 맴돈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이 이상의 성취는 어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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