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허스토리> 예수정 - 침묵의 순간을 눈여겨본다
2018-06-19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이번엔 욕도 하고 담배도 많이 피워요.” <부산행>(2016)과 <신과 함께-죄와 벌>(2017)의 예수정은 희생과 수용을 자처하는 어머니상으로 대중의 감응을 끌어낸 바 있다. 그러나 <허스토리>의 박순녀는 어머니가 될 수도, 가족 제도에 편입할 수도 없는 고통 속에서 악을 쓰며 살아남은 위안부 피해자다. 최근까지도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올라 깊은 사유를 들려준 동시에 대형 상업영화에서도 꼿꼿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예수정의 내공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그는 투박한 이북 사투리와 무심한 제스처들 너머로 박 할머니의 헤아릴 수 없는 어둠과 처절함까지 기품 있게 조율해낸다.

-역할을 제안받은 뒤 첫 반응은 어땠나.

=민규동 감독님에게 조금 엄살을 부렸다. 정말 다 좋은데, 신체 일부를 드러내는 장면 때문에 걱정이 된다고 약한 소리를 했지. 결과적으로 감독님이 많이 배려해줬다.

-연극 <하나코>에서 일제강점기에 캄보디아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를 연기한 적 있는데, 그때의 경험도 되살아났겠다.

=무대에서 뒤로 돌아서서 온갖 상처투성이인 등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매일 분장에만 2시간씩 걸렸다. 연습 두달 반에 공연하는 석달 내내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한번 겪어봐서 그 과정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안다. 한편으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

-박순녀는 최근 맡은 캐릭터와 비교해 확실히 거칠고 강한 표현을 즐긴다.

=순녀는 직설적이고 개운하게 말한다. 이북 사투리를 쓰는 점도 한몫할 거다. 이북에서는 빨리 오라고 상대방을 재촉할 때 “허리가 부러졌네? 와 이렇게 느리네?”라고 한다. 웃기려는 말이 아니라 그쪽 표현법이 약간 세다.

-남한테 약한 모습 보이지 않고, 고통도 덤덤히 술회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히 마음이 갔는데.

=다 지나가서 그렇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인생은 극복뿐이지 않나. 과거는 지나갔고, 그사이 삶은 계속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곰을 피하고 싶어도 도망갈 길이 험한 바다밖에 없을 때는 곰과 정면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지’라는 독백이 있다. 순녀는 현재를 혼자서 살아내기에 버거운 인물이라 과거의 고통에 침잠할 겨를이 없다.

-<부산행>에서 동생을 살리기 위해 좀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비중이 작은 인물을 마지막 순간까지 애틋하게 살려낸 것처럼, 시나리오에선 작았던 역할도 예수정 배우를 거쳐서 존재감이 커질 거란 기대가 있다.

=순녀의 심정을 보다 근원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장면이 있었다. 재판하러 일본으로 떠나는 배에 올라탄 순녀는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엄마’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순녀가 느끼는 진짜 감각, 그 유기체적인 반응을 찾고 싶었고 단순한 멀미가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의 ‘구토’가 더해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중·장년층의 여성배우들이 함께하는 작업은 그간 드물었기에 더 반갑게 느끼는 관객이 많지 않을까.

=좁은 공간에 모여서 부대끼는 장면들이 특히 재밌었다. 내 또래의 여성배우들은 대체로 누구의 엄마나 가족의 일원을 연기하지 않나. <허스토리>는 그런 면의 갈증을 풀어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여러 명의 배우와 호흡할 때 어떻게 자기만의 리듬을 찾나.

=나는 어떻게 보면 상대로부터 얻어내는 게 많은 배우다. 상대방의 연기를 살피고 나서 그걸 흡수하는 식이다. <허스토리>는 바라볼 데가 너무 많은 영화 아닌가. 여러 명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니 서로를 바라봐주는 자연스러운 리액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어디서 영감을 얻나.

=공백의 시간을 즐긴다. 어린 시절에도 꼭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 관찰자처럼 세상을 살았던 것 같다. <허스토리>에서도 영화의 시간 바깥에 서 있는 박순녀만의 시간을 상상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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