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딩턴2>에서 패딩턴의 목소리를 맡은 벤 위쇼, 악역 피닉스 뷰캐넌을 연기한 휴 그랜트가 퀴어와 정치극, 블랙 유머와 치정극이 탁월하게 융합된 3부작 드라마에서 다시 만났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은 역시 허구가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극적이었던 1970년대 영국 정치판에서 벌어진 실화를 다룬다.
동성애 금지법이 존재하던 1965년, 차기 영국 총리를 꿈꿀 만큼 야망있고 평판 역시 좋았던 영국 자유당 국회의원 제레미 소프(휴 그랜트)가 절친한 동료 의원 베셀(알렉스 제닝스)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제레미는 4년 전 지인의 집에 놀러 갔다가 마구간을 관리하는 노먼 스콧(벤 위쇼)과 마주치게 되는데, 첫만남에서 호감을 느낀 그는 노먼에게 혹시 런던에 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말한다. 1년 후 일하던 집에서 모욕적인 말을 듣고 쫓겨난 노먼은 무작정 웨스트민스터로 향해 제레미를 찾고, 두 사람은 급격히 사랑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제레미는 노먼이 한동안 머물 집을 구해주고, 그가 쫓겨난 주인집에 두고 온 국민보험카드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제레미와 노먼의 계급 차이는 잦은 다툼으로 이어지면서 연인은 헤어지게 된다. 노먼은 경찰을 찾아가 제레미와의 동성애 사실을 고백하고 그동안 받은 편지를 증거물로 제출하지만, 특수수사부 MI5로 사건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사건은 흐지부지된다. 이후 제레미가 자유당 대표로 선출되고 한 여성과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꾸려가는 사이, 부모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온 노먼은 천진하고 대책 없는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엉망진창인 생활을 하고 있다. 결국 그는 제레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고용주이자 연인이었던 제레미가 국민보험카드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호소하지만, 이 사건은 제레미가 노먼을 살해하기로 마음먹는 계기가 된다. 이후 제레미는 노먼의 등장으로 위기를 겪을 때마다 그의 친구 베셀에게 노먼을 암살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여러 사람을 거쳐 완성된 엉성한 청부살인 계획이 실패하면서 제레미의 정치 인생은 끝장이 난다. 결국 그는 살인음모죄, 살인교사죄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다.
실화 소재의 입체적 드라마
살인청부보다 동성애와 그에 따른 가십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끌던 70년대 영국의 분위기는 그 자체로 거대한 블랙코미디다. 노먼의 암살 계획 역시 너무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진행되며 드라마의 블랙코미디적인 면을 한껏 강화하는데, 최근 개봉한 영화 <아이, 토냐>(2017)의 연출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유머러스한 톤의 함정에 빠져 게이를 희화화하거나 그들이 치정극을 벌이는 사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제삼자의 이야기를 가볍게 다루는 우를 범하지 않는 신중함은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미덕이다.
무엇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게이들에게 억압적인 60~70년대 사회 분위기가 야망 있는 정치인에게 미친 여파는 드라마를 가장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다. 자유당 소속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옹호하던 제레미 소프는 “동성애 금지법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내 성 정체성이 밝혀지면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다. 이는 제레미 소프를 단순한 악역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고, 제레미 소프와 노먼 스콧의 계급 차를 신선하게 묘사하는 장치가 된다.
존 프레스턴의 동명 책을 원작으로 했고, <퀴어 애즈 포크> <닥터 후>의 러셀 T. 데이비스가 각본을 맡았다. 실제 동성애자인 그는 “이미 책에도 사건에 대한 많은 것이 기술되어 있지만, 왜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했는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당시 제레미 소프의 재판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실제로는 꽤 은폐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의 삶이 망가졌고 결국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는데, 이것이 동성애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디와이어>)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인을 ‘토끼’라고 부른 점이나 법정에서의 삽입 섹스 과정 묘사가 비웃음을 사는 등 우스운 가십으로 소비됐던 이 사건의 또 다른 의미를 포착한다. 가령 노먼은 극중에서 “동성애는 결함이 아니다. 내가 게이라서 자랑스럽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후 성 소수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데이비스는 “노먼 스콧 같은 사람은 성 소수자 역사에서 오랫동안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비슷한 시기 쿠엔틴 크리스프 같은 배우는 예술계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멋진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지만, 런던 밖 농장에서 살던 스콧은 달랐다”(<인디와이어>)고 말한다.
두 주연배우 모두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지만, 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휴 그랜트쪽이다. 그는 최고위층의 위선적인 모습을 때로는 풍자적으로, 때로는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슬픈 얼굴로 섬세하게 보여준다. <귀를 기울여>(1987)에서 동성애인에게 살해당한 영국의 극작가 조 오튼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던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이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