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리' 확장하기①] 난민, 차별, 증오, 공포... 영화가 세계를 사유하는 법
2018-08-08
글 : 송경원
<더 스퀘어>와 <주피터스 문>을 계기로 살펴보는 영화가 난민 관련 이슈를 다루는 방식의 시대별 변화 혹은 진화에 대하여
<더 스퀘어>

위선도 선(善)이다. 목적과 과정, 행위가 모두 일치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이상적인 순간은 극히 드물게 허락된다. 때문에 나는 선한 의지가 초래한 안타까운 결과, 왜곡된 의지가 의도치 않게 빚어낸 선한 결과 모두를 긍정하려 한다. 제목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저자 라인홀드 니버는 집단이 이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한다. 집단이 커질수록 이기심이 팽창하는 게 아니라 도덕심이 둔감해진다. 필요악으로서의 공권력이 책임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집단,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통해 지속 가능한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일정 부분 권력을 위임하고 강제력을 허가하게 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공동체 내부의 평화를 위해 정의를 희생시키고, 또한 공동체간의 평화를 파괴하기도 한다”(라인홀드 니버). 말하자면 국가, 그리고 국경선은 선택된 불의이자 허용된 차별이다.

<디판>

2015년 보트피플 이후의 유럽영화

영화는 이러한 불의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슈퍼히어로영화는 이러한 딜레마를 한 사람의 몸에 심어 도덕적 갈등을 유발시킨다. 국가 단위의 폭력을 개인이 수행하게 되었을 때 개인(히어로)은 힘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차별, 피해를 놓고 괴로워한다. 이 경우 도덕적 딜레마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집단은 이 죄의식을 균등하게 나누고 희석시켜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필요악으로서의 힘을 획득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실을 알고 있지만 나(혹은 집단)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행동하지 않는다. 여기엔 공포가 전제로 깔린다. 경계가 무너지면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폭력이 침범하여 일상을 무너트릴 것이라는 공포.

다소 극단적으로 분류하자면, 영화는 이 불편한 진실에 대해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호응해왔다. 어떤 영화들은 낙천적 포퓔리슴을 통해 해피엔딩의 환상으로 갈등을 봉합한다. 알다시피 할리우드가 끈질기게 이어받아온 이러한 낙관주의는 사회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되 개인의 도덕적 선택과 그에 따른 긍정적 결말들로 포장된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공포의 안전거리를 확보한 뒤 그조차 쾌감의 소재로 포장하여 팔아치운다. 다른 하나는 시스템의 모순을 지적하고 현실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포착하는 영화들이다.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이런 영화들은 소위 예술영화, 작가주의영화로 분류되어 진실의 단면을 전해왔다. 다만 이와 같은 현실 포착은 개인 체험의 한계, 예술가적 각성 또는 카메라 한대 분량의 진실에 입각한 만큼 주로 미시적인 역사, 현미경의 역할에 집중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종종 이런 구분과 경계가 사라지고 불현듯 도약과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가 있다. 현실이 영화 이미지를 압도할 때, 집단의 체험이 모든 상상력과 변명을 무력화할 때 영화(혹은 영화가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는 상처를 흡수하고 관습의 껍질을 탈피해 변화한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이후의 한국영화가 그랬고, 9·11 테러 이후의 미국영화가 그랬다. 보장된 안전거리가 침범당한 영화는 더이상(혹은 당분간) 폭력의 스펙터클을 똑같은 방식으로 즐길 수 없다.

여기서 영화는 또다시 두 가지 갈림길에 선다. 하나는 스펙터클의 체험 방식을 변모시키는 작업이다. 가령 9·11 이후 <클로버필드>(2008)처럼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부쩍 늘어난 미국영화가 그렇다. 이들 영화는 기승전결의 서사 대신 공포의 과정 자체를 체현시키는 등 새로운 장르적 결합을 시도하며 이를 다시 스펙터클의 쾌감으로 환원시킨다. 다른 하나는 문제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서 미시적 역사의 시점을 전환하는 것이다. 영화가 근본적으로 한 사람 분량의 진실, 정보, 체험을 옮길 수밖에 없다면 진실을 입체적으로 더듬기 위해서는 다양한 맥락의 시점을 제공하여 보충할 수 있다. 한 사람 분량의 미시역사의 가능성들을 복원해온 이들 영화는 수많은 미시사들을 모래알처럼 뭉쳐 포장된 환상에 대항한다.

2000년 이후 미국영화에 박힌 거대한 쐐기가 9·11이었다면 유럽영화의 정체된 껍질을 강제적으로 탈피시킨 사건은 지중해를 메운 난민, 보트피플이다. 2015년 4월12일 리비아에서 출발해 이탈리아로 가던 난민선이 전복되어 400명가량이 익사한 참사가 벌어졌다. 숫자는 곧 스펙터클이다. 대규모 참상을 목격한 유럽 사회는 난민에 대한 관용적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국제이주기구에 따르면 2012년 지중해를 건너다 사망한 난민만 3072명이고 2000년부터 계산하면 2만2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편으론 숫자를 넘어 타자의 죽음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결정적 이미지가 필요하다. 2015년 9월에는 3살배기 난민 꼬마 에이란 쿠르디의 사진이 숱한 유럽인들의 양심을 움직였다.

하지만 보트피플의 연속된 참사를 비롯해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이미지들에 노출되어온 유럽 사회는 차츰 둔감해지고 있다. 거기에 난민에 의한 사회적 부작용을 겪고 있는 유럽은 현재 난민 수용 여부를 두고 분열에 빠진 상태다.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영화는 국가의 정신성을 반영한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시간에 따라 반영의 정도와 밀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며 중요한 건 점이 아니라선, 다시 말해 흐름이다. 2015년에 즉각적으로 쏟아져 나왔던 유럽의 난민 소재 영화들과 2017년 난민을 다룬 영화들은 또 한 차례 변모했다. 1년의 시간이 지나 다소 늦게 우리에게 도착한 두편의 영화가 있다. 제주 예멘 난민과 함께 도착한 이 영화들은 어쩌면 지금 우리를 돌아보기 위한 시기적절한 편지처럼 읽힌다.

<클로버필드>

<더 스퀘어>, 외부의 관찰에서 내부의 성찰로

처음에는 옳고 그름이 분명해 보였다. 경제적 손익과 정치적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난민들이 겪을 고통과 상처에 우선 집중하는 영화들이 대다수를 이뤘다. 68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디판>(2015)은 스리랑카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쳐온 난민이 프랑스 사회에서 또 다른 폭력 속에 어떻게 노출되고 희생을 강요당하는지를 그린다. 현실 문제가 아무리 복잡해도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난민도 구성원의 일부이며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인간이란 명확한 진실이다. 이는 개인 차원의 도덕성을 탐구하는 영화의 1차적인 반응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난민 문제가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고 구성원에 피해를 끼치는 단계에 이르자 개인의 도덕적 판단에 기댄 영화들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른바 집단의 이기심은 어디에 기초하며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양심을 무력화하는지에 대한 통찰이 필요해진 것이다. 루벤 위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는 그에 대한 화답처럼 보인다. 감독은 이론과 행동의 거리, 머리와 가슴의 거리를 풍자적으로 제시하며 연대의 필요를 다시금 화두의 중심에 끌어올린다.

스톡홀롬의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은 ‘더 스퀘어’라는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사각의 공간 안에서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나눠 갖고 서로 믿으며 배려한다는 설치예술은 더없이 올바른 시도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실험적인 프로젝트에 그친다. 영화는 프로젝트로 상징되는 예술가들, 유럽 엘리트들의 이성과 현실 사이의 간극들을 조금씩 보여주며 위선의 장막을 하나씩 까발리기 시작한다. 크리스티안은 노숙자들에게 기꺼이 빵을 사주는 좋은 사람이지만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오기 시작하면 태도가 달라진다. 어쩌면 그의 호의는 차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구걸하는 노숙자가 빵에 양파를 빼달라는 요구를 하자 그는 샌드위치를 식탁에 던지며 알아서 빼라고 냉소한다. 크리스티안의 이중적 태도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된 미디어의 메시지에 위안을 얻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확장, 적용된다.

<더 스퀘어>가 메인 테마로 삼는 건 공연과정 중 벌어지는 해프닝이라기보다는 그 주변을 둘러싼 현실과의 괴리다. 한쪽에서 이웃들의 생명을 구하자는 구호단체의 서명이 진행되고 바로 옆에서는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외면하는 광경은 영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 변주된다. <더 스퀘어>에 핵심적인 대사는 다름 아닌 ‘도와주세요!’다. 도움을 요청하는 한마디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응당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마땅하고 이를 모두 알고 있지만 실제는 상황과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의 반응을 보인다. 여의치 않아서 돕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을 가르는 기준은 무의식 중에 구분해놓은 계급의 차이다.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의 설명에는 박수갈채를 보내던 사람들이 뒤이어 제공될 요리에 대한 설명은 무시하고 식당으로 몰려가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큐레이터와 요리사의 신분을 갈라버린다.

영화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인 유인원을 흉내낸 행위예술가의 퍼포먼스는 엘리트들이 확보한 위선의 거리를 단번에 박살내는 우화적인 장면이다. 예술가의 난폭한 행동을 쇼로 즐기던 사람들은 폭행을 당하는 여성의 도와달라는 외침을 듣고도 외면하고 침묵한다. 이들이 비도덕적이거나 비이성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행동에 나설 만큼 충분한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한 노인이 나서 이를 막아서는 걸 본 후에야 관객은 행위예술가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지하고 폭력으로 응징한다. <디판>이 이민자의 시선에서 사회의 폭력을 조망했다면 <더 스퀘어>는 내부자의 시선에서 선택적 이타주의를 풍자한다. 다만 영화는 위선을 조롱하거나 잘못되었다고 훈계하는 것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나는 오히려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이 그런 방식으로 고정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기심을 부정한 것,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긍정적인 위선의 가능성조차 차단당한다. <더 스퀘어>는 도리어 지적 허영과 우리 안의 이기심을 인정하는 것부터 논의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 500명, 관객의 입장에서 논하던 도덕적 딜레마를 현실 문제로 자각하기 시작한 우리에게 필요한 출발선은 어쩌면 바로 여기일지도 모른다.

<우주전쟁>

<주피터스 문> ,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

2015년 유럽이 시리아 난민에게 문을 열었을 때 서유럽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헝가리는 이들을 거부했다. 유럽의 트럼프라 불리는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은 “이들은 망명자가 아닌 독일식 삶을 추구하는 이민자일 뿐”이라며 장벽을 세웠다. <주피터스 문>의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은 이러한 헝가리의 반난민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리아 난민 아리안(솜버 예거)은 밀입국 와중에 중력을 거슬러 허공을 부유하는 능력을 얻고 부패한 의사 스턴(메랍 니니트체)을 만나 이용당한다.

대개 SF적인 상상력은 현실보다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압축하는 효과적인 무대를 마련해준다. 상황을 단순화해 딜레마 자체를 양각의 판화처럼 도드라지게 구성하는 힘이 있기도 하거니와 상상력 자체가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인 경우가 많다. <주피터스 문> 역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리안이 허공을 떠다니는 방식은 슈퍼히어로의 활강이라기보다는 물속을 유영하는 이미지에 가깝다. 오프닝부터 대범한 롱테이크로 이미지를 전시하는 이 영화는 사실 SF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적 프레스코화에 가깝다. 영화라는 장대한 스펙터클, 롱테이크와 카메라 무빙을 통해 곳곳에서 종교적인 판화들을 찍어낸다. 밀입국 과정에서 물에 빠지고 총에 맞은 뒤 허공을 부유하며 부활하는 아리안의 모습은 그 자체로 예수, 천사, 신에 대한 도상이나 다름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주피터스 문>은 이를 영화가 구축한 이미지 문법을 통해 과시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아리안은 중력을 통제한다기보다는 물속에서 유영하는 이미지를 통해 죽음을 환기시킨다. 그는 수장된 수많은 난민들의 현신이자 영화적 구현인 셈이다.

오늘날 영화를 압도하는 이미지는 쉴 틈 없이 쏟아진다. 9·11을 목격한 이후 어떤 스펙터클과 공포도 하찮은 것이 되었고 전세계로 확산된 포스트 9·11, 공포의 공기 속에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의 효력은 점차 고갈되는 중이다. 할리우드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이를 돌파했다. 서사의 결과로서 공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 한가운데로 관객을 밀어넣었고(<우주전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무역센터 한가운데로 관객을 데려가 입체적 이미지를 즐기도록 했다(<클로버필드>). 난민과 관련하여 현실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스펙터클에 파묻힌 현재, 유럽영화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 갈림길 위에 <더 스퀘어>와 <주피터스 문>이 서 있다.

<주피터스 문>

난민이 처한 어려움,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당연한 외침이 점차 마모되어가는 상황에서 <더 스퀘어>는 시점을 역전시켜 영화와 현실의 거리를 단번에 좁혔다. 관찰자 또는 방관자 입장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상품을 구매해왔던 관객에게 이것이 당신의 문제임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주피터스 문>은 반대로 가상의 세계를 제공해 거리를 더 늘려버린 뒤 결정적인 이미지를 직선으로 제공한다. 유럽인을 움직였던 몇장의 이미지, 이성이 아닌 감성을 뒤흔들었던 사진들처럼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종교적 판화들을 뇌리에 박아넣는 것이다. 아리안이 깊은 물속에 잠긴 듯 허공을 부유하는 이미지, 건물에서 천천히 뛰어내리며 저마다의 일상을 훑고 지나가는 이미지는 난민, 차별, 증오, 공포라는 추상을 도리어 구체화한다. 보편타당의 영역에서 은유의 언어를 활용하는 신화와 전설이야말로 때로는 진실에 접속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통로가 된다.

9·11 이후 미국영화가 억압된 상상력을 펼치고 장르로 소화시키는 데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현재진행형인 난민 문제를 두고 영화가 이를 어떻게 수용할지 벌써 예단하는 건 섣부른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문제를 직시하고 그에 대한 화답을 하려고 발버둥치는 유럽영화들의 태도는 영화의 역할과 한계, 그리고 가능성에 대해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물론 “당신이 괴물의 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 또한 당신을 바라본다”는 니체의 경고처럼 괴물이 되어버린 영화들도 있다. 그럼에도 국가라는 폭력의 심연을 바라보는 작업을 멈춰선 안 된다. 끊임없이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으로 나아가려는 집단을 제어할 유일한 가능성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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