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란 무엇인가?” 1998년 9월 18일,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는 창립선언문에서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이 난처하고 진부한 질문을 다시 시작하는 건 시대에 따라 독립영화의 겉모습이 변하더라도 그 밑바닥 정신만은 이어지고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급변하는 한국 현대사의 물결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싸워온 1950~60년대생 영화인들을 필두로 1990년대 이르러 사회변혁 운동으로서의 영화가 거센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영화들의 생존 방식, 발전적 대안 모색을 위해선 근거지가 필요했다. 세기 말, 그렇게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한독협이 탄생했다. 독립영화 정신을 사수하려는 수많은 개인과 단체가 속한 한독협은, 운영 체계를 세분화해 극영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비평, 배급 등으로 분과를 구분함으로써 다양한 포지션의 영화인들이 뜻을 도모할 수 있게 했다.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독립영화 배급지원센터와 인디스페이스 운영을 비롯해 독립영화계 이슈 형성 및 정책 제언 활동 등으로 한국 독립영화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단체일 한독협. 스무살의 그들은 지금 무엇을 반추하고 무엇을 꿈꾸는지, 그리고 여전히 무엇을 믿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우선 세분이 독립영화 진영에 발을 들이게 된 각자의 계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국에서 독립영화의 뿌리가 단단해지던 시기를 지켜봤다.
=고영재_ 아직 한독협이 없던 시절, 문화학교 서울에서 영화를 배우고 토론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상업영화가 아닌, 오로지 독립영화를 위해 영화계로 들어왔다. 문화학교 서울의 영화 제작 워크숍 담당이었던 이상인 감독(독립영화사 ‘청년’의 주요 멤버였고 사회파 단편영화들로 90년대 초·중반 유명세를 얻었다. <질주>(1999)를 감독했다.-편집자)의 권유를 받아서, 당시 그가 일하고 있던 용인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늦게 영화학교에 들어가서 편집, 믹싱, 동시녹음까지 영화의 여러 분야를 섭렵해봤는데, 너무 재밌더라. 동기였던 정윤철 감독 소개로 송일곤 감독의 단편에 참여하면서 알음알음 영화계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게 됐다. 인디포럼에서 기술 세미나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강연 부탁을 받게 된 계기였다. 그때 나를 잘 아는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내 별명이 ‘스페셜 땡스 투’였다. 영화한다더니 정작 자기 작품은 하나도 없고, 독립영화 여러 편의 크레딧마다 ‘고마운 사람들’에 올라가 있으니 우스웠던 거겠지. (웃음) 그래도 나름대로 장비 보유나 기술 면에서는 선수급이었다.
=김동현_ 강릉씨네마떼끄 통해 독립영화 활동에 발을 들였다. 90년대 중반에 서울에 문화학교 서울이 생김과 동시에 타 지역에도 속속 시네마테크가 들어섰다. 문화학교 서울과 비슷한 포맷으로 상영회를 열기도 하는 등 활발한 네트워킹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조영각 전 서독제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내가 독립영화 활동을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이때 여럿 만났다.
=이지연_ 2000년에 당시 구독하던 <씨네21> 구인란에서 퀴어 아카이브 정기상영회 자원활동가를 모집한다고 해서 지원서를 냈다. 처음 제대로 만나는 독립영화 앞에서 많이 놀고, 또 많이 배운 시기였다. 2001년에는 서독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스탭으로 활동했다.
독립영화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가던 시기
-1998년 한독협 창설 이후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은.
고영재_ 한번은 서울국제노동영화제를 보러 갔는데 영화제 프로젝터 상태가 너무 후진 거다. (웃음) 영화제측에 내가 꼭 장비를 협찬받아오겠다고 약속하고는, 당시 1억원을 호가했던 프로젝터를 얻어가서 교체해준 적도 있다. 그런 사건들을 통해 한독협 초대 대표인 김동원 감독(2003년까지 이사장직을 맡았다.-편집자)과 조영각 사무국장이 영상미디어센터 설립준비팀에 함께해주길 원하셨다. 2000년부터 준비하기 시작해서, 2001년엔 광화문 일민미술관 화장실 옆 조그만 창고에서 마무리 준비를 했고, 2002년에 미디액트가 개관하게 되었다. 미디액트의 주체였던 한독협과 계속해서 논의하고 관계를 맺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한독협과의 인연을 키워나갔다. 이후에 중앙운영위원을 겸하게 됐지. 올해로 17년 됐다.
김동현_ 1998년 한독협이 창립할 때는 단체회원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 지역 최초의 독립영화제라 할 수 있는 정동진독립영화제를 한독협에서 기획했다. 한독협과 강릉씨네마떼끄가 공동으로 주최한 영화제였기에 프로그램 구성이나 홍보 등은 한독협이, 공간 섭외와 지역 관객 조직은 강릉씨네마떼끄가 맡는 식으로 업무를 분담했다. 단체회원일 뿐 아니라 일도 같이 하는 관계가 형성되었던 거다. 2006년에 조영각 선배가 서독제 업무를 함께해보자고 제안해 서독제 프로그램팀장으로 결합했다. 엄밀하게는 그때부터 한독협 실무자 중 하나가 된 셈이다. 지난해부터는 새로운 집행위원장이 되어 서독제를 위해 일하고 있다. 20주년을 기념해 지난 시간을 세보니 나도 이제는 12년 정도가 되었더라.
이지연_ 다들 정말 오래되셨다. (웃음) 나는 2002년에 한독협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초기에는 한독협이 발행하는 비평지 계간 <독립영화>의 편집기자로 활동하다가 2007년부터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한독협은 감독과 제작자, 비평가 등 독립영화 신에 참여하는 여러 포지션의 영화인들의 활동 방안을 모색하고 네트워킹을 다지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독립영화 제작·배급의 대안을 찾고, 정부의 정책 수립 과정에 대표적 역할을 하는 등 지난 20년간 독립영화계의 상징적 이름으로 남았다. 협회 내부의 실무자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주요 성과를 돌이켜본다면.
고영재_ 한마디로 묶어서 말한다면, 한국 독립영화계의 숙원 사업을 자임해온 것이 아닐까. 자임한다는 건 양날의 검과 같다. 능력 없는 이가 자임을 하면 만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것이고, 주어진 상황과 행동의 주체가 적절하면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우선은 스크린쿼터만 해도 그렇다. 일반 시민들은 유명한 배우나 감독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내게는 당시 오정훈 감독(현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장.-편집자)이 삭발하는 모습 같은 게 불쑥 그려진다. 표현의 자유를 두고 실천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벌여온 것이 한국영화계 내에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독협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영화계 내에서 연출가, 제작자, 프로듀서 등 여러 포지션에 있는 창작자들이 함께 활동하다 보면 동료의식만큼 태생적으로 경쟁의식도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임하겠다고 나서면 의도치 않게 자리 싸움처럼 비칠 염려도 있다. 그러나 한독협은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연대해왔다. 이마리오 감독(올해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댓글 공작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더 블랙>을 발표했다.-편집자)처럼 배급협동조합을 꿈꿨던 사람도 있었고, 내 경우는 한독협이 주도했던 한미FTA실천단 단장으로 일했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필요성에 응답하기 위한 한독협의 노력이 영상미디어센터다. 남 탓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나서서 한 것. 그게 한독협의 색깔이고 연대의식이라고 본다.
김동현_ 서독제의 가시적인 성과 중 대표적인 세 가지를 꼽자면, 서독제, 미디액트, 독립영화전용관이 될 것이다. 각각 영화제, 창작지원, 상시적인 독립영화 상영 면에서 한독협 활동의 중심을 이뤘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말하는 건 지나치게 정답만 말하는 것 같으니,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 너무 오래전에 시작된 일이라 요즘 잘 거론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한독협의 정기상영회 프로그램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활동이다. 상영의 기회 면에서 독립영화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것이 필요한데, 이때 핵심은 정기적으로 상영함으로써 영화제의 단발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또 하나,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시작한 것도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독협 창립 당시만 해도 독립영화는 요즘 말로는 굉장히 힙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 말은, 다른 한편으로 지극히 소수라는 것, 사회운동으로서의 독립영화로 시작했기에 굉장히 정치적이라는 일종의 편견도 있었다는 말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편안한 독립영화라는 인식이 아예 없던 때다. 그런 의미에서 관광지인 정동진에서 영화제를 열자는 발상은, 서울을 넘어선 타 지역으로의 관객 확장을 시도하고 독립영화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자는 의지가 뚜렷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2009년 전과 후 무엇이 달라졌나
-2009년 MB 정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표적 감사를 시작하면서 독립영화계는 각종 외압을 겪어야만 했다. 지금은 폐지된 영화진흥위원회 직영 독립영화전용관인 인디플러스에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담은 <Jam Docu 강정>(2011)을 상영하려고 했다가 제지받은 사건을 상징적인 예로 들고 싶다. 한독협은 <Jam Docu 강정> 제작진을 ‘2011 올해의 독립영화인’으로 선정했다.
이지연_ 한독협의 연혁을 정리해보자면, 2009년을 기점으로 전과 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겠다. 아까 김동현 집행위원장님도 거론하신 한독협의 대표적인 가시적 성과들, 서독제와 미디액트, 그리고 독립영화전용관처럼 한독협이 늘 꿈꾸던 것들을 현실화한 사건들은 대체로 초기 10년 동안의 일이다. 이 일들을 기폭제 삼아, 독립영화 활성화를 위해 준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시작해야 할 타이밍에 마침 정권의 탄압 등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부침을 겪어야만 했다. 감사 이후 한독협이 그동안 이룬 성과를 부정받다시피 했다. 그러다보니 최근 10년 동안엔 가시적으로 뚜렷하게 말할 성과란 것이 없는 것은 아닌지, 내부자로서 더욱 엄격하게 자평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 10년간 와해되지 않고 한독협의 가치를 지키며 존재해온 것 또한 커다란 노력이었다. 달리 말해 인디스페이스, 미디액트 등이 지금까지 현존하는 것 역시 독립영화인들이 열심히 지켜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 몇년간 한독협은 지속적으로 사회적 목소리와 결합하고, 정책에 관한 제언 활동 역시 꾸준히 했다(밀양 송전탑 규탄 활동, 세월호 영화인 활동, 부산국제영화제 비대위 등.-편집자).
김동현_ 서독제 또한 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공고히 운영되고 있다. 공적 지원금이 끊겨 규모적으로 조금 주춤한 적은 있었으나, 서독제는 해마다 그해의 독립영화를 종합하면서 독립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왔다고 느낀다. 운영진이 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창작자들의 목소리가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한독협을 중심으로 네트워킹이 꾸준히 이뤄져왔기에 가능한 성과라고 본다. 사실 한독협이 처음 생길 때만 해도 장편 독립영화는 거의 보기 드물었다. 단편 중심의 독립영화에서 벗어나 장편 독립영화의 활성화를 꾀하는 것이 서독제의 뚜렷한 목적이었다. 오늘날에 독립영화라고 하면 적어도 극장에서 보는 장편영화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나. 암울한 시기를 지나오면서도 독립영화의 맥을 잇고 확장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본다.
-정권 교체 이후 올해까지 약 2년간, 한독협 차원에서 느끼는 정상화 과정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고영재_ 거의 10년간 빼앗겼던 것들을 갑자기 다시 돌려받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상화되기는 어렵다. 쫓겨났던 놀이터에 갑자기 다시 입성한 어린아이의 상태 같은데, 아직 몸이 굳어 있는 것 같다. 과거의 활동과 영광만을 요구하는 기억의 오류도 있는 것 같다. 과거를 모델로 지금을 그려낼 생각은 없다. 과거보다 더 나아지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새롭게 준비하고 대화할 단계다. 지금 그 단계가 막히고 있다는 답답함도 조금은 있다. 우리는 과거의 내가 아니고, 독립영화의 환경도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산업적 관점에서 독립영화를 논할 수도 있고, 독립영화 커뮤니티의 활성화와 협동심을 중점에 둘 수도 있을 것이다. 후자에 기반해 독립영화판의 정신과 기운이 점점 사라지고, 계약에 기반해 일적으로 맺어진 관계에 회의감을 느낀다는 목소리도 나올 수 있다. 상영 이슈로 넘어가면, 막연히 독립영화를 무조건 많이 튼다고 좋은 게 아니라 어떤 독립영화를 선정해 어떻게 배급에 힘쓸 것인지 작품의 선별에 고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껏 축적해온 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독협 내외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정보 공유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지난한 작업이기에 한해 한해 차근차근 논의해보고 싶은데, 정상화 과정에서 가시적이고 획기적인 아이템만을 기대하는 일각의 태도는 걱정스럽다.
-한독협을 중심으로 집약체를 이루던 과거의 독립영화계에 비해 창작자들의 성향 면에서 훨씬 개인적인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고영재_ 미학적 논쟁, 영화 윤리와 태도의 문제, 대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문제, 제작자 및 프로듀서와의 관계 등 지금의 독립영화는 환경과 가치관에 있어서 무수한 사례로 나뉘고 있다. 한독협 회원이든 아니든, 모든 구성원들을 위해 복합적인 논의가 필요함이 당연하다. 자연스러운 현상을 거스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지나치게 개별 사례나 이론적 방향성에 매몰되어 무언가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서로간의 접점 형성이 힘들어질 수 있는 지점은 경계하고 싶다. 즉 한독협의 역할은 이들이 각자의 방향성을 이해해갈 수 있는 장을 마련해서, 2018~19년의 독립영화 환경이 어떤 지점을 관통하고 있는지 꿰어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서독제에서 열릴 20주년 기념 포럼이 좋은 예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독립영화 실태조사를 이제라도 시작하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지금까지 소홀했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데이터를 쌓는 데 보다 힘써야 할 때가 왔다. 성과를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모델링하는 작업이 한동안 끊겼다. 과거엔 미디어센터와 독립영화전용관을 함께 만드는 연구보고서를 내부적으로 만들고 그랬다. 우리가 이런 것도 했다고? (일동 웃음) 약 16~17년 전 이야기다. 집에서 한번 들춰보았는데 새삼 놀랍더라. 과거에 잘했으니 그때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고, 자발적이고 집중적으로 사안을 파고드는 저력이 지금 이 시점에도 강하게 필요하다고 느낀다.
김동현_ 바깥과의 싸움만큼 우리 안의 싸움도 중요한 시기다. 정권이 바뀌어도 독립영화에 대한 정책 등이 가시적으로 크게 개선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생태계가 더 넓고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더 자유로운 활동으로서의 독립영화 혹은 상업영화로 나아가기 전의 독립영화 등 독립영화에 대한 의미가 각자에게 많이 달라졌다. 모두 포용해야 한다. 일부이지만 시장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립영화도 늘었다. 산업적 지향이 강한 독립영화인들의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 한독협 역시 독립영화가 산업적인 기능을 어느 정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반긴다. 더 나아가, 이를테면 스마트폰으로 짧은 영화를 만드는 활동을 통해 독립영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더 구체적으로 접하고 읽을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을 대변하는 문화적인 방향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협회 단체가 아니라도 그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중요한 정책적 의제를 이끌고 참여하는 주체가 꼭 한독협일 필요 없이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한독협은 가능한 한 더 영화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들을 다져나가기 위해 중심을 잡으려 한다. 새삼 어렵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고 그저 앞으로 해나가야 할 과제 같은 것들이 아닐까.
이지연_ 동감한다. 지금 영화진흥위원회나 정부 정책에 제언을 한다는 것은 우리 활동에 있어 일종의 기본값일 뿐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문제제기는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독립영화의 자장 아래 있는 각자의 이상향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을 특히 요즘 체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각자가 현재 시점에 바라보는 한독협, 그리고 독립영화가 무엇이며 어떤 상태인지 논의하는 장이 사실 지금까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대표자 성격으로 호명되어 어떤 자리에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터놓고 논의가 필요하다는 건 사회 전체의 분위기와 맞물린 것이기도 하다. 성평등에 대한 목소리가 열렬히 터져나오는 것처럼, 비단 독립영화계뿐 아니라 관습의 미명 아래 묵과되던 것들이 하나둘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시대다.
세대간 소통을 고민하기
-한독협과 함께 보낸 지난 시간들은 세분에게 무엇을 가져다줬나. 그리고 지금까지 협회 곁을 지켜온 동력은 무엇이었나.
고영재_ 표현의 자유가 상식이 된 시대. 그러나 성평등이나 난민 문제처럼 모순점도 첨예한 시대. 여전히 비틀어보고 싶고 질문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심플하게 말하면, 지금까지 참 재미있었고, 아직까지도 재미있어서 이 일을 한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겨우겨우 버틴 적은 없다. 좋아서 해왔다. 언젠가 때려치운다면, 정말 지쳤거나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일 거다.
김동현_ 비슷하다. 독립영화가 여전히 너무 재밌다. <낮은 목소리>(1995), <파업전야>(1999) 같은 작품들을 보며 독립영화계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운명적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초창기 독립영화들을 여러 공동체 상영회를 통해 접하면서, 영화인으로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고 스스로의 태도를 질문하게 되었다. 영화는 그저 극장에서 트는 재미있는 무언가인 줄로만 알았던, 스펙터클한 영화만 알았던 내가 사실은 매우 닫힌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그때 깨닫게 된 거다. 인권영화제나 노동영화제를 통해 국제적인 연대의식도 키울 수 있었다. 서독제에는 매년 1천편 이상의 작품이 출품되는데, 잘 만들었든 못 만들었든 영화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는 순간 또한 더없이 기쁘다. 인디펜던트한 정신의 가치와 비전을 꿈꾸면서 일하고 있다.
이지연_ 사무국에 상근하는 입장이다보니 협회가 어려운 시기에는 버틴다는 심정이 들 때도 있었다. 나야말로 20대 초반부터 한독협 활동을 하면서 사회와 역사를 독립영화를 통해 배웠다.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의 즐거움이 지금까지의 시간을 채웠다. 이제는 그만큼 책임과 부담도 늘었다. 그 가운데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껏 즐겁게 버틸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한독협의 10~20년을 책임질 새로운 즐거움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한독협 사무국장으로서 내 활동의 골자가 되는 질문이리라 생각된다.
고영재_ 이지연 사무국장은 상근직으로 사무국을 지키며 매일 일하고 있기 때문에, 가끔은 때려치우고 싶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독립영화인의 정체성과는 별개로 직장인의 비애 같은 것이니까. 이사장직인 내가 섬세히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인디플러그를 대하는 내 마음이 사무국장님과 비슷하다. (일동 웃음)
-마지막으로 20주년을 맞아 인간관계로서 세분의 스토리도 궁금하다. 영광과 고난을 함께하며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를 잘 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지연_ 이런 얘긴 서로 안 해봐서…. (웃음)
김동현_ 고영재 대표님은 첫인상은 참 좋았다. 샤프하고 스마트하실 것만 같더라. 이렇게 뜨거운 분이실 줄은 몰랐다. (웃음) 두분은 힘든 시기에 죽도록 같이 고생했던 동지 같은 느낌이다. 대표의 뜨거운 열정 덕에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고영재_ 개인적으로는 관계가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사장직을 처음 맡을 때, 조급한 상황들을 처리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시야가 많이 넓어진 것 같다. 어떤 일에 대해 대화하고 서로 의논한다는 것이 조직 및 인간관계에서 중요하다는 걸 알겠다. 우리 세대의 문제이기도 한데, 자기만족적으로 일해온 경향도 있지 않나 반성해본다. 나를 되돌아보면, 내 감정이나 계획을 중심에 두고 일이 잘 처리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사무총장을 그만두고 이사장으로 취임하기까지 몇년의 공백기 동안 협회 인력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됐다.
이지연_ 처음 합류했을 땐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였고, 한독협이 새로 맞이하는 부침과 변화들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편이었다. 지금 두분 말씀하시는 것 듣다보니까 당시에 나 때문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웃음)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그 긴 시간을 지금까지 쭉 겪어오면서, 이제는 한독협과 독립영화의 문제뿐 아니라 내 개인적인 것까지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고 느낀다. 앞으로의 비전까지 새롭게 구상해나갈 수 있겠다는 단단한 믿음이 생겼다.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2002년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의 창립 멤버. 2003년에 한독협 중앙운영위원으로 합류, 2007년에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2015년에 한독협 이사장으로 부임했다. <우리학교>(2006), <워낭소리>(2008) 등을 제작했고, 영화사 인디플러그의 대표로 일하며 독립영화 제작 및 배급에 힘쓰고 있다.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2006년 서독제 프로그램팀장으로 합류해 사무국장, 부집행위원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15년간 활동한 조영각 전 집행위원장을 이어 2017년부터 서독제의 3대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지연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2002년 한독협에 합류해 협회 비평지인 계간 <독립영화>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2007년 고영재 사무총장과 함께 사무국장의 직함을 달고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