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로마>는 잠시 등장하는 영어 대사를 번역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 내내 등장하는 스페인어, 멕시코 원주민어를 구분한 자막만이 등장한다. “<그래비티>(2013)를 마무리한 후 다음 영화는 좀더 단순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수년간 쌓인 자원, 도구, 테크닉 등이 있으니 드디어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 모국어로 영화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라는 알폰소 쿠아론이 택한 영화의 재료는 1970년대 초 멕시코의 한 도시, 로마에서 살던 당시 3년간의 기억이었다. 다만 주인공은 감독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가 아닌, 백인 중산층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의 가족과 함께 사는 하녀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다. 빨래를 널고 개똥을 치우고 음식을 만드는 일상노동이 묘사되는 가운데, 당시 멕시코에서 있었던 ‘성체축일 대학살’, 체 게바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던 과정에서 우익무장단체 로스 알코네스가 시민 120명을 살해한 참극 역시 클레오의 눈으로 그려진다. 클레오에 해당하는 실제 인물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초연될 때 함께 <로마>를 감상했다고 한다.
“영화라는 매체로 전달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작품이었다”고까지 표현한 <로마>를 유통시킬 플랫폼으로 쿠아론이 넷플릭스를 선택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다. 더군다나 <로마>는 65mm 필름 흑백 촬영, 최첨단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로 제작해 이를 최적으로 구현할 극장 경험이 중요하다. 영화를 제작한 데이비드 린드 프로듀서는 <인디와이어>와 인터뷰에서 “영어가 아닌 외국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시장은 매우 복잡하다. 우리는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면서 가능한 한 많은 관객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세계 각국에서 <로마>를 어떻게 상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넷플릭스의 프레젠테이션이 매우 설득력 있었다”고 언급했다. 감독이 요구하는 상영 조건이 갖춰진 극장에서만 제한 개봉한 후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하겠다는 플랫폼의 제안은 이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충족시켰다.
멕시코에 의한, 멕시코에 대한 영화
알폰소 쿠아론은 <로마>의 각본, 감독, 촬영, 제작, 편집을 모두 직접 맡았다. 그와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를 제외한 모든 장편을 함께한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이 사정상 함께하지 못하게 되자, “다른 영어권 촬영감독은 이 프로젝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라며 직접 카메라까지 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탭 각자가 자신의 지식과 기억을 모아 작품에 기여할 수 있게끔 촬영팀 전원을 멕시코 출신으로 구성했다. 영화의 주 무대인 소피아의 저택은 아예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어린 시절 추억의 복제를 의도했다.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2006)로 오스카 미술상을 수상한 유제니오 카발레로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멕시코에 대한,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내 유년 시절에 관한 영화를 작업하는 것은 굉장히 신나는 일이었다. 실제 사건들이 일어났던 장소에서 대부분 촬영했는데 사용한 거의 모든 로케이션을 탈바꿈시켜야 했다”고 전한다. 영화에서 관객이 보게 될 집은 감독의 기억과 가장 닮은 주택을 찾아 그 안에 세트를 지은 것이다. 그 안의 소품은 감독이 직접 마련했다. “실제 우리 가족의 물건으로 방을 채웠다. 할머니 집에 있던 오래된 의자는 물론 다이닝룸과 아침을 먹던 공간, 응접실까지 원래 집에 있던 가구를 많이 채워넣었다. 극중 소피아의 초상화로 나오는 그림은 사실 우리 어머니의 초상화다. 아이들 방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은 실제로 사용하던 것 혹은 영화를 위해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보라스라는 반려견은 가족이 기르던 강아지와 종은 물론 이름까지 똑같다.” 무엇보다 성체축일 대학살이 일어났던 멕시코-타쿠바야의 거대한 교차로에서의 촬영은 제작팀에 가장 큰 과제였다. 현재 번화가로 변한 이곳의 풍경을 1970년대로 되돌리기 위해 수개월간 현지 관계자들과 일정을 조율했고, 자전거 도로와 차선, 전신주 등을 없애고 엑스트라를 동원해 당시 시위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구점은 촬영을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한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오래된 가족사진은 의상감독의 가장 직접적인 레퍼런스가 됐다. 감독은 당시 기억을 정확히 구현하기 위해 주요 배우는 물론 엑스트라들의 의상 피팅까지 참여했다.
연기가 처음인 배우들의 자연스러움
주인공 클레오를 연기한 얄리트사 아파리시오는 연기 경험이 없던 신인배우다. 제작진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50년도 넘게 알고 지낸 실제 인물과 가장 흡사한 배우를 찾기 위해 무려 수천명의 지원자를 만났고, 멕시코 와하카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적임자를 발견했다. 리얼한 연기 호흡을 위해 실제 얄리트사 아파리시오와 가장 친한 친구인 낸시 가르시아를 함께 캐스팅해 극중 클레오의 친구 아델라를 연기하게 했다. 연기를 처음 하는 배우들에게 진짜 같은 느낌을 얻어내기 위해 배우는 물론 스탭들도 시나리오 전체를 보지 못했다. 오직 알폰소 쿠아론 감독만이 전체 그림을 인지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대사는 촬영 당일 아침에 알려준 후 배우들이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사전 리허설을 거치는 장면이라는 개념을 뒤집고 싶었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비티>에 이어 사운드 믹싱과 편집에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을 다시 도입한 알폰소 쿠아론은 “애트모스가 소규모의 개인적인 영화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비주얼로 우리는 전경, 중경, 후경을 보게 된다. 사운드 측면에서도 이런 레이어들을 만들고 싶었다”고 전한다. “서로 다른 노점상들이 소리를 치며 호객하는 소리, 휘파람이나 플루트, 벨 소리 등이 있다. 도로에서도 차마다 내는 소리가 다 다르다. 카메라가 움직일 때 사운드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야 한다.” 이렇게 디테일한 음악을 포착한 결과, 믹싱을 끝낸 후 돌비 애트모스측에 보낸 파일의 크기는 기존의 6배 정도였다고 한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정치적이다
<로마>는 클레오의 임신과 남자친구와의 파국, 소피아의 이혼으로 이어지는 개인사가 멕시코의 중요한 격변기와 진폭을 같이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이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고, 엄마로서, 보모로서 아이를 키우는 두 여성이 남성과 결별한 후 극적인 순간 시스터후드를 완성하는 그림은 자연스레 현대사회의 중요한 화두와도 이어진다. 할리우드가 아닌 자신의 사적 기억이 잔재한 공간에서, 철저하게 개인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가 감독의 어떤 작품보다 정치적인 함의를 갖게 됐다. <로마>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의 위치를 대폭 승격시켰다는 수긍 가능한 평가는 단지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이라는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넷플릭스가 가진 가장 긍정적인 특성, 창작의 자유를 보장한 콘텐츠가 전세계 어디에나 공평하게 도달한다는 점과 가장 이롭게 공명했다는 점에서 <로마>는 이 새로운 거대 기업이 앞으로도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확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