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영화감독 제이크 한나포드(존 휴스턴)가 자신의 마지막 복귀작인 <바람의 저편>을 완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시기에 마침 그의 70살 생일 파티가 열린다. 수년간 유럽에서 휴식기를 가지던 제이크는 할리우드에서 성대한 은퇴작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지만, 70년대 할리우드는 이미 빠르게 변화 중이다. 열광적인 팬들과 시시각각 검열의 시선을 던져오는 평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제이크는 술에 취해 점점 정신을 잃어간다. 영화 바깥의 오슨 웰스처럼 제이크 또한 예산 문제로 예민해져 있다. 게다가 갑자기 주연배우가 사라진다. 그는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멋대로 헛소리를 늘어놓거나 유망한 후계자로 평가받는 젊은 감독 브룩스(피터 보그다노비치)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영화계의 헤밍웨이라 불리는 마초적 감독이 자신의 예술성과 나이듦, 그리고 성적 지향에 관해 실은 깊은 자조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가 밝히는 진실이다. 영화명과 동일한 영화 속의 영화 <바람의 저편>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모더니즘적인 아름다움으로 눈부시다. 금발의 폭주적 소년과 인디언 혈통의 여성이 단 한마디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서로를 쫓고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내러티브로 인해 시사실에서 편집본을 살피던 영화사 중역은 “비트 세대의 방황” 운운하며 의미를 찾거나, “혹시 저 여자가 폭탄을 들고 있는 건가요?”라고 애써 희망을 붙잡아보기도 한다.
오슨 웰스는 누구
라디오 방송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핼러윈을 앞둔 1938년의 어느 날, 19세기 영국의 공상과학소설 <우주 전쟁>을 가짜뉴스처럼 퍼뜨렸고, 청취자들은 순간 패닉에 빠진다. 스토리텔러로서 웰스의 모험심과 대담함, 그리고 교정할 수 없는 반골 기질을 엿보게 되는 대목이다. 화면의 전경과 원경 모두 선명하게 담기는 딥 포커스 기법을 남기며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평가받는 <시민 케인>(1941)을 만든 오슨 웰스는 이후에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 <악의 손길>(1958)로 누아르의 정점을, <심야의 종소리>(1965)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능가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천부적인 재능과 야심에도 불구하고 웰스는 제작비를 조달하는 데 매번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찍고 싶은 영화가 머릿속에 너무도 많이 쌓여 있는 나머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투자자를 찾기 위해 악착같이 사교계 파티나 영화제 등에 참석했다고 알려진다.
이런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끼고 미국을 잠시 떠났던 웰스가 1970년에 은퇴작을 목표로 할리우드에 복귀해 찍기 시작한 작품이 <바람의 저편>이다. 웰스의 나이 55살에 시작한 <바람의 저편> 촬영은 1976년까지 약 6년간 끝나지 않았고, 제작비에 맞춰 띄엄띄엄 촬영이 이뤄진 탓에 무기한 연장 중인 거장의 프로젝트에 대해 악명만 높아질 뿐이었다. 결국 영화는 1985년에 웰스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편집 또한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100시간에 달하는 미완성 편집본과 어지러운 메모만을 남기고 잠들었다. <뉴요커>에 따르면, 웰스는 죽기 전날까지도 “전화가 오네. 머니 콜(Money Call)일 테니 꼭 받아야겠어”라고 영화 제작에 강박적인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지하실의 더러운 필름, 넷플릭스가 꺼냈다
오슨 웰스가 남긴, 이토록 매혹적이고 영화적인 과업을 달성하고자 선뜻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방대한 분량에 걸맞은 예산을 감당할 스튜디오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리고 지난해인 2017년 3월 14일, 넷플릭스가 <바람의 저편>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책임자는 <제이슨 본>(2016),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2018) 등 최근까지 활발히 활동 중인 원로 프로듀서 프랭크 마셜.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인디아나 존스>(1984), <구니스>(1985), <백 투 더 퓨처>(1985) 등을 기획한 그는 <바람의 저편>의 최초 촬영 당시 프로덕션 매니저였고, 웰스의 가까운 동료인 피터 보그다노비치(<마지막 영화관>(1971), <페이퍼 문>(1973) 등의 감독이자 오슨 웰스 영화의 배우로 활약했다. 제2의 오슨 웰스로 이미지 메이킹했다)의 영화들로 초기 커리어를 시작한 인물이다. 여기에 폴란드의 작가 겸 감독 필립 잔 림스자가 합류해 오슨 웰스 사후 33년 만에 영화 재편집이 이루어졌다. 파리의 지하 창고에 방치된 무려 1천개의 릴에 달하는 필름들이 그렇게 세상 위로 떠올랐다.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오슨 웰스는 혹시 자신이 죽으면 내게 <바람의 저편>의 완성을 대신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힌 적 있기에, 제작진은 그에게 충실한 자문을 구했다. 넷플릭스는 11월 2일에 <바람의 저편>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개시함과 동시에 38분짜리 다큐멘터리 <40년 만의 파이널 컷: ‘바람의 저편’ 특별 메이킹 영상>과 웰스의 말년을 담은 전기다큐멘터리 <오슨 웰스의 마지막 로즈버드>도 함께 소개했다. 만약 <바람의 저편>이 오슨 웰스라는 유명하지만 먼 이름을 접하는 첫 창구라면, 이들 다큐멘터리를 이정표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바람의 저편>은 비로소 편집실에서 완성되었다
<바람의 저편>은 현대의 리얼리티 쇼나 페이크 다큐, 관찰 다큐멘터리 형식에 관한 웰스의 선구안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자동차 추락사고로 사망한 제이크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약 하루 동안 벌어지는 신기루 같은 광경을 모자이크처럼 이어붙인다. 제이크가 찍고 있는 영화 속의 영화, 제이크 추종자들이 그를 관찰하는 카메라, 그리고 여타 수많은 카메라 속에 담긴 다각도의 이미지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의 실제를 포착하는 프레임 바깥의 풍경들…. <바람의 저편>은 웰스가 스스로 한계를 실험하듯 몇겹의 프레임을 넘나들고, 덫대고, 분해하는 혼란스러운 과정이다. 제이크의 생일파티는 자기 자신이 아닌, 초청된 타자들의 푸티지를 통해 완성된다. 서로 다른 렌즈에 담긴 이미지와 분절된 시공간이 마치 하나의 자연스러운 몽타주처럼 접합을 이루는 대담한 형식. 웰스의 메모를 분석하고 상상하는 막중한 임무는 편집감독 밥 머로스키에게 돌아갔다. 그는 “대단히 두려운” 과정이었다고 회고한다(<버라이어티>). 어마어마한 촬영본 분량에도 불구하고 최종 편집본을 2시간2분으로 줄인 것이 의외인데, 이는 스스로 매우 간결한 영화를 만든다고 자부했던 웰스의 철학을 되새긴 결과다. 미국 영화잡지 <무비 메이커>에서 편집감독은 웰스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남긴 “그 작자가 영화를 두 시간 이내로 줄이면 보러 가겠다”는 유명한 말을 언급하며 “대서사시처럼 느껴지는 <시민 케인>조차 채 120분이 되지 않는다. <바람의 저편> 역시 2시간 미만이 되길 웰스 또한 강력히 원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오슨 웰스는 끝내 자신이 창조한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의 운명을 그대로 따랐다. <시민 케인>의 케인은 부귀영화로도 피하지 못한 죽음 앞에서 ‘로즈버드’라는 단어 하나를 남긴 채 숨을 거둔다. 영화는 이 로즈버드라는 이름의 진실 게임에 동참해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이 무엇인지 탐구해나간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의 진짜 죽음 뒤에 <바람의 저편>이라는 미완성의 영화를 남김으로써 현실에서도 로즈버드 신화를 이어가려 한다. 촬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잔인하고 방대한 자기반성이 공개되었다는 사실은 마치 농담처럼 들린다. 독립적인 영화 세계와 제작 방식을 고수하는 어려움, 70년대의 실험적인 미국영화들이 뿜어낸 위협적인 활기, 그리고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기려는 할리우드에서 자괴감을 느끼는 늙은 영화감독의 이야기는 현대 관객에게도 영화의 지속을 상기시킨다. 영화란 무엇인가 새삼스럽고 무모한 질문을 꺼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때도 지금도 영화는 여전히 사방에 있다. 어떤 소란스러운 죽음 이후에도 영화는 계속 흐른다. 그리고 모두들 영화와 영화만들기에 관해 아직까지 질문을 거듭 중이다. 그러니 설혹 <바람의 저편>이 2시간의 곱절이 되었더라도, 오슨 웰스의 질문을 기억하는 관객은 언제든 기꺼이 매혹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