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코언 형제의 18번째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가 11월 16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배급되는 코언 형제의 첫 작품이자, 35년의 활동 기간 중 처음으로 디지털로 촬영했으며 여태 만든 작품 중 러닝타임이 가장 길다. TV시리즈로 계획했다가 장편영화로 방향을 바꾼 작품이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코언 형제는 최초에 쓴 영화 시나리오 그대로 촬영했고 TV시리즈로 의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루머를 바로잡았다. 넷플릭스와의 기념비적 만남에 관한 <인디와이어>의 집요한 질문에 “애초에 할리우드 영화사에는 시나리오를 보여줄 계획도 없었다. 자금을 대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는 에단 코언의 대답은 자못 상징적이다. 조엘 코언은 “마블 영화나 대형 프랜차이즈 액션영화처럼 요즘 영화사들의 주요 업무가 아닌 작품”, 즉 수익성이 모호한 <카우보이의 노래>와 같은 작품에도 “투자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가능성”을 가장 중요한 경험으로 언급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시네마의 완성을 위한 노력들, 이미지와 사운드의 디테일을 큰 스크린으로 확인하는 것은 텔레비전의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확신한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넷플릭스 스트리밍 영화 중 지극히 소수만이 누리는 극장 병행 상영의 기회를 누렸다. 지금으로서는 북미에서 제한적으로 극장 상영을 실시한 것이 넷플릭스와 코언 형제가 내린 최선의 타협점이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어떤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6개의 단편을 엮은 선집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것 같은 영화다. 감독들은 각각의 단편을 지난 25년간 하나로 묶으려는 목적 없이 천천히 그리고 개별적으로 써내려갔다. 서랍에 넣어둔 짧은 이야기들이 19세기 말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공통의 테마를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형제가 자각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이다(<할리우드 리포터>). 앤솔러지 형식을 계획한 후 본격적으로 단편들을 소급하는 과정에서 우선 고심했던 것은 배치였는데, 코언 형제는 이야기가 쓰인 순서, 그러니까 긴 시간 동안 이야기가 스스로 흘러나오고 정렬된 순서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각 단편의 내러티브를 드라마틱하게 응집하려 애쓰지 않는 태도는 <카우보이의 노래>가 더욱 우아하고 기묘하게 빛나도록 만든다. 프레데릭 레밍턴(서부 개척 시대의 화가, 황야의 풍경과 인디언들을 주로 그렸다) 스타일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각 단편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인서트 삼아 영화가 이어지는데, 이 낡은 책의 면면에서 단편과 앤솔러지, 그리고 서부극에 대한 코언 형제의 공고한 취향이 드러난다. 선집의 목차를 훑어보는 요량으로 영화를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1장. <버스터 스크럭스의 발라드>는 노래와 사격 실력에 있어 최고를 자부하는 총잡이(팀 블레이크 넬슨)의 짧은 활약상을 그린다. ‘인간혐오자’라 불리는 말끔한 백색 슈트의 무법자는 죽음 앞에서 기이할 정도로 유희적인 태도를 보인다. 코미디와 뮤지컬 장르, 그리고 자비 없는 폭력이 뒤섞인다.
2장. <알고도네스 근처에서>는 알고도네스 지역 인근의 은행을 털려는 카우보이(제임스 프랭코)의 수난을 담았다. 어리석은 선택과 반복되는 불운이 담긴, 코언 형제 특유의 테마가 두드러지는 단편이다.
3장. <밥줄>의 사지가 없는 장애인 배우(해리 멜링)와 그를 돈벌이로 이용하는 방랑극단의 단장(리암 니슨)은 점점 줄어드는 수입으로 고전한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오지만디아스>, 창세기 속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템페스트>, 그리고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선언에 이르는 장대한 낭독극이 펼쳐진다.
4장. <금빛 협곡>은 의심과 긴장에 지친 관객에게 때맞춰 사탕을 물리는 에피소드다. 찬란한 미지의 초원, 노동요를 흥얼거리며 밤낮으로 금광을 찾아 땅을 파는 늙은 채굴꾼(톰 웨이츠)이 있다. 노숙하며 황금에만 골몰하는 속물적인 인간이지만, 배고픈 와중에 부엉이 둥지의 알을 딱 한개만 집어오는 의외의 양심도 지녔다.
5장. <곤경에 빠진 아가씨>는 광활한 오리건 트레일을 가로지르는 느린 마차의 행렬 속으로 합류한다. 두명의 길잡이에 의지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젊은 여성(조 카잔)은 자꾸만 시끄럽게 짖어대는 애완견 프랭클린 피어스(미국 14대 대통령의 이름) 때문에 난처해진다.
6장. <시체>는 역마차 안에 모인 5명의 사람들이 벌이는 긴 수다를 엿듣는다. 이들은 어떻게 한자리에 모였나, 그리고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코언에 의한, 코언을 위한 서부극
코언 형제는 이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와 <더 브레이브>(2010)에서 서부를 탐험한 적이 있다. 미국 중북부에 위치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데뷔작 <블러드 심플>(1984)에서부터 텍사스를 영화적 고향으로 택했다. 마침 전작 <헤일, 시저!>(2016)에 카우보이 캐릭터가 등장했던 것까지 더하면, 잊을만하면 서부로 돌아오고야 마는 후천적 습성을 지닌 모양새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단편마다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고전 할리우드 서부극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변주해나간다. 이를테면 1장과 3장에서는 자연색이 극대화된 화면을 통해 테크니컬러가 보급된 1930~50년대 서부극의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 팀 블레이크 넬슨이 연기하는 초연한 총잡이는 샘 페킨파 스타일의 급작스럽고 폭발적인 폭력성을, 제임스 프랭코의 카우보이는 세르지오 레오네로 대표되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주인공을 비튼 결과처럼 보인다. 조 카잔에게 석양과 함께 다가오는 급작스러운 작은 로맨스 또한 서부극의 사랑받는 일부다. 이처럼 <카우보이의 노래>는 서부극이 다양한 장르와 이미지를 포섭해온 미국영화의 거대한 신화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코언 형제는 자신의 레퍼런스들을 대단한 무대배경쯤으로 전락시킨다.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 깨끗하게 흰 모자를 쓴 무법자, 먼지 속의 카우보이, 방랑자들, 그리고 역마차까지. 특징적인 웨스턴 장르의 이미지로 쐐기를 박듯 각장을 열고서, 곧바로 삶의 불확실성을 향한 집요하고 치명적인 곡예를 시작하는 식이다. 유일하게 불가피한 것은 내정된 죽음뿐이다. 예측 불가능의 땅인 서부의 황야는, 불확실한 인간의 삶과 도덕, 죽음을 탐구하기 위한 캔버스로서 코언 형제에게 운명적이다.
코언 형제는 무엇을 믿는가
코언 형제는 미리 써둔 단편들로 앤솔러지 필름을 만들기로 결심한 후, 앞선 이야기들을 수렴하고 영화의 문을 닫는 역할로 마지막 6장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좁은 역마차 안, 죽기 전에는 도저히 같은 공간에 모일 일이 없어 보이는 세명의 낯선 승객(사냥꾼, 중산층 부인, 프랑스인)과, 정체가 불분명한 두 남자가 마주보고 있다. 각자의 경험치에 근거한 확신에 찬 대화들로 분쟁을 키워가던 세 사람은 갑자기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아일랜드 남자의 소박한 포크송과 (<시리어스 맨>(2009)과 <더 브레이브>에서 이미 반복한 적 있던) 영국 남자가 들려주는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오싹한 이야기로 순식간에 잠잠해진다. 세 승객을 유심히 지켜보던 남자는 “다 아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매번 어린애처럼 정신을 빼앗긴다”고 미소 짓는다. 세명의 승객은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에야 자신들이 어디에 왔는지 서서히 알아차리게 된다. 주위는 점점 더 어둡고 푸른빛에 잠긴다.
1장의 밝은 빛과 6장의 검은 어둠은 모두 초현실적인 세계로 이어진다. 오프닝과 엔딩의 대구, 이쪽과 저쪽의 경계 안에 갇힌 <카우보이의 노래>는 코언 형제의 영화에서 구원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인간의 성격과 자유의지, 합리적 선택을 향한 도덕적 믿음이 대체로 운명이나 부조리에 의해 무마당하는 광경이 그 사이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카우보이의 노래>는 지금껏 코언 형제의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하게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 집념을 사후세계로까지 이어간다. 미국 온라인 영화 매체 <콜라이더>는 “영화감독으로서 코언 형제가 누구인가의 대답이기보다는 코언 형제가 무엇을 믿는가의 대답으로서 정확한 영화”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코언 형제는 표면적으로 단호한 일관성보다 풍성한 장르적 실험으로 관객을 유인한다. 우리는 기꺼이 다 아는 이야기에 또 한번 의심하고 동요하게 될 것이다.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걸작은 아닐지 몰라도 <카우보이의 노래>는 뜯어볼수록 여유롭고 신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