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는 마당과 침실, 거실, 부엌을 반복적으로 드나들며 하루를 일로 채운다. 알폰소 쿠아론은 패닝과 트래킹 그리고 롱테이크의 화면 속에서 그런 클레오의 행동을 주시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 사소한 일상이 모인 그녀의 하루를, 아니 어쩌면 그녀의 삶(시간) 전체를 본다(또는 보아야 한다). 그녀의 행동에서 어떤 상징이나 은유를 발견하려 애쓰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알폰소 쿠아론에게 클레오의 일상은 또 다른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대상화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물만이 아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 사물, 심지어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러 소음마저도 그 존재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려 한다. 즉 <로마>에서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는 그 어떤 큰 목적 아래 종속된 하위개념이 아니라 시청각적 이미지 각자의 존재성을 주장하고, 그때마다 <로마>는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한마디로 <로마>는 관객을 “순수한 시·지각적 상황”(질 들뢰즈)으로 초대하는 영화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
알폰소 쿠아론이 클레오의 행동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해도, 우리는 그녀에게 플롯의 변곡점이 될 어떤 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 클레오는 주어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하는 인물(고전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인물)이 아니라 특정 사태를 맞닥뜨리면 행동하는 대신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는 인물에 가깝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의 마디마디, 그러니까 지진이 났을 때, 산불이 났을 때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 휩싸일 때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클레오를 보여준다. 거리 시위대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 시작되고 이를 창 너머로 바라보던 클레오 앞에 페르민 패거리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세상 바깥으로 나온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삶 속으로 불쑥 침투하는 불가항력의 힘 앞에서 그녀는 침묵의 머뭇거림으로 일관하고 삶은 더 막연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일상적 노동의 삶과 그 관성을 뚫고 나오는 머뭇거림 속에서도 클레오는 지속적으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로마>를 본 관객이 격찬해 마지않는 바닷가 장면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향해 성큼성큼 내딛던 클레오의 발걸음은 그녀의 하루하루가, 그녀 앞에 들이닥친 불가항력의 상황들이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보이던 머뭇거림이 단순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속하는 삶에 놓인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그렇게 그녀는 무언가가 되어가고, 또 되어갈 것임을 증명한다. 클레오가 관통한 사건(기억)들은 지나간 시간으로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미래로 전진시키는, 그럼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무언가가 되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클레오만이 아니라 그녀와 몸을 포개어 작지만 큰 산을 쌓은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주관과 객관의 이중 인화
알폰소 쿠아론에게 클레오(또는 자신을 길러준 입주 가정부 리보)의 삶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시절을 ‘박제’하는 것과는 다르다(영화 속 부르주아 집안을 채우고 있던 박제품을 상기하라). 박제품에게 변화와 생성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간성은 온전히 시네마의 영역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지속하는 시간을 극단적인 롱테이크에 담아낸다. 그는 ‘시간을 자르고 붙이는’ 편집을 통해 행위의 극적 의미를 생산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로마>의 롱테이크는 차곡차곡 쌓이는 클레오의 시간을 존중하려는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적 태도 그 자체다.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 속 한 인물로 존재함에도 그 소년의 시선을 경유하여 클레오를 바라보지 않는다. 알폰소 쿠아론이 클레오의 삶을 되살리려 할 때, 그 과정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어린 시절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이는 그녀의 삶(또는 그의 삶)을 낭만화할 위험을 수반한다. 하지만 알폰소 쿠아론은 클레오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에도 거리를 두면서 <로마>를 단순한 회고담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마치 주관과 객관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로마>의 카메라 포지셔닝은 인물과 같은 상황에 함께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을 바라본다. 알폰소 쿠아론은 패닝과 트래킹(때로는 틸트)이라는 ‘인간의 신체적 능력’에 기반한 카메라의 움직임 너머로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다. 철저하게 아이레벨의 위치에서 클레오를 따라가는 <로마>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또한 그러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또는 관객)의 영화로 완성되었다. 한마디로 사람들간의 경험의 공유.
삶은 계속된다
알폰소 쿠아론은 자기 가족과 클레오의 위계적 관계에 대해 눈감거나 애써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 거실에 모인 소피아 가족이 TV를 본다. 가족들에게 디저트를 나눠주던 클레오는 그들 틈에 앉아 시선을 TV로 향한다. 클레오만이 유일하게 소파가 아니라 바닥에 앉아 있다 해도, 그들의 모습은 꽤 안정된 가족(또는 공동체)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내 소피아가 클레오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클레오는 그들 속에 더 머물지 못한다. 이처럼 클레오는 가족과 함께 존재하면서도, 그들과 계급적·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소외된 존재다. 소피아는 통화를 엿듣던 아들을 야단치다 이내 감싸안는다(화면의 후경). 화면 전경에 멈춰 선 클레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세상은 클레오에게 기대어 위로받을 수 있는 어깨를 쉬이 내어주지 않는 걸까?
우리는 가혹한 세상을 홀로 버티고 서 있던 그녀가 무엇을 꿈꾸며 견뎌냈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며 단 한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그녀의 마음을 유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침묵과 머뭇거림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파도와 맞서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뿐이다(이 장면에서 지금까지 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던 카메라는 그 반대 방향을 향한다). 어쩌면 그 순간 클레오는 불가항력의 힘으로 몰아붙이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옥상에 오를 때, 카메라는 틸트 업해 하늘을 담는다. 그렇게 그녀는 천국의 계단을 오른다. 영화 초반부, 클레오는 옥상에 누워 “죽어 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한다. 영화 엔딩에서 다시 옥상에 오른 그녀는 다시금 그곳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어쩌면, 삶이 계속되는 것도 참 괜찮은 일이다. <로마> 같은 영화와 함께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