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로마>, 알폰소 쿠아론의 리얼리즘
2019-01-10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세계는 완벽히 계산되어 만들어졌다

<로마>의 첫 장면에서 우리는 파도를 떠올린다. 바닥 청소를 하는 인물이 주기적으로 물을 뿌릴 때마다 화면 위쪽으로 물결이 되돌아가는 움직임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착시를 유도한 사운드는 철저히 디자인됐다. 잠시 후 카메라가 고개를 들면 배수구가 보이고, 그제야 우리는 그 파도가 인물의 행동과 중력이 만난 결과임을 깨닫는다. 사람의 움직임과 자연의 힘이 충돌하고 조응하며 만들어내는 차이와 반복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래비티>(2013)부터 보여준 운동의 본질이기도 하다. 더불어 4분34초의 이 숏에서 물에 비친 하늘은, 이곳이 벽은 있으나 지붕은 없는 안과 밖의 중간지대라는 점을 알린다. 한집에 살지만 가족은 아닌 경계인으로서 외부 계단을 이용하는 주인공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에게 계급이나 거대 시스템(항공기)은 중력만큼이나 거스를 수 없는 환경이다. 그 속에서 그저 살아내는 한 인물과 그녀가 처한 조건이 한 호흡에 담긴다.

이처럼 장면마다 고밀도 농축을 꾀하는 알폰소 쿠아론의 관심은 늘 그랬듯 무엇을 어디에 조합하느냐에 있다. 그러니 카니발에 참석한 주인공이 상류층의 공간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올 때 하필이면 오리들이 짝짓기를 하고 있다거나, 남자친구를 찾아 질척이는 땅을 딛을 때 마침 인간 대포가 날아간다고 해서 ‘어떻게’를 궁금해할 일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쿠아론이 합성의 천재라는 걸 벌써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현대 미술계는 이 질문 -그 시점 그 자리에 무엇을 배치하는가- 을 던지는 각축장이 돼 있지 않나. 이제 12분29초짜리 해변 롱테이크로 들어가보자.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쿠아론은 “교각을 만들어 바다 안쪽까지 트랙을 설치해 촬영했다. 때마침 높은 파도가 몰아쳐 왔다”는 정도만 말했지만, 특수시각효과(VFX)와 관련된 속사정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할리우드 리포터> 인터넷판 2018년 12월 18일자 기사는 이 영화의 시각효과감독 데이브 그리피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해당 장면이 “드라마와 공포감의 확장을 위해 여러 테이크를 삽입”한 것이며 “여러 개의 숏을 이어붙였고 디지털 방식으로 합성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파도 속 아이들은 재배치됐고, 인물들이 모여 껴안을 때 물에 반사된 빛은 따로 촬영됐다. 그러니 시간 맞춰 잘도 날아가는 비행기, 딱 필요할 때 등장하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데이브 그리피스는 VFX의 여러 분야 가운데에서도 ‘디지털 합성’ 전문가로, <정글북> <에이리언: 커버넌트> 등에서 합성 감독(compositing supervisor)을 맡은 인물이다. 수영을 못하는 주연배우와 제법 할 줄 아는 아역배우들이 적절한 날씨와 최적의 카메라 움직임을 만나 역사적 장면을 탄생시켰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핵심은 20세기에 영화 예술을 찬양하던 태도로는 접근조차 어림없는 게 쿠아론의 영화들이란 점이다. <인디와이어> <버라이어티> 등은 70년대 멕시코시티의 풍경을 구현하기 위해 거대한 블루스크린이 사용됐음을 전하고 있다. 이는 유튜브에서도 확인된다. 극중 시력이 왜곡된 독일군이 자기 편 전투기를 격추하는 코미디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나서는 클레오의 뒤편에서 장난감 장사꾼이 떠든다. 장난감은 공중에 떠 춤추고 있다. “실 안 보이죠. 속임수 아니에요.” 그렇다. 극장을 나서는 우리는 <그래비티>가 대기권 밖에서 촬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짜’라고 생각한 적 없다. 우리는 종잇장만큼의 차이로 “합성이네”와 “실감나네” 사이를 오가는 왜곡된 시력의 소유자들일 뿐이다.

구현보다는 재현을 중시하는 쿠아론의 카메라

다시 말하자. 쿠아론의 관심사는 현장에서의 고유성을 포착하는 리얼리즘이, 아니다. 그의 구현(presentation)이 관객의 수용 단계에서 어떻게 재현(representation)되느냐가 골자다. 흥미로운 건 <로마>는 <그래비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바탕 위에 놓인 화면인 척하고 있다. 말하자면 ‘VFX 리얼리즘’이다. 영화에는 ‘척하는’ 것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정의의 사무라이인 척하는 남자친구, 출장 간 척하는 남편, 우주의 기운을 받는 척하는 차력사, 권총 놀이를 하며 “죽은 척해야지”라며 억지 부리는 아이. 진짜인 척하는 동물 박제…. 지금 쿠아론은 쉴 틈 없이 ‘어디까지가 진짜인가’를 묻고 있는 중이다. 관객은 분별해야 하는 과제들 앞에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사슴 박제보다 개 머리 박제를 볼 때 더 끔찍하다. 사람과 가까운 동물이기 때문인데, 새 박제는 끔찍하지 않은가? 식당에 내걸린 물고기 모형은? 그렇다면 하인으로 부리던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머리를 박제한다면 어떤가? 이제 <로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불교적 세계관, ‘경계’와 ‘분별’이라는 화두와 마주친 우리는 좀더 근원으로 들어갈 것을 주문받는다. 클레오가 사는 집에 우두커니 놓여 있던 작은 불상(佛像)은, 그녀가 생명을 구하고 돌아온 뒤 한결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움직임에 ‘항상 같음’이란 없다. 초반 클레오의 실내 조명 관리 장면에서 360도를 등속 회전해 제자리로 돌아온 화면은 불 켤 데 켜고 끌 데 끄고 난 뒤 달라진 집 안을 비춘다. 한 바퀴 자전해 같은 자리에 온 것 같지만 어제의 지구와 오늘의 지구를 이루는 만물은 조금씩 변해 있는 것이다. 대개 식재료이지만 가끔 생명을 상징하는 달걀이 클로즈업된 다음 클레오가 돌보는 아이는 말한다. “내가 늙었을 때 클레오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었어.” 연기(緣起·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부터 윤회(輪廻)까지 언급하는 아이(혹은 감독 자신)의 대사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 구원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세계관을 놀랍도록 압축한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해변 장면에서 비슷한 대사가 한번 더 반복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래서 <로마>의 카메라는 트라이포드의 중심축에서만 회전하고, 설치된 트랙 위에서만 수평이동한다.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궤도를 따라 공전하는 지구처럼. 수십년 전 휠체어에 올라 자유롭게 움직인 고다르의 카메라와 비교해도 커다란 차이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활발하지만 단 한번도 축과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트랙을 따라 달리는 장난감 차를 가지고 놀며 무한 공간을 유영하는 우주영화를 욕망한다. 이 집의 자동차는 무심한 벽, 그저 제 길을 가던 화물차 혹은 기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군악대 사이에 자꾸만 끼이는 일을 겪은 뒤에야 일종의 ‘해탈’ 여행에 마지막으로 쓰인다(차종은 ‘은하계’란 의미의 갤럭시다). 요컨대 <로마>는 인물의 행동과 우주의 섭리 혹은 행위자가 처한 조건들의 ‘사이’를 들여다보는 영화다. 그 카메라는 자연법칙에 근거해 철저하게 통제된다. 여기에 정밀한 합성이 디자인된 것은 물론이다. 쿠아론은 하나의 숏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합성을 연구함으로써 진리에 다가서는, 희귀한 첨단을 걷는 작가다. <로마>는 21세기 현대영화 중에서도 어떤 한쪽 끝으로 나아간 리얼리즘이며, 우리의 태도 또한 20세기의 그것을 버렸을 때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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