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목할 만한 시나리오작가①] 권성휘 작가 - 관객으로 보고 싶은 영화를 쓴다
2019-03-20
글 : 김성훈
사진 : 오계옥
<점쟁이들> <공작> 권성휘 작가

권성휘 작가가 카페에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카페에서 지척인 집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가 마실 가듯 인터뷰하러 나왔다. 그는 “마감은 집이 편하다. 다른 공간에선 집중이 안 된다”며 “예전에는 오전 9시부터 일하면 무조건 12시간 동안 글쓰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도 만나고 가족도 챙겨야 하는 까닭에 순간순간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공작>의 각본을 쓰면서 영화계에서 주목받았다. 현재 권성휘 작가는 <공작>에 이어 윤종빈 감독의 신작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함구령이 내려진 상태라 자세히 밝히긴 어렵지만 말이다.

“작가 생활한 지 14, 15년째인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화 잘 봤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권성휘 작가에게 <공작>은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두루 호평받은 첫 작품이다. “영화를 보니 감독의 연출에 기댄 부분도 상당히 있어 시나리오작가로서 고민도 많이 하고 그만큼 한계도 느낀 작업”이기도 하다. “나중에 은퇴하거나 죽을 때 대표작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고 하니 그가 이 영화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윤종빈 감독과 함께 쓴 시나리오는 연출,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공작>이 보여준 성취다.

윤종빈 감독에게서 흑금성 사건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 작가로서 욕심이 났다는 그는 “흑금성이 사건을 겪으면서 점점 변화하는 과정이 아이러니해 흥미로웠고, 사건 실화가 재미있었지만 마땅한 레퍼런스가 없어 한국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지만 도전하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권 작가가 초고를 쓰면서 신경 쓴 건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방대한 분량의 사건 실화를 2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는 것이다. 흑금성 사건을 다룬 과거 기사와 파일 몇 개에 의존한 채 사실과 사실 사이 비어 있는 공간을 영화적 상상으로 채워넣어야 했다. 또 하나는 흑금성 박석영(황정민), 리명운 북한 대회경제위 처장(이성민) 등 실존 인물들을 만날 수 없는 탓에 인물에 대한 묘사를 어느 선까지 이야기로 다룰 수 있을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거다. “박석영이 구사하는 단어나 말투는 기사나 자료를 참고해 써내려갔지만 리 처장은 주어진 정보만 가지고는 그가 어떤 어휘를 구사하는지 도통 감을 잡기 어려웠다. 북한의 경제 전문가인 까닭에 자본주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진짜 그가 즐겨 사용하던 어휘가 무엇일까 고민이 많았다. 실제로 그가 여러 토론회에 참석해 했던 말을 참고해 대사를 써내려갔다.” 만날 수도 없고,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던 탓에 얼마나 막막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공작>은 총성 없는 첩보물을 표방한 까닭에 총 대신 말로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게 관건이었다. 박석영과 리 처장이 영화에서 처음 만나는 신이 특히 그랬다. “박석영과 리 처장 모두 의중을 감추는 게 중요한 장면인데 의중을 감추면 대화가 겉돈다. 두루뭉술하게 말하다가 ‘칼’(본심)을 찔러야 했다. 그 장면은 치고 빠지는 완급을 계산하고, 대사를 소리내어 읽으면서 쉼 없이 한 호흡으로 썼다”는 게 권 작가의 설명이다. 참고할 만한 영화가 따로 없었기에 막막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걱정을 덜었다고 한다. “첫 만남, 첫 기싸움에서 삐끗하는 순간 판이 깨질 수 있는 장면인데 감독님과 배우들이 잘 살려준 덕분에 극장에서 정말 재미있게 봤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나온 초고를 바탕으로 윤종빈 감독과 권성휘 작가는 탁구치듯 서로가 수정한 시나리오를 수없이 주고받으며 세세한 것 하나까지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는 <공작>을 들고 혜성처럼 나타난 작가가 아니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99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학창 시절 일찌감치 자신의 진로를 시나리오작가로 정했다. “당시만 해도 16mm 필름으로 영화를 찍어야 했는데 비용을 감당하기가 벅찼다. 그럼에도 단편영화 한편을 찍었는데 현장에서 ‘나쁜’ 소리를 도저히 못하겠더라. (웃음) 내 성격으로 감독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4살 되던 해 1월 1일, 그는 시나리오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장편 시나리오를 썼다. “30살이 되기 전에 입봉하지 못하면 이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배수진을 치고 발을 들였지만 데뷔는 쉽지 않았다. 엎어진 시나리오만 수십권, 그때마다 관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고비 때마다 힘이 됐던 건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 이야기는 네가 잘할 것 같은데 같이해보지 않을래?’라고 먼저 손을 내밀어준 덕분에 여기까지 버티고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코리아> <점쟁이들> <공작>이 그렇게 만난 작품들이다.”

각색으로 참여한 독립영화 <독>이 개봉하면서 가까스로 시나리오작가가 된 그는 이후 <코리아> <점쟁이들>의 각본을 차례로 썼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에 출전한 남북단일팀을 소재로 한 영화 <코리아>는 “실존 인물과 사건 실화를 다룬 이야기”인 만큼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드라이하게 쓰려고 했”다. <점쟁이들>은 전국 각지의 유명한 점쟁이들이 한 시골 마을에 들어가 겪는 소동을 그린 이야기다. “기획부터 참여해 29고 끝까지 다 써서 애착이 남다르다. 20고 넘어가니 프로듀서가 된 기분마저 들더라.” <공작>이 끝난 뒤 그는 신인 김광빈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클로젯>을 각색했고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현재 권성휘 작가는 윤종빈, 장항준 감독의 신작을 작업하고 있다. 유독 영화사 월광과 작업을 많이 하는 그를 두고 영화사 월광에 소속된 작가가 아니냐고 궁금해하는 영화인들이 적지 않다. “내가 설립한 제작사가 있지만 월광의 전속 작가라는 말이 싫지 않다. 월광은 젊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집단이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무척이나 영광이다.” 그는 앞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다고 했다. “요즘 관객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할까?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렇다면 관객으로서 내가 재미있고 좋은 이야기를 쓰면 되지 않을까.”

<토이 스토리>

●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나리오_ “두편 꼽으면 안 되나. (웃음) <토이 스토리>(1995)는 시나리오 강의할 때마다 교본처럼 언급하는 영화다. 주인공이 사건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전형적인 서사구조인데 보면 볼수록 완벽하다. 또 하나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1953).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도쿄에 가는 노 부부의 사연은 간단하지만 서사가 기교 없이 쭉 흘러간다. <토이 스토리>에서 시작해 <동경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 시나리오 작업할 때 습관이나 챙기는 물건_ “이어폰. 글쓰기 전에 라디오 클래식 전문 방송을 튼다. 볼륨은 1이나 2로 들릴락말락하는 정도로 맞춘다. 그래야 집중이 잘된다. <공작>도 그렇게 작업했는데 곡 제목은 알 수 없지만 러시아쪽 음악을 주로 들었다.”

● 필모그래피 2019 <클로젯> 각색 2018 <공작> 각본 2015 <방안의 코끼리> 각본 2015 <살인의뢰> 각색 2012 <점쟁이들> 각본 2012 <코리아> 각본 2009 <독>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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