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현재진행형의 무거운 역사이지만,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래서 내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자는 거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미국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는 설정의 <아이 캔 스피크>는 유승희 작가를 만난 뒤 제작의 활로가 트였다. 유 작가가 보다 친숙하고 대중적인 화법을 취한 덕에 80대의 ‘민원왕’ 할머니가 구청 공무원에게 영어 과외를 받는다는 이야기의 표면이 훨씬 밝고 유쾌하게 살아난 것이다. 유승희 작가에겐 “피해자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할머니들의 진취적인 면들, 그리고 재밌는 면들을 바라본” 결과, 집필 당시부터 염원했던 옥분 역의 나문희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출연을 승낙했다. “나문희 배우가 해준다면 편안하게 코미디를 해도 이야기가 가벼워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또 반대로 산소에 앉아 엄마를 원망하는 신처럼, 많이 쥐어짜지 않고 담담하게 읊어도 충분히 슬플 것 같았다.” 그는 이제훈 배우에 대해서도 특별언급했다. “나문희 선생님의 상대역인 점, 한류 이슈 등으로 인해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텐데 이제훈 배우의 결정이 정말 큰 힘이 됐다.”
작가는 대학교 4학년 때 MBC아카데미의 구성작가 과정을 수강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쓰는 삶에 진입했다. 운 좋게 졸업 직후 MBC 특집 프로그램의 새끼작가로 합류했다가 케이블TV로 자리를 옮겼다. “자료 조사 담당, 새끼작가, 서브작가, 메인작가 등 한 프로그램에 수많은 작가가 있는 지상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력이 적은 케이블 채널에서는 단독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이후 작가의 생계 스토리는 다사다난하다. 담당하던 프로그램이 없어지기도 하는 등 부침이 심한 방송작가 생활에 회의감이 들었던 그는 공연기획사, 음반회사 등을 거치며 홍보담당자로 일했다. 회사를 나온 뒤엔 작업실 마련을 꿈꾸며 작은 카페를 차렸다가 “금방 망했다”. 이때의 실패를 계기로 “혼자 쓸 게 아니라 작가교육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단다. 학원 숙제를 빌미로 4일 만에 쓴 시나리오 <기억, 상실의 시대>(영화 제목은 <달콤한 거짓말>)가 얼떨결에 데뷔작이 됐다. 작가로 입봉한 이후에도 프리랜서로 카피라이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고, 주변 감독의 제안을 받고 모 홈쇼핑 회사의 작가로 2년 넘게 일했다. “가끔 나에게 작가처럼 안 보인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 아마도 내가 이곳저곳에서 사회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라 그럴 거다. (웃음)” 뒤따라오는 작가의 자문(自問)이 재미있다. “한곳에서 제대로 성공하지 못해서 시나리오작가가 된 걸까? 아니면 시나리오작가가 되고 싶어서 다 때려치우고 나온 걸까?”
유승희 작가의 마음이 글로 사람을 위로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의 머리는 장르를 비틀고 싶어 한다. “스릴러 장르로 나온 이야기지만 이걸 로맨스로 확 틀어봐도 좋겠다”는 식이다. 익숙한 장르와 소재 혹은 유행하는 아이템을 틀어서 다른 방향으로 가져가자는 게 작가의 욕심이다. 우연히 과거의 첫사랑 상대가 운전하는 차에 치인 여자(박진희)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하는 <달콤한 거짓말> 역시 TV 드라마의 오랜 스테디셀러였던 기억상실이라는 테마를 변용해 만든 작품이다. 뻔뻔하지만 싱그러운 코미디다. 클리셰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묘하게 산뜻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재주를 두고 유 작가는 “이게 정말 맞나 혹은 재밌나 의심하다보면 갑자기 새로운 출구가 보이는” 경험을 떠올렸다. 그가 이명세 감독의 유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각색을 맡게 된 데에도 익숙한 것을 새롭게 다루고자 하는 태도가 한몫했을 것이다. 그의 전범이 되는 작가는 리처드 커티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두축으로 요약된다. “한국의 워킹 타이틀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웃음)”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를 비롯해 <러브레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같은 멜로 명작들의 제목이 작가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작가로서 지평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제작사에서 유 작가를 섭외할 때도 “더 로맨틱하게, 더 코믹하게, 더 트렌디하게“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따뜻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톤으로 이야기를 활짝 열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다.” 한편 작가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등의 이스트우드식 드라마에도 열광한다. 로맨틱 코미디의 밝은 기질을 넘어 보다 묵직한 울림을 안겨다줄 작가의 미래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한편 그는 시나리오작가로 일하면서 “종종 혼자서 영화를 짝사랑하는 기분”이 든다. 물질적으로 처우가 안 좋은 것은 물론, 업계에서 느끼는 정서적 소외감도 크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파티가 시작되면 작가들은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가끔 창작의 궁극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든다.” <아이 캔 스피크> 개봉 당시 평론가 듀나는 <한겨레> 칼럼 ‘듀나의 영화불평’에서 ‘각본가는 왜 ‘말’을 안 해줄까’라는 기사를 통해 이런 문제점을 관객 입장에서 풀어쓴 적 있다. 저작권이 영구귀속되는 계약을 했다가, 회사가 망하면서 계약금만 받고 잔금은 치르지 못한 채 날려버린 아이템도 꽤 있다. 유 작가가 털어놓은 고충은 시나리오작가의 위상 면에서 한국영화계의 고질병 중 하나지만, 최근 영화 작가들이 TV드라마로 넘어가고 신인작가의 유입은 크게 줄어드는 상황이 점점 극심해진다는 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그래서 유승희 작가는 “<완벽한 타인> <극한직업> 등의 성공으로 배세영 작가가 주목받는 상황이 시나리오작가로서 매우 고무적”이라고 했다.
그의 차기작은 인벤트스톤이 제작하고 송해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당신과 함께한 시간>(가제)이다. “실존 인물인 어느 부부의 이야기에서 단서를 얻은, 따뜻한 멜로영화다.” 유승희 작가의 투입으로 캐릭터들이 좀더 생기 있고 로맨틱 코미디적 요소가 가미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슬픔이 더 짙어지려면 밝은 부분과 대비를 이루어야 하지 않나. 나는 그 밝음을 담당하고 있다. (웃음)” 대만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리메이크 작품(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도 맡았다. “기질적으로 너무 어두운 이야기는 못 쓴다. 돌이켜보면 <아이 캔 스피크>도 그래서 내게 온 것 같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때로 어렵고 힘들지만, 두 사람이 만나면 결국엔 웃기고 귀여워진다.”
●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나리오_ “리처드 커티스의 작품들을 단연 좋아한다.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각본을 썼고, <러브 액츄얼리>로 감독 데뷔한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는 <그린북>의 시나리오가 괜찮다고 느꼈다. 캐릭터 각각의 변화를 확실히 보여주면서, 그 바깥에서 사회적 편견을 타파해가는 이야기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다.”
● 시나리오 작업할 때 습관이나 챙기는 물건_ “눈에 보이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캔들 만들기를 시작했다. 액체가 서서히 굳는 과정을 보면 복잡했던 마음도 차분해진다. 13년정도 된 다이어리는 책을 읽다가 인상깊은 구절을 옮겨 적는 용도다. 최근에는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었다.”
● 필모그래피 2017 <아이 캔 스피크> 각본 2014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각색(공동) 2008 <달콤한 거짓말> 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