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목할 만한 시나리오작가⑥] 윤현호 작가 - 법정물 장인
2019-03-20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변호인> <공조> 윤현호 작가

10대 시절 남다른 영화광으로 살았던 이가 영화 일에 뛰어드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윤현호 작가만큼 방대한 기록을 남기고 보관하는 사람은 충무로를 통틀어도 드물 것이다. 윤현호 작가의 사무실에는 그가 중학생 때부터 매일 써온 영화 노트가 아직도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다. 고등학생 시절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본 영화도, 극장에서 본 영화도 꼭 기록을 남겼던 그는 한 페이지에 영화 한편씩 자신의 감상을 빽빽하게 적었다. 매해 자기만의 톱10 리스트나 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감독상·각본상·음악상 등을 꼽기도 했다. “당시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따라가면 결국 영화잡지가 있다. 영화 잡지 때문에 영화가 좀더 궁금해졌다. <스크린> <로드쇼> <키노> 같은 잡지를 너무 좋아해서 나한테 없는 과월호를 찾아 헌책방을 뒤지고 다니기도 했다. 사실 당시 꿈은 영화평론가였다. 그러다 보니 계속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를 보고 분석해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감상을 남겼다. 그렇게 글을 적지 않았다면 비디오 가게에서 봤던 영화에 대한 기억이 소모되고 사라졌을 것 같다.”

90년대 비디오 가게 세대였던 윤현호 작가의 취향은 대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여 랭킹 순위 10위권에 있는 영화들”을 주로 좋아했고, 손님들에게 재미있다고 추천하면 반응이 좋을 만한 작품이 그의 관심사였다. “손님이 빌려간 영화를 보면 취향이 나온다. 액션이면 액션, 드라마면 드라마, 코미디면 코미디. 장르에 맞게 대안을 갖고 있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펄프 픽션>(1994) 같은 영화들을 추천하면 반응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 감독은 토니 스콧이다. <크림슨 타이드>(1995), <트루 로맨스>(1993), <폭풍의 질주>(1990), <리벤지>(1990), <탑건>(1986)….” 평생의 주기억장치에 보관된 수많은 영화가 거론되는 와중에 특별히 영향을 준 작품을 세편만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트루 로맨스>의 인물 관계나 이야기 구성, <펄프 픽션>의 예측 불가능한 상황과 캐릭터를 갖고 노는 기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트맨2>(1992)”라고 그는 정리했다. 이중 <배트맨2>는 그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작품이다. <배트맨2>의 캣우먼을 연기한 미셸 파이퍼에게 푹 빠지면서 그의 얼굴이 표지에 실린 <로드쇼>를 구입했고, 윤현호 작가의 영화 사랑이 시작됐다. “좋아하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요즘 말로 ‘도장깨기’ 하며 영화를 본 게 지금까지 나만의 라이브러리로 남아 있다.” 10년간 그를 옆에서 지켜봤다는 한 지인은 “아마 한국에서 <중경삼림>(1994)의 왕정문 사진을 가장 많이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변호인>(관객수 1137만명), <공조>(관객수 781만명), 드라마 <리멤버: 아들의 전쟁>(최고 시청률 20.3%), <무법 변호사>(최고 시청률 8.9%) 등 입봉작을 제외하면 흥행 성적 면에서 항상 최고의 결과를 얻었던 원천은 비디오 가게, 그리고 배우를 향한 남다른 애정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작가라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영화가 좋아서 진학했던 영화과 졸업 후에 도전한 연출부 면접에서는 매번 고배를 마셨다. 현장에서의 일은 성향상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비웠다는 윤현호 작가에게 시나리오작가 사무실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제안이 들어왔다. 영화의 어떤 분야라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1년6개월 정도 일했고, 이곳에서 “책상에 있을 때 더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그의 길이 잡히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나와서 처음 쓴 시나리오가 바로 <나는 아빠다>. 2008년 신씨네와 동서대학교가 공동 주최한 ‘필름2.0 시나리오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2011년 영화화됐다. <공조> 그리고 양우석 감독이 갖고 있는 한줄짜리 로그라인으로부터 <변호인>의 트리트먼트·초고·시나리오 작업을 이어간 것이 이후의 일이다.

윤현호 작가의 작품에는 유독 법정이 자주 등장한다. 이 역시 비디오 가게에서 형성된 취향이냐고 묻자 오히려 그 당시에는 많이 못 봤다고 고백하며, <어 퓨 굿맨>(1992),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 <심판>(1982) 등과 “그보다는 좀 커서 본 <에린 브로코비치>(2000)”가 언급됐다. “법정은 굉장히 흥미로운 공간이다. 공식적으로 싸우는 장소고, 갈등이 언제나 존재하고, 무엇보다 배우를 굉장히 매력 있게 만든다. 배우의 발성이라든가 연기력이라든가 화면 장악력이 법정 신에서 온전히 드러나지 않나.” 그렇게 윤현호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변호사들은 연기한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인상적인 경우가 많았다. “마음을 흔드는 변호사”였던 <변호인>의 송우석(송강호), “성장해가는 변호사”였던 <리멤버: 아들의 전쟁>의 서진우(유승호), “모순으로 점철된 변호사”였던 <무법 변호사>의 봉상필(이준기) 등이 대표적 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아이러니’가 있는데, 이는 윤현호 작가가 본격적인 글을 쓰기 전에 미리 각을 잡아두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는 돈을 추구하던 변호사가 돈을 버리게 된다거나(<변호인>), 북한에서 온 아주 훤칠한 살인 기계 형사와 남한의 루저 같은 형사가 힘을 합치거나(<공조>), 절대 기억력을 가진 변호사가 기억을 잃게 된다거나(<리멤버: 아들의 전쟁>), 법을 지켜야 하는 변호사가 무법을 일삼았다(<무법 변호사>). 그렇게 착상을 하고 나면 세 페이지짜리 시놉시스를 써서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따지고, 수십 페이지 분량의 트리트먼트를 소설처럼 쓴 후, 초고와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정석적인 코스를 거친다.

비디오 시절 영화광의 영혼에 성실한 모범생의 태도를 가진 윤현호 작가는 “보통 충무로에서 작가가 살아남으려면 감독이 되거나 제작사를 차리거나 드라마 작가 일을 같이해야 한다”고 전했다. 현실적 고민이 묻어나는 씁쓸한 고백이었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감독 위주의 매체이긴 하다. <변호인> 당시 크레딧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영화계를 영영 떠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드라마는 작가가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이고, 긴 호흡의 법정물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드라마 대본을 쓰게 됐다. 지금은 드라마를 하면서 예전의 상처도 많이 치유됐고, 영화쪽 일도 다시 병행하고 있다. 현재 영화제작사와 논의하며 준비 중인 법정물이 있다.”

<야수>

●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나리오_ 윤현호 작가는 자신처럼 드라마와 영화 작업을 두루 해온 한지훈 작가의 <야수>(2006) 시나리오를 가장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한지훈 작가는 <태극기 휘날리며>(2003), <소년은 울지 않는다>(2007)와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 <로드 넘버 원> <불야성> 등의 각본을 썼고, 윤현호 작가는 <로드 넘버 원>의 구성 작가로 참여한 이력이 있다. “일단 캐릭터들 사이에 갈등이 굉장히 크게 붙고, 구성이 아주 역동적이다. 지문 묘사도 굉장히 아름답고, 대사에 핵심이 있다.”

● 시나리오 작업할 때 습관이나 챙기는 물건_ “타이머. 일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으면 삶이 힘들어지지 않나. 글을 쓸 때는 글에만 집중하기 위해 타이머를 1시간 단위로 맞춰둔다. 이것을 켜놓았을 때는 인터넷 서핑도 핸드폰도 절대 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시간이 빨간 영역으로 표시돼서 시각적으로도 보기 좋다. 이걸 하루에 6번 돌리면 순수하게 하루 6시간 일하는 셈이다. 사실 일할 때 집중해서 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일을 안 할 때 편안하게 놀고 싶은 마음에 만든 습관이다. (웃음)”

● 필모그래피 2018 드라마 <무법 변호사> 각본 2017 <공조> 각본 2015 드라마 <리멤버: 아들의 전쟁> 각본 2013 <변호인> 각본(공동) 2011 <나는 아빠다> 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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