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블랙시네마의 르네상스다.” 2018년 3월, <겟 아웃>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직후 조던 필 감독이 남긴 말이다. 그는 이날의 수상으로 미국 아카데미 역사상 각본상을 수상한 첫 아프리칸 아메리칸 영화인이 됐다. 조던 필의 말대로 지난 2018년은 블랙시네마의 찬란한 부흥을 알리는 기념비적 해였다. 마블이 제작한 첫 번째 흑인 솔로 슈퍼히어로영화 <블랙팬서>는 북미를 넘어 세계적으로 흥행 수익 13억달러를 기록하며 마블 솔로 슈퍼히어로영화 역대 흥행 수익 1위에 올랐고, 블랙시네마의 아이콘 스파이크 리의 귀환을 알린 <블랙클랜스맨>은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시간의 주름>을 연출한 에바 두버네이는 이 영화로 1억달러 이상의 제작비를 투입한 블록버스터를 연출한 최초의 흑인 여성감독이라는 역사를 썼다. 이뿐 아니다. 다양성을 연구하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싱크탱크 집단 아넨버그 인클루전 이니시에이티브의 보고서는 2018년 북미에서 흥행한 박스오피스 상위 100편의 영화 중 16편이 흑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고 분석했다. 북미 언론은 110여년에 달하는 블랙시네마의 역사에서 최근 5년이 나머지 100여년보다 더 극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보도한다. 수많은 지표가 하나의 명징한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블랙시네마의 황금기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블랙시네마라는 명칭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통상적으로 블랙시네마란 흑인 문화의 다양한 지형을 흑인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뜻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며 그들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반영한 영화를 대개 블랙시네마의 범주에 넣는다. 흑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 많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흑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야 블랙시네마에 속하는 건 아니다. 일례로 백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컬러 퍼플>(1985)은 당대의 흑인 인권과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블랙시네마의 고전으로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반면 흑인 감독 안톤 후쿠아가 연출하고 덴젤 워싱턴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트레이닝 데이>(2001)의 경우 흑인 캐릭터가 주인공임에도 영화 자체가 흑인의 이야기, 또는 흑인의 시선을 반영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블랙시네마의 범주에 포함하기 망설여지는 작품이다. 이처럼 블랙시네마라는 개념은 고정돼 있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새롭게 규정되고 평가된다.
최근 5년간 급성장한 이유는
최근 몇년 새 블랙시네마가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는 블랙시네마에 대한 관객의 고정관념을 무장해제하고 그 범주를 확장하는 다양한 흑인 영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는 리얼하면서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흑인 소년의 성장담을 그려냈고, 그간 흑인영화가 제대로 탐구하지 않았던 LGBTQ 이슈를 영화의 중심부로 끌고 왔다. <겟 아웃>의 조던 필은 블랙시네마에 자주 등장하는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를 호러 장르에 결합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전형적인 흑백 구도를 전복하는 쾌감을 선사했다. 할리우드에 가장 뚜렷하고 거대한 변화를 불러온 감독은 <블랙팬서>를 연출한 라이언 쿠글러다. 그는 2013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로 여전히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흑인들의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더니, <록키> 시리즈의 일곱번째 작품 <크리드>(2015)에서는 백인 복서의 성공신화로 기억되던 이 시리즈에 흑인의 서사를 덧입혔다. 쿠글러의 연출작 중에서도 <블랙팬서>는 더욱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마블의 첫 흑인 솔로 슈퍼히어로영화로 2018년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전세계 흥행 수익 13억달러를 기록한 <블랙팬서>는 롤모델로 삼을 만한 매력적이고 대중적인 흑인 슈퍼히어로의 모습을 제시했다는 점과 흑인의 문화와 삶을 다룬 영화가 글로벌 티켓 파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할리우드영화 관계자들에게 각인했다. 명민한 감각과 상업적인 마인드를 갖춘 젊은 흑인 연출자들의 등장은 참신하고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 헤매는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새로운 노다지가 됐다.
사실 1990년대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다. 1991년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모든 할리우드 스튜디오 임원이 흑인영화 한편씩은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똑바로 해라>(1989), <모 베터 블루스>(1990), <정글 피버>(1991), <말콤 X>(1992) 등 1년에 한편씩 영화를 쏟아내며 블랙시네마의 뉴웨이브를 이끈 스파이크 리와 흑인 감독으로는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감독상 후보에, 그것도 최연소로 오른 <보이즈 앤 후드>의 존 싱글턴, <사회에의 위협>을 연출한 휴스 형제와 <도터스 오브 더 더스트>를 연출한 줄리 대시 등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흑인영화를 주도적으로 만드는 일련의 흑인 감독들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들은 1970년대를 풍미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의 주역이던 선배 세대의 흑인 감독들과도 달랐다. <샤프트> <스위트 스위트백스 배다스 송> 등 아드레날린과 성적 매력이 넘치는 저예산 장르영화로 대변되던 1970년대 블랙시네마와 달리 USC, UCLA, NYU 등에서 고등 영화 교육을 받은 지식인 감독들이 주축이 된 1990년대 블랙시네마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적 목소리를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는 영화로 채워졌다. 투팍, 아이스 큐브, 퀸 라티파 등 미국 대중문화에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한 흑인 셀러브리티들이 활발하게 스크린에 진출한 것도 이 시기다.
하지만 할리우드 메인스트림에 성공적으로 편입하지 못한 1990년대 흑인 감독들은 다음 장편영화를 찍을 돈이 없어 영화 제작을 포기했다. 상업영화를 만드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흥행이 어려울 거라는 이유로 흑인 고유의 이야기에 초점 맞추기를 꺼렸고, 한번 실패한 흑인 연출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백인 감독들이 몇번의 실패 후에도 여전히 블록버스터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는 동안 말이다. <부메랑> <하우스 파티> 등 코미디영화로 90년대를 풍미한 흑인 감독 레지널드 허들린이 <못말리는 이혼녀>(2002)의 실패 이후 <마셜>로 복귀하기까지 15년간 차기작을 찍지 못한 건 조용히 사라진 수많은 흑인 감독의 사례를 대변하는 일화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 때문인지 2000년대 블랙시네마는 할리우드의 주류 백인 문화에 이질감 없이 녹아드는 작품이 많다. <레이>와 <드림걸즈> 등 매력적인 사운드트랙으로 무장했으나 흑인의 현실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영화가 각광받았고, <블라인드 사이드> <헬프>처럼 흑인 캐릭터가 주인공이지만 백인 구원자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작품이 적지 않았다. 2009년 바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 메인스트림 대중문화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등장이 잦아졌지만 ‘오바마 이펙트’가 블랙시네마의 부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티켓 파워와 연이은 영화제 수상이 힘을 보태다
오바마 이펙트보다도 블랙시네마의 르네상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은 2016년의 #OscarsSoWhite 논란이다. 미국 아카데미 남녀 주·조연상 후보에 백인 배우들만 지명된 2016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은 할리우드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이 여전히 존재하며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였다. 라이언 쿠글러, 조던 필, 배리 젠킨스, 마허샬라 알리, 비올라 데이비스 등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탄생한 아프리칸 아메리칸 스타 감독과 배우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흑인 문화의 대변자를 원하는 흑인 관객의 열망을 충족시켰으며 블랙시네마에 새로운 장르와 이야기를 유입했고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는 박스오피스 티켓 파워에 흑인이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시켰다.
블랙시네마를 소비하는 관객의 티켓 파워도 블랙시네마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인구조사국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 사회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인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 정도로, 백인에 비해 2배 이상의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아프리칸 아메리칸 가정의 평균수익은 지난 10년간 어떤 인종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에 따르면 흑인들은 미국 내 어떤 인종보다 TV를 많이 시청하며 소셜미디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UCLA 사회학 교수 다넬 헌트는 2016년 북미 박스오피스 톱10 영화 티켓의 절반 이상을 유색인종이 구매했다며 <블랙팬서>의 흥행 또한 “영화산업이 시장의 본질에 진실하게 접근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소셜미디어상에서 정치·사회·문화적 이슈를 주도하는 데 익숙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감각과 경제력을 갖춘 흑인 인구의 부상은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이들을 잠재력 강한 소비자층으로 인지하게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 <노예 12년>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블랙팬서>처럼 북미 시장을 넘어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한 블록버스터의 지속적인 등장은 블랙시네마의 글로벌한 성장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노예 12년>과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가 등장한 2013년부터 <겟 아웃>과 <블랙팬서>가 좋은 평가를 받은 2018년까지, 유례없는 호시절을 누리고 있는 블랙시네마 열풍은 어디까지 계속될까. 아무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2010년대 출현한 젊은 흑인 감독들이 왕성하게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또 다른 호러영화를 들고 관객을 찾아온 <어스>의 조던 필, 국내 개봉은 아직 미정이지만 또 한편의 매력적인 멜로영화를 만든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의 배리 젠킨스처럼. 블랙시네마는 이제 미국영화에서 따로 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21세기 아메리칸 시네마의 지형도에 야심만만하게 자신들의 족적을 그려나가는 흑인 영화인들의 행보를 예의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