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블랙시네마 ③] 1980년대부터 2019년까지, 블랙시네마를 대표하는 영화 20편
2019-03-27
글 : 송경원
글 : 김소미
영화는 다르다고 말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블랙시네마도 전진한다. 1980년대부터 2019년까지 블랙시네마를 대표할 만한 영화 20편을 소개한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고 소리 높여 외치던 시대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즐겨 보고 있는 시대로, 꾸준히 영역을 확장 중인 블랙시네마의 다양한 면면을 확인해보자.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우피 골드버그, 대니 글로버, 마거릿 에이버리, 아돌프 캐서, 오프라 윈프리 / 제작연도 1985년

“1980년대까지 내 영화들은 대부분 현실도피적이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때 나는 <컬러 퍼플>을 연출했습니다. 이 한편의 영화에는 깊은 고통과 더욱 깊은 진실들이 가득합니다. (중략) 영화를 만드는 동안 나는 이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16년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인간성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자신의 경험을 펼쳐놓았다. 미국 작가 앨리스 워커의 소설 <컬러 퍼플>은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가난한 흑인 마을을 배경으로 억압받던 여성의 삶을 장중한 필체로 그려나간다. 사실 스필버그가 <컬러 퍼플>을 선택한 것은 작가적 야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영화는 흑인 인권과 여성 문제에 대한 치열하고 도발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안일한 휴머니즘 코드로 조급하게 감동을 안기려 했다는 지적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럼에도 당대 최고의 흥행 감독이 흑인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는 것만으로도 <컬러 퍼플>은 자신의 소명을 충분히 달성했다.

<구혼작전> Coming to America

감독 존 랜디스 / 출연 에디 머피, 아세니오 홀, 제임스 얼 존스, 마지 싱클레어, 샤리 헤들리, 바네사 벨 캘로웨이 / 제작연도 1988년

코미디는 흑인 배우와 감독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장르 중 하나였다. <구혼작전>은 80년대부터 코미디 배우로 입지를 다진 에디 머피가 직접 대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영화다. 아프리카 자문다 왕국의 왕자 아킴(에디 머피)이 직접 왕자비를 찾으러 미국으로 와서 벌이는 소동을 따라가는 로맨틱 코미디다. 모자람 없이 살아왔던 왕자가 뉴욕 한복판 빈민가에서 직접 하류층의 생활을 경험하면서 얻게 되는 교훈은 얼핏 1차원적 동화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빈민층의 삶을 다루는 과정에서 미국이 흑백으로 나뉜 계급사회라는 것을 꼬집는 날카로운 풍자의 시선도 묻어난다. 특히 왕자가 주체적인 여성 리사(샤리 헤들리)에게 반해서 구혼작전을 벌인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전체적으로 쉽고 대중적인 코미디이고 흑인과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전근대적인 편견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도리어 그래서 시대적 인식과 단면을 읽어낼 수 있는 지점도 있다. 새무얼 L. 잭슨이 은행강도 역으로 짧게 등장했다.

<똑바로 살아라> Do the Right Thing

감독 스파이크 리 / 출연 대니 에일로, 오시 데이비스, 루비 디, 리처드 에드슨 / 제작연도 1989년

그때도, 지금도 결국 스파이크 리다. 80년대 블랙시네마의 불씨를 지핀 존재는 스파이크 리였고, 태풍의 눈으로 자리매김한 감독도 스파이크 리이며, 여전히 횃불을 들어 올리고 있는 사람 역시 스파이크 리다. 그가 직접 연출, 각본, 주연으로 참여한 <똑바로 살아라>는 스파이크 리의 출세작으로 인종차별의 두터운 벽에 맨몸으로 돌진하는 영화다. 예술이 아닌 선동에 불과하다는 비판에도 스파이크 리는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을 거부하고 독립영화 자본을 모아 자신의 색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인종차별을 단순한 선악의 대결구도로 몰고 가는 해묵은 논쟁에 말려들어가지 않고 현실을 드러낸 영화가 바로 <똑바로 살아라>다. 뉴욕 브루클린 거리 흑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 이 영화는 피자가게를 중심으로 인종차별의 감춰진 불씨들을 헤집는다. <똑바로 살아라>는 1989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LA비평가협회 작품상 등 여러 영화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전미 영화평론가협회가 발표한 최고의 영화 100편 중 한편에 꼽히기도 했다.

<보이즈 앤 후드> Boyz n the Hood

감독 존 싱글턴 / 출연 로렌스 피시번, 아이스 큐브, 쿠바 구딩 주니어, 니아 롱, 모리스 체스트넛, 티라 페럴 / 제작연도 1991년

로버트 타운센드와 스파이크 리 등 아프리카계 흑인 감독들이 흑인의 시선과 목소리를 대변한 영화를 들고 주류 영화계에 등장했지만 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건 존 싱글턴 감독이라 봐도 무방하다. 데뷔작 <보이즈 앤 후드>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랐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하며 이른바 ‘후드 필름’ 장르의 전성기를 연다. 갱스터영화의 일종인 후드 필름은 도시에 사는 흑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주로 갱단에서 방황하는 흑인 청년과 백인 사회의 갈등, 인종차별과 빈곤 문제를 다루는데 할리우드영화의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하면서 힙합 음악의 매력을 끌어들인 것이 특징적이다. 1984년 LA, 갱단의 폭력과 가난이라는 굴레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흑인 소년 트레이의 성장담인 <보이즈 앤 후드> 이후 유사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며 미국 내 흑인들이 맞닥뜨린 인종차별, 빈곤 등 현실 문제를 대중적인 관심사로 끌어올렸다.

<말콤 X> Malcolm X

감독 스파이크 리 / 출연 덴젤 워싱턴, 안젤라 바셋, 앨버트 홀, 알 프리먼 주니어 / 제작연도 1992년

말콤 X가 뿌린 씨앗은 그가 죽은 뒤 싹을 틔워 흑인인권운동의 에너지가 되었다. 스파이크 리 스스로가 그렇게 맺힌 열매 중 하나였기에 전기영화 <말콤 X>는 스파이크 리에게 필연 같은 영화이자 어쩌면 종착지나 다름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며 입체적인 이야기를 구축했던 <똑바로 살아라>와 달리 <말콤 X>는 실존인물을 영웅화하는 경향이 있다. 알렉스 헤일리가 쓴 전기를 바탕으로 4천만달러의 거액을 들여 완성한 만큼 힘 있는 연출을 선보이고 있으나 한편으론 일방적인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활활 타오르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백인 경찰의 집단 린치와 말콤 X의 성장 과정을 오버랩시킨 이 영화는 직설적이고 선동적이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뚜렷한 한계도 있다. 이 한편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스파이크 리는 이후 한동안 침체기에 빠지기도 했다.

<사회에의 위협> Menace II Society

감독 앨버트 휴스, 앨런 휴스 / 출연 타이린 터너, 리렌즈 테이트, 제이다 핀켓 스미스 / 제작연도 1993년

휴스 형제의 데뷔작으로 도시 빈민가의 범죄 환경에 둘러싸인 청년의 암울한 나날을 그린다. 흑인 거주자 비율이 월등히 높은 LA 남부의 도시 왓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케인 로슨(타이린 터너)의 삶 곳곳에는 뿌리깊은 범죄의 덫이 도사리고 있다. 마약 딜러이자 마약 중독자인 부모, 거리에서 총격을 받아 죽은 사촌, 학업을 포기하고 갱단에 가입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케인 역시 자연스레 도둑질을 하고, 마약을 파는 생활에 접어든다. <사회에의 위협>은 일면 극단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빈민가의 삶을 어둡고 살벌한 갱스터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는 20대 초반의 휴스 형제가 바라본 1991년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 직후의 분위기다. 형제는 백인 사회가 만든 편견과 소외만큼이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 흑인사회 내부의 오랜 체념과 증오를 포착했다.

<할렘 덩크> Above the Rim

감독 제프 폴록 / 출연 듀언 마틴, 리온, 투팍 샤커, 데이비드 베일리 / 제작연도 1994년

농구와 힙합, 컨셉만 들어도 신나는 조합의 <할렘 덩크>. 드리볼과 덩크슛 사이로 투팍 샤커의 삽입곡 <Holler If Ya Hear Me>가 흐르는 농구신이 대표적인 장면이다. 뉴욕 할렘가에 사는 카일(듀언 마틴)은 고등학교 농구팀의 유망주인데, 그에게 마약상 버디(투팍 샤커)가 접근해 지역상인과 마약 딜러들이 후원하는 도박성 토너먼트에 참가하라고 유혹한다. 혈기왕성한 소년이 아스팔트 위에서 펼쳐지는 거친 농구 게임에 매료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전설적인 흑인 농구선수들이 찾았던 뉴욕 러커파크를 무대로 <할렘 덩크>는 길거리 농구 특유의 활기를 뿜어낸다. 감독은 <더블 데이트 대소동>(1997), <로스트&파운드>(1999)라는 두편의 흑인 코미디영화를 더 만들었다.

<사랑을 기다리며> Waiting To Exhale

감독 포레스트 휘태커 / 출연 휘트니 휴스턴, 안젤라 바셋, 로레타 드바인, 레라 로천 / 제작연도 1995년

<섹스 앤 더 시티>(1998) 시즌1 전에 <사랑을 기다리며>가 있었다. 흑인 여성 작가 테리 맥밀란의 소설을 바탕으로 <레인 맨>(1989), <조이 럭 클럽>(1994),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1998) 등을 쓴 각본가 로널드 바스가 시나리오를 썼고, 감독 겸 배우 포레스트 휘태커가 메가폰을 잡았다. 방송국 PD인 사반나(휘트니 휴스턴)는 유부남과 연애 중이고, 가족을 위해 경력단절의 삶을 살고 있는 버나딘(안젤라 바셋)은 남편의 불륜을 알아차린다. 잘나가는 회사 중역인 로빈(레라 로천)은 혼외 관계에서 임신을 하고, 뷰티 살롱을 운영하는 글로리아(로레타 드바인)는 싱글맘의 고충을 견디며 살아간다. 사회·문화적인 인종 문제를 중점에 두지 않고, 자아실현을 고민하는 현대 여성의 보편적인 고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주연배우가 모두 흑인 여성으로 이루어진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예고했다. 베이비페이스가 프로듀싱한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1990년대 미국영화 O. S. T 중에서 손꼽히는 명반이다.

<레이> Ray

감독 테일러 핵퍼드 / 출연 제이미 폭스, 케리 워싱턴, 레지나 킹 / 제작연도 2004년

흑인 음악의 자존심이자 자양분이었던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전기영화의 정공법으로 쌓아올렸다. 1955년 <I’ ve got a woman>으로 빌보드 R&B 차트 1위로 등장한 레이 찰스(제이미 폭스)는 이후 평생에 걸쳐 압도적인 차트 기록과 트로피를 얻지만, <레이>는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굴곡에 관심을 가진다. 미국 남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7살에 눈이 멀고, 시애틀을 거쳐 뉴욕에 자리잡은 뒤 최고 스타가 되기까지, 레이 찰스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강인한 생활력과 집요한 의지라고 말한다. 흑인이자 장애인이기에 겪어야 했던 갖가지 차별과 배신, 그리고 전성기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약물중독 문제 등이 무대 안팎에서 그를 괴롭힌다. 배우 제이미 폭스는 <레이>로 주요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을 석권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시드니 포이티어, 덴젤 워싱턴에 이어 역대 세 번째 흑인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샤프트> Shaft

감독 존 싱글턴 / 출연 새뮤얼 L. 잭슨, 바네사 윌리엄스, 제프리 라이트, 크리스천 베일 / 제작연도 2000년

1970년대 흑인 영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른바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들은 베트남전 이후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일정 정도 확보한 흑인들을 관객층으로 공략하고자 흑인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웠다. 백인들이 악역으로 등장하고 펑크와 솔 음악을 활용하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는 상업적인 결과물이지만 경직된 분위기에 균열을 낼 효과적인 쐐기이기도 했다. 1971년 50만달러의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13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낸 고든 파크스 감독의 <샤프트>(1971)는 흑인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대표적인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다. 1973년 3편까지 제작되었지만 흥행에 참패하고 자연스럽게 시리즈의 막을 내렸는데, 2000년 존 싱글턴 감독에 의해 29년 만에 리메이크됐다. 새뮤얼 L. 잭슨이 샤프트를 맡으며 기대를 모았지만 완성도는 물론 평단의 반응과 흥행 모두 미적지근했다. 2019년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속편이 돌아올 예정이다.

<프라이데이> Friday

감독 F. 게리 그레이 / 출연 아이스 큐브, 크리스 터커, 토미 타이니 리스터, 니아 롱 / 제작연도 1995년

어느 금요일, 실직 상태인 크레이그(아이스 큐브)는 친구 스모키(크리스 터커)와 마약상의 대마초에 손댔다가 졸지에 200달러를 갚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여기에 동네 건달 디보(토미 타이니 리스터)와 유별난 여자친구(니아 롱)까지 합세하면서 크레이그의 금요일은 점점 더 악몽이 되어간다. 로스앤젤레스 사우스센트럴 지역의 블랙 컬처를 기반으로 시종 무례하고 유머러스한 캐릭터들의 매력으로 꽉 채워진 영화다. 느슨한 플롯 속에서 인물들의 생활상이 생동하고, 배우 각자의 에너지가 빛을 발한다. 힙합, 코미디, 버디무비를 접목해 1990년대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한 코미디영화의 흥행성을 증명한 <하우스 파티>(1990) 시리즈의 인기에 힘입어 제작됐다. 흑인 사회의 스트리트 문화, 그리고 MTV 감성이 대중문화의 재료로 각광받던 시기의 산물이다. 올해 <맨 인 블랙: 인터내셔널>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중견 감독 F. 게리 그레이의 데뷔작이다.

<드림걸즈> Dreamgirls

감독 빌 콘던 / 출연 제이미 폭스, 비욘세, 에디 머피, 제니퍼 허드슨, 애니카 노니 로즈 / 제작연도 2006년

<드림걸즈>는 모타운이 길러낸 전설적인 흑인 R&B 그룹 슈프림스의 활동에서 영감을 얻은 이야기다. 198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동명의 뮤지컬은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화려한 쇼 비즈니스 세계에서 자아실현을 꿈꾸는 흑인 소녀들의 성장담을 화려하게 과시하며 단숨에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영화 <드림걸즈>는 블랙뮤직의 풍성한 유산이 대중영화의 기호와 결합한 작품으로 200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영화가 됐다. 주류를 이뤘던 백인의 팝과 흑인음악의 경계가 공고해 보이던 1960년대, 기획사 모타운의 활약은 이를 부수는 강력한 신호탄이었다. 흑인 인권에 대한 메시지가 호전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드림걸즈>는 1960~70년대 미국 음악계를 사로잡은 흑인 스타들이 오늘날에도 엔터테인먼트적 가치를 잃지 않았음을 짚어낸 것만으로도 유의미하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Fruitvale Station

감독 라이언 쿠글러 / 출연 마이클 B. 조던, 멜로니 디아즈, 옥타비아 스펜서 / 제작연도 2013년

오스카 그랜트의 평범한 하루를 따라 천천히 함께 걷는 것. 관객이 그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방식은 그것뿐이다. 영화는 교도소 복역 전과가 있는 22살의 남자가 신년맞이 불꽃축제를 보러 갔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기까지를 덤덤하지만 집요하게 따라간다. 경찰의 과잉진압과 도를 넘은 폭력은 블랙시네마의 강박적인 관심사였고, 이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트라우마의 징후였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데뷔작에서 공권력의 폭력이라는 첨예한 화두를 다루면서도 무거운 주제와 균형을 이루는 영화의 형식적 완성도에도 관심을 쏟았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로 데뷔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빗발치는 총알도 그대로 튕겨내는 비브라늄 슈트 속의 영웅(<블랙팬서>)으로 돌아온 사실은 블랙시네마 역사에서 손꼽히게 드라마틱한 궤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감독 스티브 매퀸 / 출연 치웨텔 에지오포, 루피타 니옹고, 마이클 파스빈더, 베네딕트 컴버배치 / 제작연도 2013년

2013년은 블랙시네마라는 파도의 힘을 목격한 기념비적인 한해였다. 제86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스티브 매퀸 감독의 <노예 12년>은 일련의 흐름의 정점에 서 있다. <헝거>(2008), <셰임>(2011)으로 연출력을 증명한 스티브 매퀸은 1853년 솔로몬 노섭이 쓴 회고록을 자신의 세 번째 연출작으로 선택했다. 자유 흑인이었던 솔로몬 노섭은 1841년 워싱턴DC에서 납치당해 노예로 팔려가고 다시 자유를 되찾기까지 고난의 12년을 버틴다. 얼핏 낭만적인 묘사로 보일 수도 있지만 1840년 미국 노예제도의 민낯을 고발하며 오늘날 흑인 차별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뿌리를 탐색해 나가는 작업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솔로몬 노섭의 이야기는 1984년 이미 한 차례 영화화됐지만 스티브 매퀸 감독에 의해 한층 세련된 경지에 도달하고, 흑인 인권이라는 구호에 기대지 않고도 미학적 성취에 이를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 기념비적인 영화다.

<셀마> Selma

감독 에바 두버네이 / 출연 데이비드 오예로워, 카르멘 에조고, 테사 톰슨, 톰 윌킨슨 / 제작연도 2014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듬해인 1965년, 그는 흑인 투표권 획득을 위해 셀마-몽고메리 행진을 주도한다. 영화 <셀마>는 이 굵직하고 무거운 역사의 한줄을 차분하게 담아낸 영화다. 흑인인권운동 역사에서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이 갖는 존재감은 실로 엄청나다. 그러나 <셀마>는 그 위용에 휘둘리지 않는다. 10여년 이상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워온 마틴 루터 킹은 어느덧 조금 지쳐 있고, 그래서 때로는 불안과 피로에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추앙받는 지도자이자 불완전한 개인으로서 면모를 포착한 영화를 지켜보며 감독의 이름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세 번째 장편영화 <셀마>로 주목받기 시작한 에바 두버네이 감독은 중용의 시각으로 과거의 투쟁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권리는 흑인 스스로 쟁취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차별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두버네이 감독은 이후 다큐멘터리 <미국 수정 헌법 제3조>(2016)를 통해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다각도로 파헤쳤다.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Straight Outta Compton

감독 F. 게리 그레이 / 출연 오셔 잭슨 주니어, 코리 호킨스, 제이슨 밋첼, 닐 브라운 주니어 / 제작연도 2015년

미국 서부 힙합의 성지인 컴턴 지역에서 태동한 힙합 그룹 N.w.A의 전설을 담은 극영화다. 그 이름부터 살벌한 갱스터랩은 흑인 인구 비율이 높고 갱스터 조직이 밀집한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컴턴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1980~90년대 높은 범죄율과 더불어 인기 래퍼들의 출신 지역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 그룹의 앨범명이자 히트곡 제목인 ‘스트레이트 오타 컴턴’을 그대로 따왔다. 흑인 청년들이 극심한 일자리난에 시달렸던 1980년대 말에 닥터 드레(코리 호킨스), 아이스 큐브(오셔 잭슨 주니어), 이지 이(제이슨 미첼) 등이 그룹의 결성과 불화를 맞는 과정을 비교적 충실한 드라마로 풀어낸다. 힙합이 일으키는 반란의 소용돌이를 지켜보는 쾌감도 유효하다. 사회규범에 아랑곳하지 않는 N.w.A의 음악적 메시지는 그들이 처한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아이러니를 낳는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감독 데오도르 멜피 / 출연 타라지 P. 헨슨, 옥타비아 스펜서, 저넬 모네이 / 제작연도 2016년

누가 뭐래도 <히든 피겨스>는 훌륭한 대중영화다.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밝고, 쉽고, 선명한 성공신화인데 중심인물이 흑인 여성 과학자라는 점에서 마냥 익숙하지는 않다. 원작인 논픽션의 작가 마고 리 셰털리가 미항공우주국(NASA)의 뛰어난 과학자들을 취재하던 중 역사에서 ‘숨겨진 인물들’을 발견한 것이 시작점이었다. 영화는 NASA 직원인 캐서린(타라지 P. 헨슨),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 메리(저넬 모네이)를 중심으로, 이들이 흑인이자 여성에게 주어지는 제한을 하나씩 깨부수는 과정을 시원하게 돌파해나간다. 높은 사다리 위에서 복잡한 수식을 해결하는 등 러시아와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승리하고 싶은 미국의 욕망을 채운 것이 걸출한 흑인 여성들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엘리트이자 중산층에 속하는 흑인 여성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의 방식으로 투쟁했음을 알리는, 우리 시대의 매끈한 영웅담이다.

<문라이트> Moonlight

감독 배리 젠킨스 / 출연 알렉스 R. 히버트, 애시턴 샌더스, 트래반트 로즈, 마허샬라 알리, 나오미 해리스 / 제작연도 2016년

<문라이트>는 블랙시네마가 흑인을, 검은 것을, 밀려나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모든 것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 하나의 길을 제시했다.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이 영화는 소년 리틀, 청소년 샤이론, 청년 블랙의 성장기를 세 시기로 나눈 독특한 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배리 젠킨스 감독은 갈망하면서도 갈망을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상태를 감각적인 연출로 묘사한다. 비단 흑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들이 어떤 사회적인 압력과 오해로 주변으로 밀려나는지,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는지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태도가 블랙시네마로서 가능성을 넓힌다. “네가 무엇이 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해.” 현명한 조력자인 후안 역을 맡은 마허샬라 알리의 한마디는 달빛 아래 모든 존재를 푸르게 비춘다.

<겟 아웃> Get Out

감독 조던 필 / 출연 대니얼 칼루야, 앨리슨 윌리엄스, 브래들리 휘트포드, 캐서린 키너, 케일럽 랜드리 존스, 베티 가브리엘 / 제작연도 2017년

“미국 호러영화는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동반한다.” 영화학자 로빈 우드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욕망을 읽어내며 호러 장르의 정치적 함의를 짚어낸 바 있다. <겟 아웃>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만 해도 블룸하우스가 만들어낸 또 한편의 재기발랄한 호러영화 정도로 인식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겟 아웃>에 녹아든 동시대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 그림자가 선명히 부각되며 점점 중요한 영화로 거듭나는 듯하다. 유명 코미디언이기도 한 조던 필 감독은 <겟 아웃>으로 역대 블룸하우스 흥행작 순위 1위라는 기록을 세웠을 뿐 아니라 단번에 주목받는 감독 대열에 합류했다.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친구의 고향집에 초대받으면서 벌어지는 기괴한 이야기는 탈인종주의로 위장된 현재 미국 사회 속 또 다른 은밀한 차별의 시선을 보여준다.

<블랙팬서> Black Panther

감독 라이언 쿠글러 / 출연 채드윅 보스먼, 루피타 니옹고, 마이클 B. 조던, 다나이 구리라 / 제작연도 2018년

태초에 블랙팬서가 있었다. 스탠 리와 잭 커비에가 1966년 첫선을 보인 블랙팬서는 미국 주류 만화계 최초의 흑인 슈퍼히어로다. 급진적인 흑인인권운동단체 흑표당(Black Panthers Party)이 생긴 뒤 잠시 블랙레퍼드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블랙팬서로 돌아왔다. 어쩌면 이 짧은 일화를 통해 상품으로서 ‘블랙팬서’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영화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한 <블랙팬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나 다름없다. 흑인 감독이 연출하고 흑인 배우가 연기하는 흑인 히어로는 2018년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대중영화산업에서 블랙파워의 크기를 각인시켰다. 블록버스터에서 흑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할리우드 주류 문화 내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부수는 효과가 있다. 올해 아카데미가 <블랙팬서>를 작품상 후보로 올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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