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비평①] <생일> 애도의 정서를 나누다
2019-04-17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생일>과 세월호 이후 ‘죄 없는 죄책감’이라는 시대정서 변화의 양상

<생일>을 본 뒤 무엇보다 앞선 궁금증은 이 영화를 본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소감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다. 연락이 닿는 유족들에게 영화에 대한 감상을 여쭸다. 최종 편집본이 나오기까지 2차례에 걸쳐 유족 대상 시사회를 거친 터였다. 단원고 2학년 7반 곽수인 학생의 어머니 김명임씨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 아이들 이야기가 이렇게 드러나도 되는 세상이 됐구나 하는 생각에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웠어요. 위안이 됐지요.” 2학년 7반 정동수 학생의 어머니 김도현씨는 아들 생일 모임을 못 챙긴 게 아쉽다고 했다. “동수랑 친한 친구들이 지금 동수랑 같이 있어서, 참석할 친구가 없을까 봐 생일 모임을 못했어요. 생일 영상은 영화로 처음 본 거예요. 참 예쁘더라고요. 생일 모임 못해준 게 미안하고, 영화가 고마웠어요.” 다행이었다. 이종언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되도록 큰 규모로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의도와 유족의 뜻이 닿았다. 그거면 됐지 비평의 말을 더 얹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비평적 측면에서 <생일>이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느낀다. 포스트 세월호 서사로서 최근 여러 영화들의 기류에 대한 논의 또한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런 까닭에서라도 이 영화와 함께 다른 영화들까지, 그 가치를 좀더 자세하게 기록할 이유 또한 있어 보였다.

죽은 아이들, 그리고 기성세대의 죄인이라는 각성

<생일>의 풍성한 테마 가운데 ‘앎’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 장면부터 꺼내 봐야겠다. 유가족은 살다가 느닷없이 울부짖는다.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으니 5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 순남(전도연)도 그렇다. 그가 문득 통곡할 때 남편 정일(설경구)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뭘 해야 할지 아는 이는 옆집 사는 우찬 엄마(김수진)다. 심리 전문가라서가 아니다. 그간 순남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건 순남을 잠시나마 달랠 약이 전자레인지 위 서랍에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남편이 건넨 물잔을 쳐내던 순남의 울음이 잦아든다. 약봉지에 쓰인 처방 날짜는 2016년 4월 22일. 2주기를 지내고 6일 만에 신경정신과를 다시 찾은 거다. 정일은 자신의 자리가 비어 있는 가족사진 아래에서 겨우 약을 찾아 꺼내고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아내의 약은커녕 집 앞 재활용 분리수거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원망스럽다. 자리를 지켜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정일만의 얘기일까. <생일>은 애도의 뜻은 갖고 있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다수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마음으로나마 자리해야 할 곳은, 상처 입은 이의 곁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이에게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나요.

<생일>을 ‘죄책감’에 관한 영화로 보자면 정일의 입장을 좀더 살펴야겠다. 정일은 그때 감옥에 있었다. 감옥이어야만 했다. 그날 모든 유가족들이 팽목항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울부짖으며 발을 구를 뿐 한 발짝도 옮길 수 없었다. 예솔(김보민)이가 갯벌 체험에서 뗄 수 없었던 그 발걸음이다. 예솔이는 그날 엄마가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이 위태로웠던 일을 눈뜨고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이 과하지 않다. 예솔이는 갯벌에 들어가지 못한 일을 엄마에겐 비밀로 하자고 한다.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하겠다는 부모 심정은 다큐멘터리 <그날, 바다>(2018)의 한 인터뷰에서도 전해진다. “진상규명이 된다고 해서 아이한테 덜 미안한 건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켜주지를 못했잖아요.” 2학년 7반 허재강 학생의 어머니 양옥자씨의 말이다. 진상규명은 부모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일 뿐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는다면서, 재강 어머니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팽목항이라는 감옥에서 죄 없는 많은 이들이 죄책감을 얻었다. 곁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순남과 정일을 옥죄는 자책감은 겉모습에 차이가 있을 뿐 다를 바가 없다. 나아가 ‘죄 없는 죄책감’은 그날 이후 상식 있는 무수한 시민들의 것이 되었다. 기성세대라면 누구랄 것 없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각성이 숱한 이들을 괴롭혔다. 부재해서 몰랐던 자, 딱히 잘못한 것 없는 자의 죄책감은 세월호 이후 시대정서가 됐다.

정일의 얼굴로 시작해 순남의 뒷모습으로 마무리하는 <생일>의 프롤로그는 높은 밀도로 그 정서를 압축한다. 애초 시나리오에선 아들 수호(윤찬영) 또래의 아이들과 예솔이가 뛰어노는 풍경이 첫 장면이었다. 정일의 얼굴이라는 시대의 표정으로 문을 연 선택은 보다 상징적이다. 부재했던 아빠의 귀환과 기다리는 엄마의 앉은 뒷모습, 그런 가운데 비행기 유리창으로부터 드럼세탁기의 투명 창으로 이어지는 프롤로그 속 심상은, 참혹했던 그날 세월호 이미지의 연장이다(세탁기 옆에 앉은 순남의 베란다 장면은 극 중반 한 차례 더 반복된다). 그날 이후 멈춰버린 유족의 시간과 팽목항의 감옥 같은 공간이 베란다에서 맞닿는다. 정지된 시간과 갇힌 공간. 유족들이 여전히 느끼고 있을 대한민국이기도 하다. 순남의 베란다는 그 심정이 꾸역꾸역 눌려 있는 애끊는 시공간이다.

베란다는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그 자리, 베란다에 정일이 서 있다. 수호와의 추억이 깃든 낚싯대를 손질하다 순남이 그랬던 것처럼 집 밖을 본다. 그 뒤 마지막 숏에서 카메라는 베란다, 즉 팽목항의 위치에 서서 집안을 본다. 식구들은 각자 자기 자리로 들어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수호가 돌아왔다는 듯 센서등이 켜진다. 영화는 이렇게 멈춘 시간과 갇힌 공간으로부터 가족들을 꺼낸다. 유족이 거기서 나와 돌아가야 할 곳, 바로 일상이다. 영화가 상상을 통해 해낼 수 있는, 있는 힘을 다한 애도의 방식이다.

영화의 정점인 생일 모임 장면은 ‘앎’의 모임이기도 하다. 실제로 안산의 ‘치유공간 이웃’에서 생일 모임을 한 이유가 그렇다. 당시 모임에 참여한 시인들은 희생 학생의 생전 이야기에 오래도록 귀 기울인 다음 아이들의 목소리로 시를 써 생일잔치 때 공개했다. 장기간에 걸쳐 생일 모임을 준비한 공동체는 아이들에 대해 하나하나 알게 된다. 몰랐던 걸 알게 되기는 부모도 마찬가지다. 떠난 자식을 위해 편지를 써오거나 기억을 꺼내놓는 친구가 누구인지 눈여겨보면서 공동체와 연결된다. 순남처럼 자신의 감옥에 웅크리고 있던 부모들도 조금씩 도움을 받는다. 극중 대사처럼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수호는 눈치가 좀 없어서 친구네 집 음식을 바닥냈고,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날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양보한 뒤 다른 친구를 구하러 물속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는 얘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각자 갖고 있던 기억을 털어놓고 앎으로써 애도를 출발시킨다. 나는 몰랐던 타인의 앎이 모이고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면서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던 애도는 형태를 갖춘다.

상업영화 시스템을 통해 이 이야기가 유통될 필요도 여기서 나온다. 실제 유족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들은, 사정을 아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들이 아니었다. 추모공원이 어떤 곳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알지도 못한 채 공원 조성을 반대했다. 세월호 CCTV가 조작됐을 결정적인 정황이 나왔는데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생일>의 내향적 정서가 죄책감이고 외향적 필요가 앎이라면, 이 영화는 작품의 안과 밖을 잇는 동시에 참사의 사회적 외연을 넓힌다. 현재 언론의 호평을 받고는 있지만 동시대 예술로서 <생일>의 가치는 좀더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 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정서를 통째로 흔든 참사와, 그 곁으로 걸어들어가 1년간 자원봉사하며 이야기를 쓴 감독과, 그리하여 사건 당사자를 타자화하지 않는 작품이 스타 배우의 얼굴과 만나 전국 850여개 스크린(개봉 첫주 기준)에 걸린 현상으로서 <생일>이 지니는 뜻은 생각했던 것보다 폭이 넓다.

‘세월호 이후의 시대정서’에 대하여

지난해 선보인 <살아남은 아이> <죄 많은 소녀> <봄이가도> <영주>에 이어 <생일>과 같은 주에 개봉한 <파도치는 땅>과 <한강에게>, 그리고 3월 잇따라 개봉한 <히치하이크> <선희와 슬기> <악질경찰>까지, 이 많은 작품들을 더불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한데 묶어 ‘세월호 영화’라고 말하려는 건 물론 아니다. 다만 이들 속에 ‘세월호 이후의 시대정서’가 짙어서,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건 평자로서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급한 작품이 10편이나 되므로 계량적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교집합을 추려보려 한다. ‘죄책감’은 이들 10편 모두에서 예외를 찾기 힘든 핵심 정서이자 주제다. 가해와 피해가 얽히면서 인물들은 고통스럽다(<영주> <죄 많은 소녀> <살아남은 아이> <파도치는 땅> <선희와 슬기>). 죽었거나 죽음을 앞둔 자녀 앞에서 부모는 고통스럽다(<살아남은 아이> <죄 많은 소녀> <봄이가도> <한강에게> <파도치는 땅> <영주> <악질경찰>). 물의 이미지에서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살아남은 아이> <죄 많은 소녀> <봄이가도> <선희와 슬기> <한강에게>). 어린 세대는 일찌감치 지워진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며 어른의 책임을 묻는다(<히치하이크> <살아남은 아이> <영주> <악질경찰>).

최근작 위주로 좀더 들어가보자. <폭력의 씨앗>(2017)을 연출했던 임태규 감독은 신작 <파도치는 땅>에서 국가폭력을 보다 폭넓게 다룬다. 문성(박정학)의 아버지는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로 고초를 겪다 임종을 앞두고 있고, 그를 돌보는 은혜(이태경)는 얼마 전 딸을 잃었다. 딸이 어쩌다 죽었느냐는 물음에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억울한 일이 있었어요”란다. 은혜는 문성의 아버지가 서해에서 조업 중 간첩 누명을 쓰게 만든 선장의 손녀다. 문성은 자기 아버지를 간병하는 은혜에게 따진다. “이상하지 않아요? 이게 안 이상해 지금?” 잘못은 명백하게 국가에 있는데 종잡을 수 없는 갈등 속에서 약자들끼리 괴롭다. 인양된 세월호는 목포 신항에 누워 있고,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희생자 가족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 나라의 풍경이라는 듯 스친다. 줄곧 대물림되는 비극들이 해결은커녕 봉합조차 되지 못한 채 꼬리를 문다. 이를 담는 카메라는 종종 인물의 리액션을 숨기거나 그 타이밍을 유예함으로써 해소되지 않는 고통을 전한다.

죄 없는 자의 죄책감은 <죄 많은 소녀>(2017)의 역설뿐 아니라 <한강에게>(2018)에서도 두드러진다. 시인 진아(강진아)는 남자친구와 심하게 다툰 뒤 헤어졌다. 이후 한강에서 사고를 당한 남자친구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주변 사람들의 악의 없는 안부인사에도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힘겹다. “얘가 수영도 잘했는데”라며 한탄하는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죽음 앞에 놓인 아들을 지켜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진아는 세월호 추모 행사에 참석해 “저는 싫은 말이 뭐냐면, ‘걔 운명이 거기까지였던 거야’라는 말이에요”라고 읊는다. 잘못이 없지만 잘못된 결과가 진아를 따라다니며 놓아주지 않는다. <선희와 슬기>(2018)에서는 사소한 잘못이 거대한 비극을 초래하면서 친구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은 뒤 인생을 재설정하려는 고등학생이 나온다. <히치하이크>(2017)의 고등학생들은 자신의 삶보다 부모 세대의 잘못으로 무거워진 짐을 짊어지고 줄곧 표류한다.

끊김 없는 흐름이라고 봐도 될 만한 기류다. 거듭 말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세월호 참사와 무관하게 기획된 작품이 있을 것이며 이를 함부로 묶어 쓰는 일은 영화를 가두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맥락 안에 놓인 듯한 이들의 한결같은 정서를 외면하기도 어렵다. 이와 관련해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왕배 교수의 최근 저서 <감정과 사회>를 참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 교수는 참사를 둘러싸고 권력관계에 의해 강요된 망각의 기제가 움직였지만 우리에겐 ‘감정의 아비투스’, 즉 한국인만의 특수한 감정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짚었다. 그는 망각의 기제가 “세월호 유가족은 물론 시민들에게 ‘가만히 있을 것’을 종용했고, 시민사회운동의 발목을 잡으려 했”으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인 ‘생명’에 대한 메시지, 즉 ‘음습한 적폐’들로 인해 우리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자각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고 썼다. 공감하고 참여하기까지, 혹은 그 이야기를 써내기까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분노와 불안, 고통의 자각과 같은 감정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부당함에 맞서는 연대가 우리 역사에서 면면히 지속돼온 까닭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참사 2년을 전후해 기획되고 만들어지기 시작한 일련의 영화들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잇따라 개봉한 것도, 피에르 부르디외식으로 말하자면 의식에 앞서는 우리 안의 아비투스가 작동한 것이라 해석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5주기를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 8일 자정 현재 <생일>은 <샤잠!>을 제치고 일일관객 1위에 올랐다. 월요일인데도 3만9천여명이 관람해 개봉 6일째 누적관객 40만명을 넘겼다. 이날 기준 <샤잠!>의 스크린 수가 1005개, <생일>은 825개라는 차이를 극복하고 얻은 결과다. 앞서 수인 어머니의 말처럼, 이제 상업 극영화를 통해 전도연과 설경구의 얼굴을 거쳐 전국 멀티플렉스 상영관 곳곳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놓아도 되는 정도는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로서는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그날, 바다>가 연대의 형식이었다면 <생일>은 애도의 방식을 나누고 알게 되는 흥행 사례가 될 것으로 전망해볼 수 있다. 예컨대 수백만명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 흘리고 공감한다고 가정해보면, 전 국민적 상처의 역사가 한국 영화사에 없던 한줄을 쓰는 셈이 된다. 관객이 늘어나면 그만큼 애도의 형태는 구체적으로 손에 잡힐 것이다. 5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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