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상>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많은 기자와 블로거들은 <우상>이 너무나 많은 상징과 은유를 포함한 영화라고, 그래서 이 영화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정말이지 나는 묻고 싶다. <우상>에 상징과 은유가 있다면 얼마나 있고, 또 무엇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지 말이다. 나는 <우상>이 불친절한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지나친 상징과 은유로 인해 어려운 영화로 완성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게 <우상>은 꽤 직선적인 드라마를 가진 영화고, 상징적으로 표현된 그 주제 역시 너무나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영화를 모호성이 내재한 영화, 관객이 이해하기 벅찬 영화로 오인하도록 만든 것일까?
모호성을 오독한 모호성
내게 <우상>의 흥미로운 지점은 작품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여러 평자의 반응이다. <우상>이 개봉하자마자 많은 평자는 이 영화에 뭔가 심오한 것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을 너무 난해한 방식(과도한 상징과 은유)으로 전달하려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러한 지적이 거의 ‘Ctrl+C, Ctrl+V’ 수준으로 대부분의 기사를 차지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모호성’을 오독했다는 입장이다. 달리 말해, <우상>이 갖는 영화적 결함이 작가주의 작품의 주된 경향으로 언급되곤 하는 모호성으로 오인된 결과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반응은 <우상>을 본 관객에게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우상>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심오한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환상, 그것이야말로 작가주의 영화가 구축한 하나의 우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호성이 작가주의 영화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 데는 앙드레 바쟁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바쟁이 말하는 모호성의 전제는 이미지가 아니라 ‘리얼리티의 모호성’에 있다. 그에게 현실의 리얼리티는 정확하게 감각하거나 인식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바쟁의 리얼리즘론을 단선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에게 이미지의 모호성은 단순히 물리적 현실의 리얼리티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객관적이고 설명적 사유로 쉽게 포착할 수 없는 모호한 현실의 리얼리티를 이미지가 담아내려 할 때 발생한다. 그가 영화 형식에서 몽타주보다 미장센과 데쿠파주를 미적으로 높게 평가한 것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상황을 파편화해 미리 계획된 관념 아래 숏들을 배열하는 몽타주 과정에서는 현실의 모호성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수진은 <우상>이 우상에 대한 영화이기보다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 관한 영화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어쩌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각 인물이 어떤 우상을 섬기는가 하는 점보다 우상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다 파멸의 길로 접어든 자들이 그려내는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수진이 그려내려 한 풍경, 또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 비전이 무엇인지 잘 감지할 수 없다. 이는 <우상>이 영화 전체를 조망하는 총체적 시선을 가진 인물 없이, 세 인물의 파편화된 시선으로 얽힌 사건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빈틈이 발생한다 해도, 각 인물의 사연은 꽤 직선적으로 전개된다. 구명회(한석규)는 정치인으로서 생명력을 이어가기 위해, 유중식(설경구)은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최련화(천우희)는 중국으로 추방되지 않고 한국에 체류하기 위해서 악전고투하는 이야기다.
오로지 엔딩을 성립시키기 위한 과잉의 연쇄
어쩌면 <우상>은 총체적 비전이 없다기보다는 그것이 너무 상투적이거나 앙상해서 뭔가 다른 무언가가 있는데, 내가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에 가깝다(아마도 많은 평자가 이 영화를 작가주의적 모호성을 갖춘 작품이라고 오독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영화 엔딩에서 이수진은 구명회의 뒷모습에서 출발해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연설을 듣는 관객의 표정과 반응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수진은 ‘우상이라는 허상’에 붙들린 자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상에 붙들린 관객과 그것에서 분리된 관객. 하지만 자멸과 파멸의 드라마 끝에서 ‘우리가 믿는 우상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라는 상투적이고 원론적인 결론을 만나게 될 때, 이 장면은 그 엔딩은 충격적이기보다는 허망한 쪽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간다. 물론 상투적이라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지옥의 끝에서 우리가 무언가 심오한 주제의 세계와 만날 수 있을 것처럼 파국의 서사를 끌고 간 것 치고는 너무나 빈약한 결말이다.
많은 평자가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우상>은 해석에 대한 욕망, 또는 알고자 하는 욕망을 추동하는 ‘리얼리티의 모호함’이 없는 작품이다. <우상>은 그것이 담아낸 세계가 모호한 것이 아니라, 서사적 비약과 인물의 과잉된 행동, 그리고 자의식적인 이미지의 나열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결함이지 작가주의적 의미에서의 모호성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상>은 서사적 전개 과정에서 각 인물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돌출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갑작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행위의 이유가 관객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평자들(관객)은 이것을 작가주의적 모호성으로 치환한다. 달리 말해,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채워야 한다고 믿거나, 또는 그것이 작가주의 영화의 특성인 양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주의적인 모호성이 아니다. 그저 서사가 빈약할 뿐이다.
최련화가 구명회의 집에 찾아와 벌이는 사건은 어떤 서사적 개연성과 동기를 갖다 붙인다 해도 과잉된 행동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명회가 흥신소 직원을 차로 치어 죽이는 장면이나 유중식이 이순신 동상의 목을 날리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행위들은 극적 발전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동기부여된 것이 아니다. 그 과잉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이러한 행위를 해야 하는 까닭은 단 하나, 앞서 말한 그 엔딩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수진은 “제일 중요한 건 구명회가 활동하는 엔딩 장면이었고, 그 챕터를 완성하기 위해 앞의 수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이수진이 정해놓은 엔딩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그것을 한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미 결정된 운명을 구현하기 위해 주어진 행위를 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인물의 행동에서 모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이는 인물의 행동이 모호한 리얼리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상>의 인물들은 이미 결정된 엔딩이 인물에게서 특정 행위를 이끌어낸다. 그것은 리얼리티에서 파생된 행위가 아니라 단지 비균질성에 불과하다.
<우상>에 어떤 작가주의적 모호성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에는 자신이 본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자기기만’이 내재해 있다. 송경원 기자는 <곡성>에 대한 비평에서 “내가 본 것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 목격한 것을 부정하고 들은 것(소문)에 휘둘리게 하는 것, 말하자면 ‘자기기만’의 과정이야말로 <곡성>을 관통하는 작동 원리다. 이것을 모호함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모호함은 설명되지 않지만 거기에 무언가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일련의 트릭을 걷어내고 난 <곡성>에 무엇이 남겨져 있을까. 적어도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물론 <우상>은 <곡성> 같은 트릭을 쓰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트릭 없이 직선적으로 뻗어나가는 영화에 가깝다. 하지만 이 두편 모두에서 관객의 태도, 그러니까 자신이 본 것 이상의 무언가가 영화에 존재하리라는 환상은 작가주의적 모호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 때문에 발생한다. 어쩌면 <우상>은 관객이 작가주의적 모호성을 하나의 우상으로 삼을 때 어떠한 왜곡이 나타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스노비즘의 허망한 세계
우리는 이제 관점을 이동해 <우상>과 이수진을 하나의 징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 작가주의적 모호성을 하나의 우상으로 삼으려는 태도는 지금의 관객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연출한 이수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오해는 말라. 나는 이수진이라는 한 감독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수진이 <우상>에서 한국 사회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방식이 지난 수년간 한국 (남성)감독들이 보여준 것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200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등으로 대변되는 ‘한국형 작가주의’ 감독들과 함께 시작되었다(또 다른 계열로는 홍상수를 들 수 있지만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이들의 영화는 장르적 대중성 안에서 작가적 개성, 그리고 한국 사회의 리얼리티를 적절히 조화시키며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들 감독의 위상은 대중적 지지와 평단의 지지가 함께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영화는, 그리고 한국형 작가주의 영화를 이끌었던 감독들과 그들의 영화에 영향을 받은 감독들, 또는 그 성공의 규칙을 답습하려는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현실의 리얼리티는 더이상 과거와 같은 존재감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현실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이미 장르와 이종교배되어 원본과 복사본이 뒤섞인 리얼리티, 그러니까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뮬라크르로서의 리얼리티’다. 아니, 어쩌면 장르적 규칙이 이미 리얼리티를 압도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영화에 끌려나온 한국 사회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명분’만 채운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현재 한국영화에서 사라진 리얼리티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 장면 하나하나에 과도하게 나타나는 물신적인 집착이다. 장면 하나하나의 정밀한 세공이 리얼리티의 구현이라 믿는 시대인 것이다. <우상> 역시 한 장면 한 장면에 공을 들인 영화다. 하지만 영화에 담긴 세계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 이미지에 대한 집착은 이미지의 물신화이자 허망한 예술적 제스처에 머물고 만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예술적 스노비즘’이라고 부르고 싶다.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탈역사 시대의 일본 사회에 대해 스노비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에게 스노비즘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 양식을 의미했다. 과시하기 위한 예술적 제스처,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진정성이라는 착각. 나는 <곡성>과 <아가씨>를 거의 같은 시기에 보았던 2016년 무렵에 이런 생각을 했고, <우상>을 보며 그때 한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우상>은 서울 한복판, 한국 사회의 역사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 일대를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으로 그리면서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그것이 이수진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하지만 <우상>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디스토피아적 비전의 구현보다는 그것의 스타일적 표현에 대한 집착이다(조선족 말투에 대한 지나친 집착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지금의 한국영화에서 현실의 리얼리티는 세상과 불화하는 인물을 그려내기 위한 불화의 계기를 제공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국 사회의 리얼리티가 사라졌을 때 인물이 불화하는 세계는 ‘가상의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현실이 가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때, 인물이 세상과 맞서 처절하게 대립하고 싸우고 투쟁하는 행위마저도 의례적인 것에 머물고 만다는 점이다. 인간의 성찰하는 내면은 어떤 결단의 행위 이전에 망설임과 불확실성, 회의와 번민의 우회로를 먼저 거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상>의 인물에게는 이러한 내면이 느껴지지 않는다. 구명회를 보라. 그는 도지사를 향한 별다른 욕망이 감지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한 극단의 행동을 하고, 자신의 잔혹한 행동이나 아들에 대해 특별한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지만 그에 대한 악몽을 꾼다. 내면이 느껴지지 않는 행동은 그저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는 이순신이라는 국가 우상의 목을 날리면서까지 우상에 대한 맹목적 숭배에 빠져 있는 한국 사회를 성찰하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한국사회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달리 말해, <우상>은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의 제스처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성찰하지 못한다. 단지 제스처만 있을 뿐이다. 이는 <우상>만이 아니라 지난 몇년간 한국영화가 한국 사회에 비판적 제스처를 취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우상>은 내면 없는 행동 또는 제스처의 탐닉에 매몰된 한국 (작가주의)영화의 종말을 고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나는 <우상>이 박찬욱에서 시작해 류승완, 김지운, 나홍진 등으로 이어지며, 장르와 작가주의의 경계에서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펼쳐왔던 한 흐름이 이제 텅 빈 제스처만으로 남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봉준호만이 예외적이다). 나는 <한공주>(2013)에서 이수진이 보여준 뚝심을 믿는다. 지금이라도 빈껍데기만 남아 있는 ‘한국형 작가주의라는 텅 빈 우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