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이란 건 있을 수 없다. 오독이 가능하려면 정독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하려는 일은 정답 풀이와는 다르다.” 영화를 글로 옮긴다는 무모하고 지난한 항로에 등대가 되어준 말이 있다면, 허문영 평론가가 슬쩍 건넨 한마디 조언이었다. 얕은 시선과 무지를 들킬까 두려운 나는 지금도 저 한마디 말의 끈을 부여잡은 채 불안을 견디고 영화를 근심하다가, 매번 실패한다. 지금부터 털어놓고 싶은 건 한편의 영화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나 통찰력 있는 시선이 아니다. 그저 사적이고 단편적인 고백, 나는 아직 잘 모른다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바탕으로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자 하는 발버둥이다. 강력한 자장으로 우리를 뒤흔드는 영화를 어떻게, 어디까지 읽어내야 할지 근심해온 한 사람의 실패의 기록이라 해도 좋겠다.
홍상수 영화를 마주할 때마다 도망치고 싶다. 그에게로 가는 길은 늘 무겁고 부담스럽고 어렵다. 이미 여러 차례 고백했지만 나는 홍상수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부끄럽진 않다. 위안 삼아 말하자면 아마도 홍상수 자신도 스스로를 이해한다고 말하진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작가성이란 누가 누구를 얼마나 아는가를 따지는 계량화 작업이 아니다. 작가를 독해하는 일이 온전히 비평의 몫(혹은 욕망)인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대화에 가까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언제나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시간’에 발생한다. 비평의 언어를 허락하는 종류의 영화라는 걸 전제로, 영화가 스크린 위에 안착하는 순간부터 그곳에 다다르고자 하는 관객 각자에게 좁고 긴 오솔길이 열린다. 어떤 장면의 문을 열고, 어떤 길로 들어설지는 철저히 당신에게 달렸다. 다만 그 길은 꽤 외롭고 불안한 길이다. 나 역시 행여 지금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닐까 걱정될 때마다 불안을 달래려는 듯 강박적으로 장면을 쪼개고, 화면을 분석하고, 상징을 찾고, 의미를 찾아낸 뒤 구조를 재배치하는 행동을 반복한다.
때론 직감이 이해를 압도할 때도 있다. 아니, 직감이란 아직 언어로 이해되지 않는 정보들을 몸이 먼저 해석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영화를 말한다는 건 바로 이 직감과 떨림을 언어의 사슬에 묶어 풀어내는 작업이다. 홍상수의 영화들을 줄 세울 만큼 잘 알지도 못하지만 <강변호텔>이 그의 영화 중에서도 유난히 큰 울림을 남기는 작품이란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 격렬한 감정의 물결을 헤쳐나가 하나의 진실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이번에도 기계처럼 장면을 나누고 쪼개고 기록했다. 늘 그렇듯 영화를 보면서 빽빽이 기록해온 필기가 길 잃은 나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안겼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필기된 종이를 몽땅 잃어버렸고 백지처럼 하얀 모니터를 마주하며 머릿속도 하얗게 비어갔다. 그러다 문득 온통 하얗게 덮여버린 눈밭을 걷는 두 여인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가 있던 풍경이 떠올랐다. 하얀 모니터, 텅 빈 머릿속, 경계 없이 흰색으로 가득 찬 설경. 아무 상관없는 체험이 이미지로 이어질 때 영화를 향한 작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달을 보라고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의 무늬만 열심히 들여다본 건 아닐까.
홍상수의 영화를 자르고 쪼개고 이어붙이는 작업들이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최근 작가의 그림자가 유독 진하게 드리워진 몇 편의 영화를 보며 뇌리를 맴돌던 고민들이 번개에 내리꽂힌 듯 한 줄로 꿰어지기 시작했다.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영화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독해해야만 하는가.
작가의 그림자 혹은 무게, 어디까지 읽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 시작해야겠다. 지금부터 언급할 작가의 개념은 1950년대 대두된 작가(auteur)의 사전적 맥락을 충실히 따르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체험과 축적의 산물로 어렴풋이 짐작한 자의적인 테두리다. 따라서 작가와 영화를 묘사함에 있어 다소 추상적인 표현들이 남발한다고 해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어쩌면 이 글에서 언급할 작가의 정의는 그런 추상적인 영역에서 서로의 오독을 허락하는 영화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다. 이제는 해묵은 단어, 이른바 작가성이라는 그림자를 최근 새삼스레 의식하기 시작한 건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8)부터였다. 201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야 말았다. 일상의 시간을 잡아내면서도 지루함을 주지 않는 호흡은 여전히 놀라웠지만 그저 그런 로맨스영화 정도로 받아들였다. 마치 순정만화처럼 맑고 예쁘지만 어딘지 딱딱하고 어색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보는 내내 머릿속 한구석에서 놀라웠던 전작 <해피 아워>(2015)와 비교하고 있었다. 하마구치 류스케라면 이럴 리 없다는 기대가 이 영화를 쉽사리 놓지 못하게 만들었고 다른 평자들의 글을 찾아보도록 이끌었다. 결국 동일본대지진의 집단 체험에 대한 행간을 읽고, 느리고 완만한 숏 사이에 놓인 가능성들에 대한 견해를 접한 후에, 단편적이나마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추상과 일상의 경계에 대한 정보들을 ‘인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완전히 다른 층위의 움직임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의 뻣뻣한 심경은 아직도 눈가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다. 물론 처음부터 단번에 이런 감각들을 받아들인 관객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아사코>가 일정 정도 숙련된 분석의 틀을 기반으로 한 접근 방식을 필요로 하는 영화로 받아들여졌다. 이건 실패인가? 그럴 수 없다. <아사코>는 근본적으로 정답을 요구하거나 지정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기에 거꾸로 질문 속으로 자맥질할 수 있는 깊이가 무한정 열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요컨대 방향이 아니라 깊이의 문제이며 숨을 오래 참고 파내려갈수록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세계를 향한 숨겨진 문이 열린다.
두 번째로 나를 당황케 한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라스트 미션>(2018)이었다. 이스트우드 영화는 이미 영화와 현실, 배우의 경계를 무너트린 자리에서 출발하는 희귀한 영역에 도달했다. 화면에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것만으로 일정 부분 재현과는 다른 결의 리얼리티(그 감각을 리얼리티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획득한다. 정확히는 이스트우드의 육체, 그가 쌓아온 영화와 육체의 흔적들이 하나의 대명사가 된다. 만약 <라스트 미션>과 똑같은 내러티브, 연출, 편집의 영화를 다른 누군가가 연기했다면 나는 이 영화를 가차 없이 혹평했을 것 같다. <라스트 미션>은 ‘오래 살아서 말조심을 하지 않아도 되는’ 노인의 입과 일견 유쾌해 보이기까지 하는 행보를 빌려 많은 것들, 특히 트럼프로 대표되는 저속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아하게 포장한다. 명분이 있는 얼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한 지점의 문제들을 가치 판단의 자리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이스트우드의 얼굴이 더해졌을 때 날카롭게 지적하기 꺼려진다. 왜냐하면 이스트우드는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라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의 지점에서 영화와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 이를테면 영화 근본주의자들(나의 짧은 식견으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은 그런 해석이 가능은 하지만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며 별안간 고개를 돌린다. 어쩌면 나 역시 영화라는 그늘 한구석에서 편하게 피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를 떼어놓고 보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회의에 잠긴다. 요컨대 이스트우드의 주름진 얼굴과 굽은 등이 건네는 고별사에 가슴이 동하면서도 끝난 뒤 머릿속으로는 찜찜한 앙금들이 분리되어 가라앉는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나는 거장의 세월이 안긴 아우라에 굴복하고 만 것일까. 작가가 이미 구축해놓은 세계,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어디까지 분리시키고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먼 길을 돌아왔으니 바로 본론을 꺼내겠다. 내 질문은 이거다. 한국영화에서 작가, 작가성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개념의 사전적 정의가 대중의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을 종합하여 얻은 관념이라면 한국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작가라는 개념은 여전히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작가는 이미 사라진, 혹은 소수의 관객 사이에서만 소통되는 믿음에 불과한 허상일까. 요컨대 나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어떤 영화를 어디까지 읽어내야 하는가. 어쩌면 이건 ‘작가’의 개념이 탄생했을 때부터 부딪쳐온 답 없는 메아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점점 유리되어가는, 아니 그럴수록 점점 깊어지는 영화, 콕 짚어 홍상수의 영화를 보며 새삼 이 해묵은 질문을 꺼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죽음과 삶, 추상과 일상, 영화와 현실의 구분이 의미 없어지는 기적 같은 순간이 이 좁고 아름다운 평면 위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추상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음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아름다움’이란 감정 상태를 영화 속 장면을 근거로 길게 풀어 묘사하는 것이 이른바 비평의 쓸모이겠지만 이 지면의 목표는 아니다. 이 글의 목표는 단 하나, 홍상수의 영화가 여전히 언어로 구체화시키는 게 불가능한(혹은 무의미한) 영역에서 오직 영화라는 상태로만 존재한다는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홍상수의 고양이와 이창동의 고양이
병수(유준상)가 아버지(기주봉)를 찾아다닌다. 같은 공간에 머물지만 서로 다른 차원을 떠도는 것 마냥 넓지도 않은 호텔에서 매번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아버지. 병수는 호텔프론트에서 아버지의 행방을 묻고 직원은 아버지의 방에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호텔종업원은 시인인 아버지와 감독인 병수 모두를 알아보고 팬을 자처한다. 쑥스러움과 어색함 사이 살짝 들떠 보이기도 한 병수가 호텔 문을 나선다. 그 때 문득 고양이 한 마리가 병수가 사라져 가는 길 위로 걸어온다. 얼룩져 더러워진 유리문 너머, 고양이는 병수가 걸어간 길을 찬찬히 따라 걸어간다. 이 순간 카메라는 고양이가 도망가 버릴까 걱정하는 것 마냥 가만히 숨죽인 채 고양이가 사라져 가는 걸음을 조심스레 지켜본다.
<강변호텔>의 고양이 장면을 본 이의 뇌리에는 한동안 고양이 생각으로 가득할 것이다. 저 고양이는 어디서 왔을까. 이것도 연출일까. 카메라는 고양이를 왜 저렇게 오래 잡고 있을까. 고양이의 출현이 이 영화에 어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홍상수 영화에 익숙한 이, 낯선 이 모두 직감한다. 저 고양이가 감독의 통제에 따르거나 계산된 결과물이 아님을. 그래서 짧은 순간의 기적과 우연이 더욱 큰 인상으로 남는다. 고양이의 의미를 생각해봤자 의미가 없다. 그건 거기에 있음으로 해서 다른 요소들에 감흥을 미치는 자연과도 마찬가지다. 홍상수에게 허락된 건 우연히 자신의 프레임에 방문한 고양이를 얼마나 오래 화면에 붙들어두느냐, 얼마나 오래 보여줄까 하는 ‘시간’에 관한 선택뿐이다. 이것은 내러티브 안에 속한 요소가 아니다. 정확히는 고양이의 방문 혹은 침입으로 인해 현실과 재현, 화면의 안과 밖, 진실과 사실, 영화와 실재의 경계가 가볍게 무너진다. 짧은 순간 허락된 하나가 된다는 기적. <강변호텔>은 이 물아일체의 순간을 2차원의 스크린에 최대한 오래 붙들어 두고자 하는 영화다.
홍상수의 고양이를 보며 문득 이창동의 고양이가 떠올랐다. 두 감독이 고양이라는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그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홍상수의 고양이가 존재함으로서 말을 건다면, 이창동의 고양이는 말로서 존재한다. 저기에 고양이가 있다는 온갖 흔적과 증언들은 어딘가에 고양이가 있다고 믿고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도록 꾸민다. “없다는 것을 잊는다는 것, 그런데 잊을 수 없다는 것.”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 텅 빈 기호들. 하지만 우리가 기호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질문할 때 고양이는 종수(유아인) 뿐 아니라 관객 각자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창동의 고양이는 관객을 통해, 관객에 의해, 관객의 거친 후에야 존재를 획득한다. 그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의 이름을 딴 의미의 덩어리다. 홍상수의 고양이는 정반대에 있다. 홍상수의 고양이가 <강변호텔>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묻는 건 무의미하다. 아마도 홍상수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여기서 출발할 것 같다. 이것은 영화라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관한 문제다.
<강변호텔>에 대해 말하기 앞서 오독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자의적인 기준으로 울타리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적어도 감독으로서 홍상수는 같은 작품을 만든 적이 한번도 없다. 스타일과 형식을 놓고 본다면 그렇게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가 영화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중심에 놓고 질문하면 풍경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홍상수의 영화가 가리키는 ‘달’은 근본적으로 반복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모호하다’라고 퉁 치는 감각의 결을 조금 나눠 정리해보겠다. 영화가 내러티브 안에서 답을 얼마나, 어떻게 제시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대략 4가지로 구분해봤다. 첫째, 내러티브 안에 정답이 있는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들은 이야기상에서 명백한 답을 제시하고 깔아놓은 복선들을 충실히 회수한다. 둘째, 답이 있지만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영화가 있다. 감독은 자신만의 명확한 해석과 정답을 가지고 세계를 구축했지만 관객의 열린 해석을 위해 일부러 빈칸과 공백을 만드는 영화들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 대표적으로 <밀양>(2007), <버닝>(2018)이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애초에 정답이 없는 영화들이 있다. 이런 영화들은 내러티브 안에서 의미가 결정되지 않고, 관객이 이미지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각각의 체험과 연결되며 의미를 획득한다. 사진의 리얼리즘을 믿는 이 영화들은 카메라라는 그물망을 쳐놓고 그 안에 어떤 순간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오직 카메라에 포착된 특정 형태로만 존재하는 그 순간은 다시 오지도, 재현될 수도 없다. 이런 영화들이 발생시키는 모호함은 이야기의 결과 내지는 효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여기에 속한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공백을 메울 수 없는데 마치 일부러 메우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는 영화가 있다. 마치 열린 결말과 해석의 문제인 양 관객이 그 애매한 상징들을 적극적으로 메워주길 바라는 영화들이다. 최근작으로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 이수진 감독의 <우상>, 조던 필 감독의 <어스>(2018)가 여기에 속한다고 느꼈다. 마치 ‘거기에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존재감을 발휘하면서도 그 장면의 필연성 같은 건 없는, 어쩌면 영악하고 재밌는 낚시나 오락에 가까운 행위들.
반면 세 번째에 속하는 영화, 그러니까 <강변호텔> 속 장면들은 적어도 감독에게 있어 필연성을 가진다. 그건 감독과 감독의 체험(혹은 전달하고 싶은 무언가)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며 관객은 그 비밀을 탐구하기 위해 스크린이라는 평면 위에 잠시 머물러 간 기적의 시간들과 대화를 시작한다. 영화라는 물질의 도움을 받아 형태를 띤 일종의 얼룩, 빛으로 찍힌 판화라고 해도 좋겠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세계를 평면 위에 구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야기의 방향, 인물의 동선, 흐름, 카메라의 움직임, 대사, 모든 표현의 요소가 감독의 통제하에 있고 바꿀 수 있지만, 실은 그 형태는 이미 철저하게 결정되어 있다. 홍상수라는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고 반응하는가에 따른 자동 반사에 가까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감독에게 주어진 역할은 함부로 재현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카메라를 그물 삼아 그 순간들을 거두어들이는 것 정도다. 아무도 모르게 내린 눈, 백색으로 가득한 화면 위를 사뿐히 걸어가는 두 여인이 마침내 한폭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건 그때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아들 병수(유준상)가 걸어간 길 뒤로 고양이 한 마리가 따라가는 긴 숏을 만날 수 있는 건 그때 마침 고양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찾아온 기적 같은 (삶의)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담아낼 것인가. 홍상수에게 허락된 건 단지 그것뿐이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책 <배가본드>의 대사를 빌리면 “사람이 저마다 살아가는 길은 하늘에 의해 완벽하게 정해져 있고 그렇기에 완전히 자유롭다.”(29권 중 발췌) 언뜻 비어 있고 따로 떠돌며 종종 겹치는 열린 화면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감각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2019년, 홍상수라는 먹먹한 광경을 마주한다는 것
홍상수는 한국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직 숨을 거두지 않은, 세계의 문을 닫지 않은 작가(auteur)다. 작가는 형식과 주제의 일관성이 아니라 관객의 해석과 비평의 언어를 통해 완성된다. 다만 이건 기호와 상징, 의미를 해석하는 독해가 아니라 감각과 반응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화면이 다시 추상의 언어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독과 스크린, 스크린과 관객 사이 관계의 열매가 꽃피고 극장에 불이 들어올 때쯤이면 어느새 소복이 쌓인 대화의 시간을 발견한다. 적어도 현재 한국 감독들 중 홍상수만큼 세계와 영화에 대한 나의 근심을 이끌어내는 이는 없다. <강변호텔>을 보며 문득 먹먹해진 건 홍상수가 죽음의 심연을 응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언저리 그림자에서 쓸쓸히 사그라져가는 비평의 자리를 떠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홍상수의 세계는 갈수록 깊어지지만 그 까다로움이 장벽이 되어 서서히 고립되고 메말라가는 건 아닌지 두렵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저기 평면 위에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무언가 머물러 있다는 것뿐.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각자의 몫이다. 작가 홍상수의 어떤 정점을 마주하며 은밀하게 되뇌어본다. 부디 나의 오독과 실패가 가능한 한 오래 이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