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는 두 청춘이 의문의 가스 테러를 피해 도심을 탈출하는 하룻밤 이야기를 그린 재난액션영화다. 청년 백수 용남(조정석)과 사회 초년생 의주(윤아)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톰 크루즈처럼 비현실적인 액션을 해낼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산악 동아리 시절 배운 클라이밍 기술을 응용해 빌딩 사이를 뛰어넘고 벽을 오르는 그들의 고군분투는 최근 어떤 한국상업영화보다도 탁월한 장르적 재미를 선사한다. 김일연 촬영감독, 채경선 미술감독, 윤진율 무술감독에게 <엑시트>의 제작기를 들었다.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아니다
<엑시트>에는 무찔러야 할 적이 없다. 한 영웅이 백신을 찾아내 지구를 구하는 클리셰도 따르지 않는다. 윤진율 무술감독은 “할리우드식 재난영화를 지향했다면 용남이 벽을 부수고 들어가 화려한 액션을 선보였겠지만, <엑시트>는 재난이 아닌 사람이 중요한 영화”라고 요약한다. 영화 초반 가스 테러의 규모를 보여주는 숏을 찍었지만 편집 단계에서 과감히 버린 것 또한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김일연 촬영감독 역시 “액션도 코미디도 있지만 결국 드라마가 메인이 되는 영화다. 액션 신을 찍을 땐 긴박감을 위해 인물을 따라 카메라도 같이 움직였지만, 너무 과감한 카메라 워킹이나 포장된 듯한 이미지숏은 배제했다”고 전했다. 기존 재난영화와 달리 독가스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거의 묘사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용남과 의주가 방독면을 쓰고 거리로 내려왔을 때 시체들이 주변에 널려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눴는데, 이상근 감독은 이를 배제해야 한다는 확실한 고집이 있었다”는 김일연 촬영감독의 말에서 <엑시트>가 재난과 코미디를 매끄럽게 조화시킬 수 있었던 비결을 엿볼 수 있다.
청년 세대
<엑시트>의 용남은 졸업 후 몇년이 지나도록 취업을 하지 못하고, 컨벤션홀에 취직한 의주는 아르바이트생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 졸업 후 오랜만에 두 사람이 재회하는 ‘구름정원’은 1980년대 서울에서 등장해 작은 시골 읍내까지 급속 확산된 궁전식 예식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채경선 미술감독은 “중세 유럽의 성을 본뜬 듯한 이 외관은 결혼과 서구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이 녹아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포기한 가족애의 이미지를 따뜻하지만 일부러 세련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자는 게 이상근 감독의 생각”이었다고 설명한다. 촌스러운 꽃무늬를 쓴 것도 키치적인 느낌을 살리고자 함이었다. 그 밖에 두 인물이 재난을 헤쳐나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소품 역시 청년 세대가 맞닥뜨린 상황과 연결된다. “가구 전시장에서 침대 매트리스를 던지고 육교 다리를 건너는 신은 결혼을 포기하는 현 청춘 세대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쓰레기 봉지가 가득한 옥상도 역경의 오브제를 의도한 것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으면서 현실적인 공간을 만드는 게 <엑시트> 프로덕션 디자인의 컨셉이었다.”(채경선 미술감독) 영화 곳곳에 청년 세대에게 전하는 제작진의 메시지를 심은 것 또한 <엑시트>의 귀여운 ‘이스터 에그’다.
화려함 말고 현실감
용남의 어머니 칠순 잔치가 열리는 구름정원 컨벤션홀은 서스펜스의 공간으로 변주된다. 용남이 옆 건물로 점프한 후 다시 구름정원 컨벤션홀 벽으로 돌아와 옥상까지 힘겹게 올라가는 신은 <엑시트>에서 가장 긴장되는 시간으로 손꼽힐 것이다. 이 시퀀스는 총 24m 높이의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채경선 미술감독은 “스케일이 작은 소동극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비율을 작게 해서 세트를 제작할까 논의도 했지만, 현실적인 공간처럼 보이는 것이 우선이라 실사이즈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또한 벽을 오를 수 있게 도와주는 외관 돌출부가 아슬아슬 손이 닿지 않을 것처럼 디자인하는 게 포인트였다. “구름정원의 외부는 안전과 클라이밍을 고려해 만들었다. 전문 클라이밍 선수들과 포인트를 잡아가며 세트팀이 적절한 곳에 돌멩이를 박았다. 조형물이 단단하게 부착될 수 있는 공법으로, 울퉁불퉁한 마감재를 썼다.”(채경선 미술감독)
산악 동아리 에이스였던 용남과 의주는 보통 사람보다 몸을 잘 쓰지만, <스카이스크래퍼>(2018)의 드웨인 존슨처럼 고층 빌딩 벽을 자유롭게 타는 액션 스타는 아니다. 때문에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청춘’이라는 기본 설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동작을 구성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윤진율 무술감독은 “실제 배우가 할 수 있는 동작인지 미리 검증하고, 김자비 클라이밍 선수에게도 컨펌을 받으며 동작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탈출 상황에서 활용하는 감사패나 아령 같은 소품도 실제 실험을 거친 후 영화에 넣은 것이라고 한다. “할리우드영화처럼 스케일을 키워서 공중을 날아가면 비주얼은 멋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도 아닌 용남이 10m 이상 멀리뛰기를 하면 관객이 이상하게 볼 수 있다. (웃음) 일반인이 실제로 뛸 수 있는 거리는 5m 정도일 테고 거기에서 1m 정도를 추가해 뛰도록 했다.” 액션의 스케일은 작지만, <엑시트>는 웬만한 대작 블록버스터에 대적할 만한 장르적 재미를 조성한다. 안전장치 위주로만 와이어를 달고 대역 없이 대부분의 분량을 소화한 배우들의 연기가 ‘진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과한 액션을 하는 것보다 정말로 겁을 먹은 배우의 얼굴이 더 중요했다”는 윤진율 무술감독의 말은 <엑시트>의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조정석씨는 몸 쓰는 걸로는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배우일 것이다. 대역도 하지 못하는 동작을 해낸다. 그리고 윤아씨는 전문 선수들도 3~4번 반복하면 손에 피가 날 만큼 힘든 클라이밍 신을 직접 소화했는데, 20m 높이에 실제 매달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주연배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택과 집중
<엑시트>는 촬영, 미술, 무술, CG 파트의 긴밀한 호흡이 요구되는 현장이었다. 15개 세트를 제작해 부분 촬영을 하고 CG로 나머지 부분을 합성하는 과정을 숱하게 거쳤다. 극중 센트럴역과 암길역 인근을 모두 세트로 지을 수는 없으니 로케이션 촬영도 병행해야 했다. 때문에 각 파트의 스탭들이 서로 배려하며 양보할 건 양보했고, 안 되는 것을 빨리 포기하는 미덕이 요구됐다. 채경선 미술감독은 “가령 보습학원 아이들을 구하는 신은 원래 세트 촬영을 염두에 뒀는데, 그렇게 되면 이들을 지켜보는 용남과 의주가 있는 옥상도 세트로 만들어야 했다. 이 부분은 로케이션으로 대체하고 구름정원이나 타워크레인 세트를 만드는 데 예산을 더 쓰자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또한 “연기의 형태에 따라 불필요한 세트 부분은 생략하는 방식으로 세트 제작 단계부터 CG팀과 협업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고. 윤진율 무술감독 역시 “차량을 뚫고 들어가서 벌어지는 큰 액션 신이 콘티에 있었는데, 최종적으로는 빠졌다. 가스 테러 용의자에 대한 구체적인 사연을 다루지 않는 <엑시트>에는 필요하지 않은 신이었다. 이런 곳에 시간과 제작비를 쓰느니 다른 쪽에 투자하는 것이 나았다”고 말한다. 김일연 촬영감독은 크랭크인 당시부터 좋은 예감을 받았다고 전했다. “용남이 구름정원 옥상까지 올라가는 신을 가장 먼저 찍었다. 운용할 수 있는 장비의 높이가 한정적이었고, 크레인으로 올라가면 카메라를 고정해서 찍을 수밖에 없어서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찍을 때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부터 합이 맞아서 프로덕션 전반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대등한 남녀의 케미스트리
<엑시트>는 강한 남자가 약한 여자를 끌고 다니는 그림을 거부한다. 동아리 시절 용남보다 클라이밍을 잘하던 의주는 그에게 먼저 합리적인 방향을 제시할 줄 아는 능동적인 캐릭터다. 때문에 “남자 캐릭터가 과한 액션을 보여주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 오히려 액션을 줄인 부분도 있을 정도”(윤진율 무술감독)라고. 대신 중요해진 것은 두 주인공의 케미스트리였다. “건물 위로 올라가다가, 다른 건물로 넘어간 후 다시 또 건물을 타는 등의 동선이 반복되면 관객이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구해주는 상황도 한두번이면 족하다. 그래서 건물 형태의 특징을 살리고 두 사람의 호흡을 보여주며 동선을 다양화하는 법을 찾았다.”(윤진율 무술감독) 지붕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손을 잡고 뛰어간다거나, 건물 간판을 잡고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 손을 잡고 끌어준다거나, 두 사람이 ‘완등’을 외치며 줄을 타고 넘어가는 신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게 무술팀이 짠 동선 안에서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더해 용남과 의주가 재난을 탈출하는 과정을 ‘미션 깨기’하듯 흥미롭게 완성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