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지 선생님(김새벽)이 은희(박지후)에게 전한 말처럼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죄스러운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마른 눈물자국을 눈물로 지우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이다 보면 세상은 다시 신비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단 말인가.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1994년 10월의 성수대교 붕괴 참사를 서사의 축으로 삼는 영화다. 성수대교 붕괴와 세월호 침몰, 무수한 참사 이후의 세계를 살면서 세상이 아름답다 말하는 건 어불성설 같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유한한 삶을 무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더 깊은 사랑과 더 따뜻한 응시로. <벌새>의 주인공인 14살 은희가 깨지고 배신당하고 상처입지만 다시 상처를 꿰매고 보듬어 전과는 달라진 세상을 달라진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과 관객상을 시작으로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18회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 제45회 시애틀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은 것도 <벌새>가 전형적인 성장영화 그 이상의 의미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희는 1초에 90번까지 날갯짓을 한다는 작지만 단단한 벌새 같은 아이다. 흥미롭게 팽창하는 은희의 소우주는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성과 자본주의사회의 욕망까지 서늘하게 품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명제와도 부합하는 은희의 성장 서사는 결코 팬시한 서정에 머물지 않는다.
<벌새>의 첫 장면은 마치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장르영화의 오프닝 같다. 엄마(이승연)의 심부름을 다녀온 은희가 아파트 초인종을 몇번이고 눌러도 철문 너머에선 응답이 없다. “엄마, 문 열어줘.” 은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은희의 외침이 다급한 구조 요청 같다 느껴질 때 카메라는 서서히 아파트 문의 호수를 비춘다. 902호. 은희는 한층의 계단을 올라가 1002호 초인종을 다시 누른다. 그제야 엄마가 문을 열어준다. ‘사랑받고 싶은 14살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를 생각했을 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오프닝은 아니다. 층수를 헷갈린 은희의 실수는 머쓱함이 아니라 불안함과 연결된다. 끈끈하지 못해 애착하게 되는 불안일까. 가장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공포일까. 닫힌 문 너머 ‘응답 없음’ 이라는 신호 앞에서 은희는 불안하다. 불안, 균열, 붕괴, 죽음의 징후는 은희의 세계를 맴돈다.
삶과 죽음이 경쟁하는 세계에서 기쁜 일과 슬픈 일은 대체로 동시다발적이다. 사랑과 우정에서 비롯되는 기쁨과 아픔도 마찬가지. 학교에서 은희는 우열반 중 열반 학생이다. 떠듬떠듬 영어책을 읽는 수업시간보다 남자친구 지완(정윤서)에게 온 삐삐메시지(1004, 486, 486)를 확인하는 쉬는 시간이 행복한 중학교 2학년. 단짝 친구 지숙(박서윤)과는 한문 학원을 함께 다닌다. 오빠에게 맞고 사는 동생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더 끈끈한 관계다. 1학년 후배 유리(설혜인)에겐 고백까지 받는데, 유리 앞에서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을 부르는 은희는 퍽 어른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인력과 척력의 원칙을 따른다. 좋은 일을 밀어내는 나쁜 일 또한 연쇄적이다. 입술까지 맞춘 지완은 바람을 피우고,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다 지숙과 사이가 틀어지고, 좋아한다던 유리는 떠난 마음을 알린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배신은 아프다. 어떻게 멀어진 사이를 이어 붙일지, 어떻게 깨진 믿음을 봉합할지 은희는 알 수 없다. “어떻게 그 다리가 무너지니”와 같은 탄식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세계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
믿음의 붕괴, 관계의 균열은 집 안에서도 수시로 목격된다. 은희의 부모님은 떡집을 운영하느라 바쁘다. 강남 8학군에 진학을 못한 언니 수희(박수연)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다. 부모님 몰래 학원을 빼먹고 밤늦게 귀가하기 일쑤라 제 집인데도 장롱에 숨어 있거나 동생 찬스를 통해 몰래 집 안을 드나든다. 장차 서울대에 입학할 아들로서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오빠 대훈(손상연)은 은희에게 종종 폭력을 행사한다. 오빠를 편애하는 가부장적 아빠(정인기)와 고된 노동과 살림에 지친 엄마는 밖으로 도는 언니 수희의 교육 문제를 두고 유리갓 스탠드가 깨져라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후배 유리에게 꽃 선물을 받고 한껏 들떠 집에 도착해 싸움을 목격한 은희는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거실에서 TV를 보며 피식거리는 부모님의 모습이 의아하다. 산산조각난 유리 조각의 날카로움이 은희의 몸속엔 아직도 박혀 있는 듯한데,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았던 지난밤의 위태로움은 금세 평범한 어느 오전의 집안 풍경으로 대체되어 있다.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한 은희가 다음으로 하는 일은 환한 햇살 아래 단짝 지숙과 트램펄린장에서 높이높이 방방 뛰는 것이다. 좋은 일을 밀어내는 나쁜 일, 부정적 기운을 밀어내는 밝은 생의 기운. 대립하는 기운의 작용과 반작용, 상반된 운동 에너지의 교차로 은희의 세계는 채워진다. 그것은 곧 세계가 구성되는 방식이고, 영화 <벌새>가 치밀하게 직조된 구조의 영화임을 말해주는 요소이다.
그리고 아직 얘기되지 않은 영지 선생님. 아이러니하고 미스터리하기만 한 세상에서 손잡고 함께 걸어가고 싶은 존재가 은희에겐 영지 선생님이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싸구려 구호를 외치게 하는 학교 선생님과 달리, “공부 열심히 해서 여대생이 돼야 해”라고 말하는 엄마와 달리, 영지 선생님은 이제껏 은희가 어른들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말들을 한다. 얼굴을 아는 친구가 아닌 마음을 아는 친구가 몇이나 되냐고, 함부로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누구라도 널 때리면 끝까지 맞서 싸우라고. 사고를 뒤흔드는 이런 말들에 은희는 어쩌면 이 세상이 신기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하고 느낀다.
귀밑 혹을 제거해야 하는 은희에게 의사 선생님은 말한다. 수술이 성공해도 상처는 남는다고. 그리고 수술에서 깨자마자 은희는 말한다. “제 혹 어디 갔어요?” 은희에게서 떨어져나간 혹은 정말 어디로 갔을까.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텐데. 죽음의 징후 역시 여전히 은희의 소우주를 떠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외삼촌의 방문과 죽음,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 사라져버린 혹, 학원을 그만둔 영지 선생님, 찢겨진 철거민들의 현수막, 성수대교의 붕괴로 이어지는 소멸의 연쇄작용. 뚝 끊어진 철근 덩어리들과 함께 깊이 무너진 마음들. <벌새>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은희의 눈을 통해, 은희를 향하는 눈을 통해 찬찬히 바라본다.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처음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엄마, 붕괴된 성수대교를 보기 위해 새벽길을 달린 은희와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운동장에 선 은희가 여기저기 시선을 두는 마지막 응시의 숏까지. <벌새>의 후반부는 유독 따뜻한 응시의 숏들로 채워진다. 우리가 보았다고, 여전히 보고 있다고 말하려는 듯이. 그 마지막 응시의 숏들을 보며 생각한다. 슬픔은 또다시 우리를 살아 있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