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영화제를 돌며 25개의 상을 받았다. 린 램지, 제인 캠피온 감독 등도 <벌새>에 찬사를 보냈는데, 기억에 남는 평이나 인물이 있다면.
=곧 <벌새>의 무삭제 시나리오, 비평, 대담이 담긴 책이 나온다. 책에도 실릴 예정인데, 앨리슨 벡델의 미국 버몬트 집에서 이틀 동안 대담을 했다. 그때 벡델이, 여자 중학생 이야기를 마치 영웅의 대서사시처럼 만든 영화를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벌새>가 그런 영화였다며 좋아해줬다. 자전적인 이야기로 창작의 세계를 펼친 벡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다니! (웃음) <펀 홈>의 성공이 가져다준 여파라든지, 자전적인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너무 많이 한 것에 대한 후회라든지, 이후에 펴낸 <당신 엄마 맞아?>가 비평적으로 덜 성공했다고 느꼈을 때의 좌절감 같은 것도 들려주었는데, 이야기 나눴던 그 시간이 따뜻했다.
-30대를 다 바쳐 10대 시절의 이야기를 <벌새>로 완성했다. 10대 시절을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했던 이유가 있었나.
=심리학 용어 중에 미해결 과제(unfinished business)라는 말이 있다. 내겐 중학생 때의 일들이 미해결 과제처럼 남아 있다고 느꼈다. 그 챕터와 건강하게 안녕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30대를 바쳤다고 하니 장엄해 보이지만(웃음) 이제 하나의 챕터를 끝낸 느낌이 든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이란 시간적 배경이 중요하다. 이 사건이 당신의 삶에 어떤 파문을 남겼나.
=당시 중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붕괴된 다리의 이미지가 충격적이었다. 단절과 붕괴는 은희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은희의 우주에 계속해서 작은 균열이 생긴다. 그 이미지가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시대의 붕괴, 사회의 붕괴, 일상의 붕괴와도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영화를 통해서는 은희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균열이 성수대교 붕괴라는 물리적 붕괴와 얼마나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야기 구조 안에서 잘 보여주고 싶었다. 시나리오 수정 단계에서 치밀하게 이야기 구조를 고민했다. 예를 들면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과정에서 유리로 된 전등갓이 깨지는데, 깨진 유리 조각을 은희가 소파 밑에서 발견하는 장면을 언제 배치할까 같은 것. 유리가 깨진 건 한참 전이지만 균열의 조각들이, 고함과 부정적 에너지가 유령처럼 집안 곳곳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신의 강약과 리듬을 생각하며 영화의 구조를 직조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의도를 관객이 발견해줄 때 반갑다. 94명의 벌새단 시사회 때 한분이 그런 평을 남겼다. ‘이렇게 따뜻하면서도 불안한 영화는 처음이다.’ 실제 내 의도가 그랬다. 불안하고 서늘한 것과 따뜻하고 희망적인 것이 동시에 있길 바랐다.
-은희가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이 영화에 두번 나온다. 첫 장면에서 집을 잘못 찾은 은희가 문을 두드리면서 엄마를 부르는 장면과 길거리에서 엄마를 부르는 장면. 두번 다 은희의 외침이 엄마에게 가닿지 못한다.
=그 장면에선 엄마로 상징되는 본질적인 것, 가장 가닿고 싶은 존재로부터 멀어지는 것의 공포와 심연을 그리고 싶었다.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는 원형적 공포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니더라. 영화에서 은희가 가장 갈망하는 것 중 하나는 엄마와의 연결감이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은희가 겉돈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엄마는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유심히 바라본다. 엄마는 딸한테 큰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안다. 은희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촬영 현장에서 재밌는 일도 있었다. 은희가 길에서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촬영 장소가 아파트 단지였다. 어디서 계속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나니까 동네의 아주머니들이 굉장히 불안해했다고 한다. 혹시 자기 딸은 아닌가, 누구 집 딸이 이렇게 엄마를 부르나 싶어서. 엄마라는 소리에 반응하는 엄마들이 그렇게 있었던 거다.
-5남매의 가족, 떡집을 했던 부모님, 대치동에 살았던 일, 목 뒤에 혹이 나 수술한 일, 한문 학원에서 만난 선생님 이야기 등은 본인의 경험에서 가져온 요소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어렵지 않았나.
=모건 스콧 펙이라는 심리학자의 책에 ‘날마다 나르시시즘의 싹을 잘라내야 한다’는 문장이 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걸 적용하려 했던 것 같다. 내가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은희의 고통이 내 것이고 내 고통이 가장 아프다 생각했다면 영화는 지금과 달랐을 거다. 은희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고통이고, 나의 고통은 특별할 것도 없고 특별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건강한 거리두기가 가능해지자 픽션으로서의 내러티브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친밀한 대화도 많이 가졌고,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간들을 정리하고 화해했다. 이 일이 내겐 커다란 삶의 선물이었다. 미해결된 감정, 뒤틀린 감정이 남아 있었다면 은희를 피해자로 그리거나 연민의 시선으로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관계를 돌아보는 작업이 수반됐기 때문에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작가로서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한문 학원의 영지 선생님(김새벽)의 경우 개인적 이야기가 생락되어 있다. <잘린 손가락>이라는 운동권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대학생일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영지 방의 책이라든가, 영지가 부르는 노래라든가, 드문드문 단서로만 영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잘린 손가락>은 강성 운동권의 노래인데, 노래만으로도 캐릭터가 보일 수 있게 선곡했다. 그 장면에선 아이들도 느끼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내게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면 동화되고 마음을 열게 된다. 영지는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위로한다. 누군가가 나눠주는 진심에 아이들도 위로받고, 영지란 사람을 목격할 수 있길 바라며 노래하는 장면을 넣었다.
-영지 선생님의 대사에 본인의 마음을 담은 것 같다. 어른이 된 내가 과거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혹은 10대의 여자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같았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쓸 때 영지에 빙의하고 썼다. 성인이 돼서 느낀 많은 것들이 영지의 대사로 나온 것 같다. <명심보감>의 문장이라든지, 삶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말이라든지. 어렸을 땐 ‘삶이 아름답다’같은 말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사랑? 웃기고 앉아 있네. 그런 20대였으니까. (웃음) 나이가 들면서 사랑의 존귀함을 깨닫고, 삶이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단순히 내 삶이 행복하다는 게 아니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무늬가 결국엔 아름다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영지의 말을 통해 하고 싶었던 건 크게 두 가지였다. 10대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 10대 시절을 지나온 무수한 은희에게 보내는 위로. 또 하나는 어른이 된 내가 은희였던 나를 위로하는 것.
-<벌새>에서 세월호 참사를 읽는 이들도 많다.
=2013년에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고, 수정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마음이 아팠고 몸이 아팠다. 어떤 기시감도 들었다. 성수대교 붕괴의 충격이 몸의 기억으로 남아서 내가 <벌새>를 만들었듯이, 세월호 참사를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들이 창작자가 돼서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 거대한 공동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치유될까 싶으면서도, 시간이 흐르고 이야기를 통해 기억함으로써 희망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세대의 여성감독이고 10대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우리들> <우리집>을 만든 윤가은 감독과 나란히 얘기되는 경우가 많다.
=스타일이 다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성감독이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소수자일수록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비교되거나 묶여서 얘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많이 나왔는데도 여성감독들의 영화로 한데 묶여서 얘기된 것처럼. 그리고 <우리들>은 내게 블록버스터영화였다. 영화의 자장이, 감정의 스케일이 거대했다. 마침 여성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윤가은 감독의 다음 영화 <우리집>과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 이옥섭 감독의 <메기>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을 한다. 그런 흐름 속에 내 영화가 있다는 것이 기쁘고, 거대한 각성의 물결이 일어나는 해에 국내외 영화제에서 영화를 상영한 것도 고무적이었다. 그 물결을 같이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지지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