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호가 들어오자 서먹서먹했던 스튜디오는 갑자기 시끌벅적거렸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후배 배우들을 챙기는 모습이 영락없는 영화 속 박기헌이었다. <모비딕>(2011), <목격자>(2017) 등 전작에서 그랬듯이, 그가 연기한 박기헌은 경찰이라는 직업윤리에 충실한 범죄 정보과 형사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많지 않지만, 정보원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태도와 여유에서 정보경찰로서 그의 삶과 경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
=이 영화의 장점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버겁지만 끙끙거리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잘 만든다면 관객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모비딕> <목격자> 등 전작에서도 여러 차례 형사 역할을 맡았는데, 박기헌은 어떤 점에서 새로웠나.
=전작에서 맡았던 형사나 경찰이 칼을 칼집에 숨겨둔 인물들이라면, 박기헌은 칼을 밖으로 내놓은 인물이었다. 그 점에서 흥미로웠다.
-베레모를 쓴 채 정보원을 노련하게 관리하고 대하는 모습이 거친 이미지를 가진 일반 형사와 다르던데.
=촬영 전, 감독님이 “수염 깎으시죠”라고 말씀하셨다. “왜요?”라고 묻자 박기헌은 “현장에서 범인을 잡는 강력반이 아니라 정보수집이 주요 업무”라고 말씀하시더라. 정보수집 업무는 튀면 정보원들의 눈에 띄거나 수사에 차질을 빚게 된다. 그같은 직업적인 ‘평범’함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캐릭터를 준비했다.
-박기헌을 포함해 그간 직업윤리에 충실한 형사를 많이 연기해오지 않았나. 많은 감독들이 배우 김상호 하면 정의롭고 윤리적인 캐릭터를 먼저 떠올리나보다.
=아무래도 내가 착하게 생겼고…. (웃음) 정의롭든 그렇지 않든 얼마나 매력적인 캐릭터인가가 관건이다. 박기헌은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거다. 이야기에서 그의 현재 모습을 보고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촬영 전, 감독님과 함께 박기헌의 전사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도 그래서다.
-사람을 여유롭게 대하는 면모도 촬영 전에 감독님과 상의해 내린 결정인가.
=그런 면모가 본능적으로 나오는 건 아니지 않나. 앞서 얘기했듯이 그는 칼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뭘 가지고 있는지 잘 안다. 자신이 가진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하지 않는다. 장사를 했다면 칼이 썩었을 것이고, 칼이 썩으면 여유를 가질 수 없다. 그처럼 나 또한 배우로서 늘 스스로에게 엄격하려고 한다. 그래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질문을 하자면,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야키니쿠 드래곤>의 주인공 용길은 힘든 상황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인 캐릭터였다.
=당시 정의신 감독으로부터 용길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용길이 너무 서러웠다. 되게 여리고 약한 사람인데, 고향 제주를 떠나 도쿄에 와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변화한 사람이다. 일본에 가서 한달반 정도 찍어야 하는 이야기라 처음부터 잘해내겠다 같은 도전보다는 일본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적응을 잘하자, 작품에 폐를 끼치지 말자, 라고 생각했다. 촬영하면서 몸이 풀리고, 일본 배우들과의 호흡이 잘 맞아가면서 조금 더 하면 되겠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주지훈과 호흡이 좋더라.
=공포스럽고 위험한 촬영이 많아 만만치 않았지만 김성훈, 박인제 감독, 김은희 작가와 함께 작업해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다. 오늘(8월 13일)이 마지막 촬영이고, 내일모레 쫑파티다.
-K리그에 속한 수원삼성블루윙즈(이하 수원삼성)의 열혈 팬으로 유명하다. 올 시즌 수원삼성의 성적이 다소 아쉬운데. (웃음)
=항상 봄날이 있을 순 없다. 응원하는 팀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아내와 아이들과 축구장에 가서 함께 응원하고, 시합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문화를 만들려고 한다. 축구장에 다녀와서 시합 얘기를 하면 되게 재미있다.
-올 시즌 수원삼성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인가.
=등번호 90번을 달고 뛰는 구대영 선수. 영리하고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다. 연기도 비슷하다. 주인공이 1시간30분 내내 얼굴을 비치면 관객이 지친다. 그럴 때 나 같은 조연배우가 등장해 서사를 함께 끌고 가야 관객이 감상하기 수월하다. 오랫동안 연기해오면서 연기가 어떤 건지 다 안다는 건 무리가 있지만,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언제나 기댈 데가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