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배급이다. 2019년을 3개월 남겨둔 현재까지 CJ엔터테인먼트(이하 CJ)는 브레이크 없는 독주를 하고 있다. 설(<극한직업>의 1626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 여름(<엑시트>의 941만여명), 추석(<나쁜 녀석들: 더 무비>(448만여명) 같은 성수기 시장뿐만 아니라 2월(<사바하>의 239만여명), 5월(<걸캅스>의 162만여명, <기생충>의 1008만여명) 등 비수기까지, 내놓은 거의 모든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흥행했다. 천만 영화도 무려 두편이나 된다. 11월 개봉하는 <신의 한 수: 귀수편>과 겨울에 공개될 <백두산> 등 남은 라인업이 크게 찬물을 끼얹지 않는 이상 CJ가 올해 총 관객수 5천만명을 동원하는 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백두산>마저 겨울 시장을 차지한다면 설, 여름, 추석, 겨울 4대 성수기 시장 모두 석권하게 된다. 한 배급사가 성수기 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5천만 관객을 불러모은 건 전무후무한 일이다. 가령 지난 2014년 CJ는 <수상한 그녀>(설), <명량>(여름), <국제시장>(겨울) 모두 흥행했지만 추석에 개봉한 <두근두근 내 인생>(162만여명)이 아쉽게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바 있다.
불경기에는 코미디?
설에는 역시 코미디였다. 샴페인을 터트리기 전에 CJ가 올해 배급한 라인업을 다시 살펴보면, <극한직업>(코미디, 형사)과 <엑시트>(재난, 코미디) 등 두편은 충무로의 오랜 배급 전략을 다시 입증했다. 특히 <7번방의 선물>(코미디, 휴먼 드라마), <검사외전>(범죄, 코미디), <수상한 그녀>(코미디) 등 역대 설 영화 박스오피스 2위부터 4위까지 모두 코미디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극한직업> 또한 설에는 코미디가 먹힌다는 정설에 설득력을 더했다.
지난해 CJ가 올해 라인업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한 코미디 장르 세편을 설, 여름, 추석 성수기 시장에 배치한 건 계산된 전략이다. <기생충>과 <나랏말싸미> 정도를 제외하면 일반 관객이 생각하는, 제작비 규모가 큰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없고, 지난해 하반기부터 흥행한 코미디 장르 또한 없으며, 코미디의 유효기간이 추석까지라고 보고 내린 판단이다. 한 대형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그 점에서 NEW가 5월에 배급한 <나의 특별한 형제>(드라마, 코미디)가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맞붙어 147만여명을 동원한 건 만족스러운 성적은 아니지만 나름 선전한 셈”이라고 얘기했다. 또, 코미디는 아니지만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가 끝나자마자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비결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특수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배급 업계에선 "원래 봉준호 감독의 관객 동원력이 800만명 정도 된다. 황금종려상 수상은 흥행에 약간의 영향을 끼쳤을 뿐”이라는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사실 올해 극장가에 불어닥친 코미디 바람의 시작은 새해가 되자마자 개봉한 <내 안의 그놈>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191만여명을 불러 모으며 흥행할 줄 예상한 영화인들은 많지 않다. 한 제작자는 “완성도가 높지 않은 영화인데도 사람들이 낄낄거리는 광경을 보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며 “그 뒤 개봉한 <극한직업>이 무려 1600만여 관객을 동원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코미디 ‘버프’(바람)를 제대로 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CJ엔터테인먼트가 올해 배급 성적이 좋은 건 시대와 조응할 수 있는 라인업들을 전면에 배치한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코미디 장르가 관객에게 제대로 주효한 올해 산업 분위기를 두고 “삶이 팍팍하니 웃고 즐길 수 있는 영화만 찾았다”고 해석하는 건 무척 게으르다. 특정 장르가 주기적으로 유행하는 건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씨네21> 1190호 특집 기사 ‘2019년 한국영화, 위기인가’에서 보도된 대로, 올해초만 하더라도 한국영화는 산업 안팎으로 난관과 침체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추석 성수기 시장에서 <물괴> <명당> <안시성> <협상> 등 한국영화 4편이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누구도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두달이 지난 지난해 겨울 성수기 시장에서도 <마약왕> <스윙키즈> <PMC: 더 벙커> 등 한국영화 세편이 손익분기점조차 넘기지 못했다. 성수기 시장의 연이은 한국영화 참패를 두고 위기 전조 현상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최저임금제가 시행되면서 막내 스탭 인건비가 오르고, 그에 맞춰 전체 스탭들의 인건비가 덩달아 상승하는 등의 이유로 제작비도 전년도에 비해 50% 이상 올랐다. 그러면서 손익분기점이 훌쩍 뛰어올라 흥행에 대한 부담감이 커졌다. 무엇보다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사업자가 국내 시장에 안착하면서 극장과 안방,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무너지는 등 영화 관람 방식이 다양해졌다. 그러면서 관객이 선호하는 이야기가 까다로워지고, 눈높이가 더욱 높아졌다.
코미디 붐 그 이상의 터닝 포인트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빨간불이 켜질락 말락 하는 침체 상황에서 <극한직업>과 <엑시트> 등 코미디영화 두편의 흥행은 한국 영화산업이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코미디는 대체로 산업이 어떤 방향으로든 전환되는 시기에 유행하는 법이다. 요즘은 코미디영화 한편의 순제작비가 60억원을 웃돌지만 그럼에도 액션, 사극, 블록버스터에 비해 제작비가 적게 들면서 관객을 부담없이 불러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리스크로 최대의 관객을 불러모을 수 있는 경제적인 장르라고나 할까. 송효정 쏠레어파트너스 수석심사역은 “창투사 입장에서 봤을 때 두 영화가 흥행한 건 캐스팅 파워(배우 패키지)가 아닌 캐릭터의 호감 덕분인 것 같다”며 “제작비가 크지 않더라도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고, A급 배우가 아니어도 이야기만 재미있으면 흥행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제 코미디 바람은 끝났다. 블록버스터를 보고 싶어 하는 시기”라는 한 배급 관계자의 전망도 있지만, 늘 그래왔듯이 코미디 장르가 유행처럼 쏟아져 나올 움직임도 배제할 수 없다. 한 프로듀서는 “이미 휩쓸고 지나간 장르인데도 ‘따라쟁이’들이 따라하는 분위기가 있긴 하다. 대기업 투자·배급사들로부터 투자받을 수 있는 허들(기준)이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코미디 바람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유행 따라하기를 경계해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장원석 BA엔터테인먼트 대표는 “한 장르가 히트를 치면 후발주자들이 그 장르를 쫓아가는 순간 유행은 이미 지났다. 이럴 때일수록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기획들을 내놓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한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임원은 “유행을 따라 만드는 쏠림현상이 이번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관객의 눈높이가 높아진 만큼 영화의 완성도가 관객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즉각적으로 시장에서 버림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올해 충무로에 불어닥친 코미디 바람은 충무로가 달라진 관객의 입맛을 찾는 데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까, 아니면 내년에도 비슷한 장르를 양산하는 계기가 될까. 무엇보다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선 한국 영화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이 질문들은 2020년 한국 영화산업을 전망하는 데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