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IT 기업의 행보가 거세다. <씨네21> 1223호 국내뉴스 ‘카카오M, 콘텐츠의 제왕 될까?’에서 보도된 대로, 카카오M(대표 김성수)이 사나이픽처스와 영화사 월광의 지분을 인수해 영화 제작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자회사 메가몬스터를 설립해 <붉은 달 푸른 해> <진심이 닿다> 등 드라마를 제작해왔고, 지난 1월에는 BH엔터테인먼트, 제이와이드 컴퍼니, 숲 엔터테인먼트, 레디 엔터테인먼트 등 매니지먼트사를 인수합병해 눈길을 끌던 차다. 9월 30일 발표된 공시에 따르면 카카오M은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688억원 규모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했고, 현빈, 이민호, 박서준 등 배우들이 참여했다. 카카오M을 포함한 많은 IT 기업들이 콘텐츠 제작에 열을 올리면서 카카오M 또한 배우들을 확보하기 위해 입도선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콘텐츠 기업들간에 거대 규모의 치킨 게임이 시작된 셈이다. 이들의 경쟁은 올해 초 신생 투자·배급사들이 충무로에 뛰어들면서 일찌감치 시작됐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는 <악인전> <변신> 두편을 배급하며 산업에 안착했고, 메리크리스마스 또한 <양자물리학>을 배급해 개봉 2주차에 접어든 10월 1일 현재 43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동원하고있다.
신규 자본이 영화산업에 투자를 꺼리는 이유
늘 그렇듯이 신규 자본 여럿이 영화산업에 뛰어든 산업 상황은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기는커녕 혼돈의 연속이다. 시장은 더이상 성장할 수 없는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제작비 100억원 이상이 투입된 영화들이 많아지면서 모두 성수기 시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성수기 시장에 들어가지 못한 몇몇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에 개봉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손익분기점을 넘기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돈> <악질경찰> <우상> 같은, 총제작비가 80억원이 넘는 한국영화 세편이 전통적인 비수기인 올해 3월 넷쨋주(12주차)에 뛰어들어 출혈경쟁한 상황도 이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고 성수기 시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흥행할 확률이 높았던 과거와 달리 지난해 추석부터 올해 추석까지 성수기 시장에 뛰어든 한국영화의 상당수가 흥행의 쓴맛을 본 걸 감안하면 대마불사는 확연히 꺾였다.
인수합병을 통한 몸집 불리기, 신생 투자·배급사 설립 같은 움직임이 활발한 반면, 제1금융권을 포함한 신규 자본의 영화 투자는 미지근하다. 특히 현재 제1금융권의 영화 투자는 IBK기업은행과 우리은행 정도다. 제작 진행에 관여하지 않고, ‘대출’이 아닌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하는 까닭에 많은 영화인들이 제1금융권의 투자를 선호하지만, 두 은행을 제외한 나머지는 영화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 여러 창투사들은 “현재 한국 영화산업에 관심을 적극적으로 보이는 신규 자본은 없는 상태”라고 전한다. 그런 상황에서 중·저예산 한국영화 투자에 주력하는 쏠레어 스케일업 영화투자조합 1호가 결성된 건 반가운 소식이다. 결성금액이 총 193억원인 이 투자조합은 창투사 쏠레어파트너스(대표 최평호)가 위탁 운용하고, 한국 모태펀드, 메가박스 중앙,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메리크리스마스, 스튜디오 썸머, 리틀빅픽쳐스, KTH, TCO가 출자자로 참여한다.
신규 자본이 영화산업에 투자를 꺼리는 이유가 몇 있다. 단순한 이유로는, 지난해 추석과 겨울 성수기 시장에서 총제작비가 100억원 이상 투입된 영화들이 흥행에 참패해 한국영화 위기설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한 제작자는 “제작비 규모가 큰 영화에 투자해야 수익을 챙길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큰 영화들이 연달아 힘을 쓰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투자자로선 당장 투자를 서두를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투자·배급사 임원은 “제작비 상승, 제작 편수 증가 등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는 확률은 점점 낮아지면서 수익률이 높지 않은 것도 관련 있다”며 “요즘은 흥행이 극과 극이다. 아주 흥하거나 아니면 ‘쪽박’이거나. 그래서 중간 규모(200만~600만 관객)의 흥행이 실종된 건 큰 문제”라고 보았다. 2019년 10월 초 현재까지 중간 규모의 흥행작은 6편(<사바하> <증인> <말모이> <악인전> <돈> <봉오동 전투>)에 불과하다. 이중에서 손익분기점을 넘은 영화는 <증인> <말모이> <악인전> <돈> 등 단 네편에 불과하다(<사바하>는 IPTV 등 2차 부가판권시장에서 올린 수익까지 더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겼다.-편집자).
무엇보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양질의 자본이 영화산업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로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를 꼽는 목소리도 많다. CJ, 롯데, 쇼박스, NEW 같은 메인 투자사들이 투자조합(펀드)을 결성해 자금을 조달하는 현재 방식에서 부분 투자자들이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는 선택이 많지않다는 게 문제다. 한 창투사 관계자 A씨는 “보통 메인 투자사가 자사의 라인업 몇편을 패키지로 묶고 투자를 받는데 그런 방식은 (부분) 투자자에게 자본을 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한정적”이라며 “시나리오를 읽고 흥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찾아 돈을 자유롭게 투자하고 싶은데 현재 산업구조에선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A씨는 “메인 투자·배급사 입장에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방식을 진행하는데 그게 싫다면 영화가 기획되는 시점에 제작사를 투자하는 방식도 있긴 하다”며 “다만 기획 시점에서 투자를 하는 건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제작자 B씨는 “양질의 자본이 들어오게 하려면 메인 투자사가 전체 투자액의 30%를 자신이 정한 규칙대로 조달하고, 운용하되 나머지 70%는 부분 투자자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익배분 구조 재검토도 필요하다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 영화시장에만 존재하는 6:4 수익배분 구조 또한 신규 자본이 영화 투자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라는 지적도 있다. 제작자의 지분이 인건비 혹은 외주 제작비로 책정돼 수익배분을 따로 하지 않는 할리우드나 중국과 달리 한국 영화산업은 투자사와 제작사가 극장 수익을 6:4로 배분한다. 창투사 관계자 C씨는 “<극한직업> <기생충> <엑시트> 등 최근의 대박 흥행을 고려하면 영화산업과 관련된 자본 외에 금융자본들도 이 산업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막상 투자 수익을 산정해보면 생각만큼 짭짤하지 않다. 제작자가 가져가는 제작지분 40%로 인해 총극장 매출 대비 순수 투자수익률이 낮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제작자 B씨 또한 “6:4 수익배분 구조는 없어져야 한다는 의견에는 큰 이견이 없다”며 “그렇다고 한국의 산업 규모와 구조를 고려했을 때 할리우드나 중국 같이 프로덕션피(외주 제작비)를 받는 방식은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기획부터 상영까지 스튜디오가 도맡는 할리우드와 달리 한국은 여전히 직접 기획해 시나리오를 내놓는 제작자들이 많다. 계약 내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프로덕션피가 제작비의 5%라고 한다면 1억달러(할리우드)의 5%와 50억원(한국)의 5%는 금액이 완전히 다르지 않나. 제작사 지분 40%는 기획비, 시나리오 개발비까지 포함한 금액”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B씨는 “프로젝트 진행 방식과 내용에 따라 6:4 수익배분 구조와 프로덕션피를 결정하는 계약 방식이 필요하다. 한국 영화산업에선 두 가지 방식 모두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신규 자본은 늘 양날의 검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장에 안착하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시장의 경쟁을 격화시켜 시장이 흔들리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현재 상황에서 지난해 이미 들어온 신규 자본이 영화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좀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양질의 자본이 더 들어올 수 있도록 기존의 자금 조달 구조를 한번 살펴볼 시기인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