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는 것을 구태여 말하고자 하는 것. 세상 모든 이야기는 그 부질없는 작업을 향한 고달픈 몸부림에 가깝다. 한편으론 작가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답은 의외로 그 허망하고 애처로운 작업에 얼마나, 어떤 식으로 매달리는가에 달린건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음에도 굳이 말하고 싶어지는 것, 아니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걸 발견할 수 있는지가 작가의 색깔을 결정짓는다. 윤해서 작가의 <0인칭의 자리>는 바로 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탐색해나가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카메라 속 어머니의 눈에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한 남자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것을 찾아다닌다. 남자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눈빛을 프레임에 담아내는 작업을 통해 어린 시절 자신이 갈구했던 눈빛의 비밀을 탐구한다. 하지만 윤해서 작가는 그 지난한 과정을 정돈된 설명과 가지런한 사건의 연속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이야기는 정체를 알기 힘든 화자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에피소드가 흩어진 섬처럼 파편화되어 넓게 펼쳐져 있다. 때문에 기존의 전통적인 읽기 방식으로는 이 책의 의미를 파악하기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 자체가 사라진 문장들 사이에서 독자 역시 필연적으로 헤매고 방황하기를 강요받는다. <0인칭의 자리>는 화자의 자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점묘화처럼 제시한다. “어떤 나도 하나는 아닌데”라며 1인칭을 거부하는 작가는 시점을 수시로 바꾸는 형식을 통해 이른바 ‘타자(他者)되기’와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자극적인 소재의 전시 혹은 사탕발림 같은 공감에 집착하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요즘, 이 정도로 과감하게 언어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자세는 그 자체로 인정받을 만하다. 문장 사이의 공백, 행간의 의미를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화답하는 사이 각자가 서 있는 위치, 정해져 있지 않아 더욱 풍성해지는 ‘0인칭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 인칭일까
생각은. 몇 인칭으로 이루어지나. 생각은 1인칭, 2인칭, 3인칭을 넘어서. 생각은 수십 인칭, 수만 인칭이 되기도 하는데. 137인칭이 되었다가 8인칭이나 17인칭이 되기도 하는데. 인칭에 숫자를 매기기 시작한 건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나’는 언제부터 1인칭, 하나였을까. ‘나’에 대해 말하는 ‘나’는 어쩌다 하나뿐인 1인칭이 되었을까.(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