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59년생 김영수’ 정도 되지 않을까요.” 이얼 배우는 김지영의 아버지 영수의 얼굴을 그렇게 그려 보았다. 버스정류장의 치한을 피하려면 ‘네가 몸조심해야 한다’고 하고, 딸은 시집 가면 그만이라고 하고, 아들이 좋아하는 빵은 알아도 딸의 식성은 모르는 아버지. 지영의 아버지이자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나고 자라고 사고하고 행동했던 중년의 남자. 영수가 건네는 자신의 상식 안에서의 ‘악의 없는’ 행동들은 그러나 차곡차곡 이 땅의 지영이들에게 마음의 골을 만들어냈고, 영수 역시 뒤늦게나마 조금씩 자신의 행동을 깨달아간다. 이얼은 <82년생 김지영>이 이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대립하게 만드는 구도가 아니라, 서로 한번 지금까지의 과정들을 생각해보자고 말을 건넨 영화 안에서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열어주는, 그래서 이 영화 속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한몫을 해내고 있다.
그런데 스튜디오 앞에서 만나 인사를 건네는 순간부터 배우는 손사래를 치기 바쁘다. “제가 뭘 많이 했다고… 인터뷰에 불러주시고.” 하지만 그 역시 300만 관객 동원을 앞둔 이 영화에 힘을 실어준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원작에서는 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캐릭터였다. 그런데 감독님과 함께 그렇게 가지 말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의 캐릭터 하나하나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가해자, 피해자로 놓지 않고 입장의 차이를 그려 나간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 박수를 보내주시는 것 같다.” 영수가 가진 미묘한 톤을 표현하는 것은 그래서 배우에게 더없이 큰 과제였다. 캐릭터가 가진 태도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만들려는 매 장면의 노력이 이렇게 ‘가장 보편적인 시대의 얼굴’을 한 대한민국 가장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얼이 ‘지영의 아버지’로 영화에 참여하게 된 건 배우 정유미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라이브>에 같이 참여한 정유미가 김도영 감독에게 “너무 편하고 아빠 같은 분”이라며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내비쳤다. 정유미 배우에게 아빠 같은 편안함을 보인 그는, 지금도 정유미 배우를 언급할 때는 무심결에도 ‘지영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감이 쌓인 현장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그 친근함의 바탕에는 64년생인 중년남성으로서 그의 평소 모습도 영향을 미쳤다. “나도 딸 둘에 아들 하나 키우고 있는데, 딸과 아들을 모두 키우다보니 영수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딸이 영화를 봤는데, 다행히 잘 봤다고 격려해주더라. (웃음)
어느 모로 보나 영수는 과묵하고 지적이면서,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에서 보여준 청년 시절의 활기에서 비껴난 채 출장밴드의 리더로 쓸쓸하게 살아가던 성우(이얼)의 좀더 나이 든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한 가수의 메가 히트곡처럼 성우의 얼굴은 지금까지 이얼 배우의 얼굴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그를 알아보는 관객에게는 영수의 얼굴이 친숙하기도 하고, 또 낯설기도 했다. 지난해 <라이브>에서 나이 들어 지친 생활형 경위 ‘삼보’ 역으로 모습을 보이기까지, 대중에게서 멀어진 시간 동안 한동안 자연인으로 사업을 했고, 성공과 실패도 맛보았다. “연기에 대한 딜레마였을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왔고, 연기 안 해도 살 수 있겠다 싶어 떠났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지나고 제주도에 터를 잡았던 때, 다시 연기에 대한 갈증이 생길 즈음 또 한번 그에게 연기 2라운드의 손길을 건넨 사람이 있었다. “창감독과 <고死: 피의 중간고사>(2008)를 같이해 인연이 있었는데, 소주 사러 집 앞 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감독님을 만났다. <계춘할망>(2016)을 찍으러 온 차였는데 ‘선배님 이제 다시 하셔야죠’ 하더라.” 그렇게 JTBC 영화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에서 만든 단편 <숲 속의 아이>(2017)에서 형사 역할을 했고, 작품을 본 노희경 작가가 <라이브>에 캐스팅하면서, 지금은 <제8일의 밤>의 퇴마 스님 역에 이어 <경관의 피>(가제)의 경관 역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부쩍 늘어난 주름과 듬성해진 머리숱, 지금의 이얼을 규정하는 얼굴은 이제 서서히 세월의 무게를 견뎌가고 있는 중년의 모습이다. 그 지점에서 이얼이 가진 마스크가 곧 나올 작품들에 불어넣어줄 생기들이 사뭇 기대된다. “지금 내 나이가 좋다. 인생을 조금쯤은 느낄 수 있는 지금의 얼굴이 좋다. 너무 늙게만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신경도 많이 쓴다. 생전 안 바르던 로션도 바르고. (웃음)” 같이 한 동료 배우들에게 요즘은 많은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다. 특히 후배 배우들에게 너무 많이 배우고 있다는 그. “특별한 바람은 없다. 능력만 된다면 어떤 역할이든 다 해보고 싶다. 후배들을 보며 느낀 것처럼 나도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김도영 감독이 말하는 이얼
“정유미 배우의 추천을 받았는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그 잘생긴 얼굴의 남자여서 ‘어, 그분이 지영이 아버지를?’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니 어느새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성이 되어 있었다. 그게 좋더라. 지영이 아버지가 선한 사람이면 좋겠다 싶었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할 수는 있지만 마음은 선한 사람이었으면 했다. 지영이를 걱정하는 얼굴, 속상해하는 얼굴. 자식이 잘되었을 때 웃는 표정. 그걸 표현할 때의 배우의 얼굴이 너무 좋다. 이얼 선배님이 웃으시면 정말 진짜 웃으시는 것 같다. 그런 진짜 같은 순간들이 배우의 표정들에서 나온다.”
●필모그래피
영화 2019 <82년생 김지영> 2012 <숲속의 아이> 2008 <여기보다 어딘가에>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7 <화려한 휴가> <무방비도시> 2006 <사생결단> 2005 <홀리데이> <분홍신> 2004 <사마리아> 2002 <중독> <H> 2001 <와이키키 브라더스> 1996 <축제> TV 2018 <라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