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서울의 한 <82년생 김지영> 상영관. 객석의 절대다수는 이성 커플이다. 아들과 함께 온 어머니, 두딸과 함께한 장년 남성도 눈에띈다. 이날은 남성 관객이 전체의 40% 정도는 됐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 표정이 성별에 따라 다르지 않았다. 관객은 도란도란 동의의 끄덕임과 함께 미열이 오른 눈시울을 식혔다. 남성 관객 비중이나 관람 후 반응은 개봉 전 우려를 비껴가는 분위기다. 개봉 18일째 관객 300만명을 넘어선 <82년생 김지영>의 네이버 실관람객 평점 평균은 11월 12일 기준 9.3점. 현재 국내 상영 중인 작품 전체를 통틀어 최고점이다. 성별로 보면 남성 8.87, 여성 9.45로 남성 관객도 상당한 점수를 줬다. 개봉일 당시 관람과는 무관한 ‘네티즌 평점’ 남성 점수는 1.58로, 말 그대로 테러 수준이었다. 3주 뒤 이 수치는 2.80으로 오른다. ‘별 1개 공격’에도 불구하고 1.2포인트 이상 상승한 것도 특기할 일이다. 이제 이 영화는 성별 구분보다 관람 여부에 따라 격심한 평점 차이를 보이는 사례가 됐다. 포털 게시판에는 “보고 나서 얘기하시라”는 댓글이 잇따른다. 개봉 초기의 성 대결 양상은 남성 관람객의 긍정적 반응으로 잦아드는 분위기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영화화한 각본이 남성의 공감지점까지 영리하게 고려한 까닭일까. 아니면 3년 전 원작 소설이 쏘아올린 작은 공에 의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한 걸까. 모두 일리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은 전문가 비평보다 시민들의 솔직한 견해가 더 궁금한 영화다. 이곳저곳 연락닿는 대로 의견을 물어 인상적인 말들을 골라봤다. 무엇보다 대현(공유) 캐릭터가 논쟁적이었다.
“많은 남자들이 영화 속 공유에게 이입하는 것 같아요. ‘나도 집에서 공유가 하는 만큼은 한다’ 내지 ‘나도 저 정도는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들을 하더라고요. 일종의 안도감이랄까. 잘못을 지적당하거나 공격당하는 기분이 들까봐 걱정했는데, 공유와 함께 묻어가는 느낌이 있는 거죠.”(73년생 남성) “그가 0점짜리나 100점짜리 남성으로 그려지지 않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으로 묘사된 점이 좋았어요. 공유가 오열하는 장면에서 특히 슬펐고요.”(80년생 남성)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번엔 여성 관객에게 가보자. “공유가 그 장면에서 울면 안되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와 결혼했기 때문에 지영(정유미)이 그렇게 아픈 거 맞잖아요. 제 친구 엄마는 공유가 불쌍해서 울었다던데, 우리에겐 보이지만 어머니 세대에겐 보이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문제는 공유가 아니라 누구랑 결혼하든 비슷한 결과가 예상되니까 ‘에효…’ 하게 되는 거예요.”(89년생 여성) “저는 원작 소설 안 좋아해요. 사례 묘사나 감정 표현이 섬세하지 못하고 나열만 한 것 같아서요. 극중 공유가 여러모로 잘못한 건 틀림없죠. 실제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건 성별로 인해 분명히 존재하는 차이에 따라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그 속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거예요. 영화 속 장면이나 대사 가지고 말꼬리 잡는 태도는 현실에선 도움이 안 돼요.”(78년생 여성)
의견은 300만개나 더 있을 테지만, 지면에 다 쓰지 못한 것까지 모아 이 글의 주제를 기준으로 범주화해보려 한다. 영화를 본 뒤 현실 고민은 어느 쪽으로 나아가는가. 한쪽 그룹에는 캐릭터에 공감하거나 자신을 대입시켜 비교하는 등 개인화한(personalize) 고민이 주를 이루는 경우들이 있다. 다른 한쪽으로는 지영과 주변 여성 인물의 마음속을 경유해 결혼이라는 제도와 그 양상, 즉 구조를 향해 고민을 진행시키는(politicize) 그룹이 있다. 페미니즘 정치학에서 사용하는 흔한 구분법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언제나 뒤섞여 있게 마련이지만, 어떤 이가 결혼을 개인의 문제로 한정 짓는 사이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구조의 문제가 된다(위의 인용들이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살펴보시길). 어떤 남편에겐 출산과 육아는 개인과 가족이 고생하고 감내하면 되는 일에 그치지만 모든 아내에게는 정치·사회·경제가 통째로 바뀌는 문제가 된다. 거칠게 확장해 빗대보자.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해 누군가는 정신질환을 가진 개인의 죄로 치부하는 반면 더 많은 이들은 여성 혐오에 의한 사회문제로 파악한다. 하나의 잘못은 해당 사회가 어떤 태도로 진단하느냐에 따라 처방도 달라지고 재발 가능성도 달라진다. 법 규정만 가지고 “개인 범죄”로 사안을 단정지으면 곤란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혐오와 차별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영화로 돌아와보자. 대현은 어느 책 제목처럼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그가 “내 아를 낳아 도”, “밥 차려줘”, “제가 열심히 돕겠습니다”와 같은 무개념·무책임한 발언을 할 때, 이것은 개인의 문제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즉시 휴직에 돌입하는데 아빠는 최소 2년 뒤에야 육아휴직을 사용함으로써 이미 주도적 육아로부터 멀어진 이후가 돼버리는 일은 개인과 구조 중 어느 쪽의 문제인가. 결국 지영이 빨래를 개는 동안 대현이 맥주 한캔 마시는 게 이상하지 않은 풍경처럼 굳어진다면, 어느 쪽을 먼저 들여다봐야 그것이 이상한 광경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현실 세계는 이분법의 세상에 비해 까마득하게 복잡한 것이어서, 어느 한쪽에서만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우선하는 방향은 있을 것이다. 구조적인 입구를 먼저 찾아 들어간 다음 개인마다 다른 개별 출구를 마련해야 해법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 결혼을 둘러싼 숱한 문제들이다. 순서 없이 개인 차원의 출구만 찾으려니 ‘적당히 조용히’ 넘어가다 끝내 아프게 된다. 시스템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기 위해선 “막 나대”야 한다. 나대는 게 개인의 일이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어느 쪽으로 접근했든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이건 동상이몽일까 아니면 작품의 풍성함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 원작 소설이 3인칭 화자를 통해 짚어나간 현실의 문제점들을 영화가 어떻게 다루는지 살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종반부 이전까지 대부분의 부당한 상황에 대한 지영의 리액션은 온건하게 사실적이다. 많은 여성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적당히 넘어가야 했다. 때로는 리액션을 삭제하는 편집을 통해 여성의 처지를 촬영 밖에서 반영하기도 한다. 도무지 적당한 리액션이 나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때 지영은 증상을 보이지만, 그녀의 병은 ‘적당히’가 쌓인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 속 문자언어들이 조목조목 새긴 부당함이, 영화에선 누군가에겐 보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어떤 이슈는 무심코 지나가거나 프레임들의 행간으로 파고든다. 세상 거의 모든 영화가 갖고 있는 이런 특성이, <82년생 김지영>에 와서는 관객 각자의 기억과 영화 속 서로 다른 신경세포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는 현재 개봉작 중 최고 평점이라는 대중적 호응이다. 영화의 밖에서 터놓은 대화가 더 많이 오가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정치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적당히’ 지나친 채 이 영화를 호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