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82년생 김지영> 글③] 김성훈 기자의 <82년생 김지영> 에세이, 육아와 살림을 경험하며 알게 되는 것들
2019-11-21
글 : 김성훈
돕는다고 말하지 마라

처음에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지영(정유미)의 아파트는 아이를 키우는 집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김지영과 같은 1982년생 아내와 함께 맞벌이하며 32개월짜리 딸을 키우는 우리집은 엉망진창이다. 거실의 나무 바닥은 ‘뽀로로’와 ‘콩순이’ 스티커들로 도배됐고, 소파 덮개는 형형색색의 크레파스가 칠해진 도화지가 된 지 오래며, 아이 방은 온갖 장난감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치우고 또 치우고, 정리하고 또 정리해도 아이가 지나가면 어질러지고 산만해진다. 집집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집 대부분 비슷한 사정이고, 마땅히 감수할 일이며, 집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포기하는 게 편하다. 그런데 지영의 아파트는, 지영의 딸 아영이 두루마리 휴지를 거실 바닥에 풀어헤친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아이가 사는 집이 맞나 싶을 만큼 정리정돈이 잘됐다.

판타지 속 공간이 아니라면 지영의 집이 깨끗한 비결은 누구 솜씨일까. 가사 도우미가 따로 없고,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거나 그들이 지영의 집을 자주 찾아 가사나 육아를 돕지 않는 영화 속 상황을 고려하면 둘 중 하나다. 지영의 남편 대현(공유)이거나 독박육아하는 지영이거나. 아이를 재운 뒤 늦은 시간까지 빨래를 개고 있는 아픈 아내를 걱정하면서 식탁에 앉아 맥주나 홀짝이거나, 욕실 밖에서 대기하다가 지영이 목욕시킨 아영이를 수건으로 감싸안고 프레임 밖으로 나가거나, 명절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 아내 대신 설거지를 하겠다고 고무장갑을 꼈을 때조차 며느리(지영)에게 눈치 주는 자신의 어머니를 상대하랴 그릇 하나 씻지 않는 등 영화에서 가사도 육아도 전혀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고려하면 대현이 일찍 퇴근해 청소를 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의도된 연출인지 알 수 없지만, 집에서 대현의 어정쩡한 동선이나 행동은 가사나 육아를 거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데 설득력을 더했다.

말로만 아내를 걱정하고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현을 보면서 다른 영화 속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영화 <온다>에서 쓰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한 히데키다. 대현이 그렇듯이 히데키 또한 카나(구로키 하루)와 결혼해 딸 하나를 키우며 사는데, 그의 취미는 육아 블로그 운영이다. 매일 아이 사진과 일기를 올리는 그를 두고 여성들은 “이상적인 아빠이자 남편”이라고 칭찬하고, 남성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을 보낸다. 그런 반응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의기양양해하는 그가 노트북에 점점 파고드는 사이, 그의 아내 카나는 독박육아와 가사에 허덕이며 고통스러워한다. 3주마다 육아 칼럼을 연재하는 나 또한 히데키를 보면서 ‘나는 그런 적이 없었는가’ 되돌아보며 반성했고, 어떤 장면에선 속으로 뜨끔한 적도 있다. 자신이 육아와 가사를 한다고 믿는 히데키에 비하면 말만이라도 아내를 걱정하는 대현이 훨씬 낫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둘을 비교하는 건 의미도 없을뿐더러, 히데키든 대현이든 가사와 육아에 손을 놓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유독 육아와 가사에 관해서 사람들은 틀린 질문들을 많이 한다. “‘내가 목욕시키려고 일찍 왔는데’ 하며 정장 상의를 벗는 대현만 한 자상한 남편이 어디에 있기에 지영이 우울해하나”라는 관객 반응도 틀린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사와 육아는 남편이 아내를 ‘돕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그것도 틀렸다. 맞벌이 부부든, 외벌이 부부든 가사와 육아는 남편과 아내가 평등하게 함께하는 일이다.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이 원하는 건 자신의 가사와 육아 동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틀렸다. 여자들이 정말 원하는 건, 남자들의 가사와 육아 동참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하루 중 단 한 시간이라도 가사와 육아로부터 벗어나 드라마를 감상하고, 따뜻한 커피 한잔하고, 목욕탕에 가서 쉬는 것이다.

그 점에서 지영이 빵집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보고 집에 돌아와 대현에게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해볼까?”라고 의견을 묻자 대현이 “누가 그런 거 하래?”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답답했다. 대현은 ‘가계경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으니 괜히 밖에 나가서 아르바이트 같은 힘든 일을 하면서 고생하지 말고 집에 편하게 있어라’라는 뜻으로 한 배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지영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3년 전 아이를 낳고 난 뒤 구직활동에 뛰어들었다가 수차례 면접에서 미끄러져 좌절한 아내로부터 “합정역에 있는 한 대형 의류매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도 되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일을 하면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 땀을 흘린 것에 대한 보상도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집에서도 가까워 “일을 하면 재미있겠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영화를 보면서 오버랩됐다. 어쨌거나 주말마다 지영에게 휴식을 주고, 딸과 더 친해지기 위해 아영이와 단둘이 키즈카페나 1박2일 여행을 가도 시원찮을 판에, 침대 위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아이를 하나 더 낳아달라”고 징징거리면서 “아이가 하나 더 생기면 일찍 들어와야 하고, 술도 못 마시고, 친구도 못 만난다”고 철없이 설득하다가 지영으로부터 끝내 “삶이 지금보다 더 많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니 낳을 자신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나 배고파, 밥 차려줘”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대현이 영화에서 단 한번도 싱크대 앞에 서서 손에 물을 묻히지 않는건 대현 엄마에게도 책임이 있다. 지영도, 지영의 어머니도, 대현의 어머니도 누군가의 엄마인데 모두 자신들이 겪은 가부장제의 폐혜와 남녀차별을 대물림할 뿐, 누구도 그것이 잘못됐다고 지적하지 않거나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명절 때 지영의 가족이 부산에 있는 시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대현의 누나 가족이 들이닥치는 영화의 초반부, 그나마 지영의 어머니가 지영의 목소리를 빌려 “사돈 어른, 그 집만 가족인가요? 저희도 가족이에요. 그 댁 따님이 집에 오면 저희 딸(지영)은 저희 집으로 보내주셔야죠”라고 따끔하게 말한다. 대현이 그런 지영과 아영이를 데리고 부랴부랴 집에서 나와 처가로 가는 도중 들른 휴게소에서 지영 몰래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를 잘 달래 달라”고 자신의 엄마 눈치부터 보는 장면은, 성인이 됐는데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엄마와 아들 관계에서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감과 자존심이 아들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의 독특한 모자 관계는 지영이 일자리를 구했을 때도 드러난다. 대현이 육아휴직을 쓰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현의 어머니는 지영에게 전화를 걸어 “왜 너 때문에 남편이 희생을 해야 하냐”는 식으로 강하게 항의한다.

집 안팎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에서 지영은 베란다에 앉아서 창 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대현이 아빠가 처음이듯 지영도 엄마가 처음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대현이 잊지말아야 할 사실이다. 깨끗한 지영의 아파트부터 눈에 들어오고, 가슴이 아팠던 것도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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