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놀랍지만 돌이켜보면 더욱 놀랍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책에 다 일어날 수가 있는가? 한 원고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되고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그 베스트셀러가 동명의 영화가 된 것은. 투고된 원고가 책이 될 확률, 출간된 도서가 베스트셀러가 될 확률, 판권 계약을 마친 소설이 영화 개봉까지 될 확률을 모두 계산하자면 놀라움의 연속이다. 그 책을 낸 출판사의 해당 팀에 내가 근무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우며 또한 겸연쩍다. 이 책의 내용과 이 책이 해낸 일들이 자랑스러우며 이 놀라움과 자랑스러움을 모두 내 몫인 양하는 게 겸연쩍다. <82년생 김지영>은 엄연히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편집자가 작업한 책이며, 여성이 제작하고 여성이 감독을 맡아, 여성 주연배우가 함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남자가 읽은/본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취지의 글을 쓰기에 약간의 곤혹을 느낀다. 이런 곤혹을 알리고 싶지 않다. 남자로서 나는 솔직히 이런 마음도 있다.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뭘 먼저 해야 할지 잘 모른다. 나라는 개인의 존재(남편) 때문에 여성이라는 집단(아내)의 고통이 있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그런데 사실 잘 모르겠고,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인물 어디선가 본 것만 같다. 꿈은 아니고, 그렇다. 영화 속 대현이다.
소설과 영화의 갈림길은 남편 대현의 분량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남성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이름을 갖는 인물이지만, 그 이름조차도 작법의 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붙여준 듯 맹탕인 인물이다. 작가의 의도에 의해 그는 철저하게 작품의 뒤에 서 있다. 지영을 사랑하는지, 지영의 치료를 위해 애쓰는지, 심지어 어느 직장에서 어떤 고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그는 거세된 인물이 아닌, 처음부터 없는 남성에 가까운데, 이는 지금까지의 한국 소설이 보인 모종의 특성을 통쾌하게 뒤집는 장치가 된다. 소설 속 대현은 존재의 시원을 찾아 괴로워하지 않는다. 군중 속 고독을 곱씹지 않고, 어릴 적 아픈 상처에 휘청이지도 않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현은 <운수 좋은 날>에서 그랬듯 아픈 아내를 때리고 방치하지 않는다. 그는 <서울, 1964년 겨울>에서처럼 아내의 시신을 몇푼에 팔지 않는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처럼 허세에 찌들어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하는가. 놀랍게도 대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알코올 의존증이거나 도박 중독이거나 폭력 남편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영의 고통은 남성이 바라보기에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그들에게 (젊은 보통) 여성의 고통은 최악의 남성을 만났을 때야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면 모두가 고통받았을 시기(라고 아무렇게나 상정되는)인 1962년 출생이든지.
영화의 대현은 나름의 존재감이 있다. 남성 의사의 보고서 형태로 진행되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대현이 주된 화자다. 당대 최고의 스타인 공유의 얼굴을 빌려 스크린에 드러나는 대현은 꽤 괜찮은 남편으로 보인다. 그는 지영(정유미)을 걱정하되 그만큼이나 둔하다. 소설에서 대현의 무감함은 태곳적부터 그러하다는 듯 디폴트값으로 설정되는데 비해 영화는 대현의 무감함을 그려내는 데 퍽 공을 들인다. 그의 무감함은 그가 비교적 다정한 남자라는 점에서 더욱 무참히 현실적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에서 대현은 가사와 육아를 ‘도와주겠다’라고 말하지만, 영화에서의 대현은 아픈 아내를 걱정하면서도 빨래를 개고있는 아내를 도와주기는커녕 아련한 눈빛으로 맥주만 홀짝이는 모습으로 그들이 말하는 도움의 의미를 보다 극적인 방식으로 까발린다. 증상의 당사자이자 가족인 아내보다 (엉겁결이라 해도) 본가 식구들에게 지영의 빙의를 먼저 알린다. 지영에게 병원에 가보라 넌지시 권유하지만 병원비를 알아보고 예약을 걸거나 휴가를 내 함께 내원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장면은 따로 있다. 대현이 지영의 빙의를 지영에게 처음으로 말하던 식탁에서, 정작 울어야 할 지영은 침착한데 대현은 펑펑 울어버린다. 지영은 말한다. “그럼 이제 뭐부터 해야 해?” 여기에 대현은 꺼이꺼이 울면서 겨우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네가 나랑 결혼해서 아픈 것 같아서….” 아아, 이렇게나 맹할 수 있는 자유가 식탁에 앉은 79년생 대현씨에게는 있는 것이다. 그 자유는 관객석에 앉아 있던 남성 대부분이 가진 자유이기도 하다.
지영이 아픈 이유가 대현과의 결혼일 리 없다. 그것은 지엽적인 접근이다.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자들 특유의 비대한 자의식일지도 모른다. 소설과 영화는 모두 그 자의식을 없앤다. 소설은 대현에게 아무런 역할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지영의 아픔을 이전 여성 캐릭터의 그것과는 다른 위치에 놓는다. 영화는 대현이 가진 다정함을 넘어서는 무감함을 무심히 펼쳐놓음으로써 지영의 아픔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일반적인 남성에 의한 것임을 폭로한다. 이 정도면 썩 괜찮아 보이는 남편이라 하더라도, 다정하고 성실한 아버지라 하더라도, 공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극중 지영의 아버지처럼 눈을 껌벅거리며 내가 뭘 또 잘못했나 눈치를 보겠지만, ‘뭘 잘 몰라 눈치를 볼 수 있는 권력’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82년생 김지영>이 아니었다면 끝내 몰랐을 일이다.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지 않고, 술과 도박에 빠지지 않았으며,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경제활동을 등한시하지 않는 것은 결혼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자연스러운 책무다. 지금까지 이 땅의 대현씨들은 이것만 잘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82년생 김지영>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호함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소설과 영화를 막론하고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사람에게 압축하듯 일어날 수 있는가. 맞는 말이다. 비교적 괜찮은 남편, 상대적으로 괜찮은 아버지, 내 편이 되어주는 어머니와 강건한 언니,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는 남동생, 우애가 좋은 직장 동료들, 존경할 만한 선배, 수도권의 아파트와 책장에 꽂혀 있는 세계문학전집, 크게 아픈 데(장애) 없이 자라는 아이…. 이런 조건이 모두 갖춰지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성차별과 여성 혐오, 불법 촬영, 성추행과 성폭행을 모조리 피해 사는 것 또한 기적처럼 느껴진다. 기적적으로 평범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폭력과 혐오가 <82년생 김지영>의 메시지라면, 그 일상에 자신이 포함됐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는 남성의 감정은 자연스럽다. 무서운 게 싫은 일부 남성은 되레 소리를 지른다. 그런 단말마에까지 경청의 시간을 들일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 지금까지 지영의 편에 있는 줄 알았던 남성 의사의 권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보다 희망적이다. 대현은 아마도 휴직을 했는지 딸의 등하원을 맡고, 지영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리지 않고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가 된다. 현실은 소설에 있고 판타지는 영화에 있는 셈인데, 어느 쪽을 택할지는 지영은 물론 대현에게도 몫이 있는 듯하다. 그 몫을 두려움 없이 받아야 한다. 자랑스럽지도, 겸연쩍지도 않게. 우리의 기적적인 일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