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19 미개봉 신작①]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날 용서해줄래요?> <파이팅 위드 마이 패밀리>
2019-12-12
글 : 김소미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If Beale Street Could Talk

제작연도 2018년 / 감독 배리 젠킨스 / 출연 키키 레인, 스티븐 제임스, 레지나 킹 / 상영 플랫폼 IPTV

마땅히 더 주목받았어야 했다. <문라이트>(2016)로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수상한 배리 젠킨스 감독의 신작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에 관한 이야기다. 인종 그리고 성정체성에 근거해 한 흑인 남성의 성장 과정을 시적으로 관통한 영화 <문라이트> 이후, 이번 작품은 인종차별에 의해 성폭력 범죄에 연루된 흑인 연인의 사랑을 그린다. 제목의 '빌 스트리트'는 원작 소설 작가인 제임스 볼드윈이 “모든 흑인이 태어난 곳”이라 수식했던, 블루스 음악으로 대표되는 미국 흑인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다. 1970년대 뉴욕, 22살의 포니(스티븐 제임스)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성폭력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혀 있고 그의 연인인 19살 티시(키키 레인)는 막 임신 소식을 알게 된다. 유리 너머의 연인은 애틋하게 서로의 진심을 맹세하지만, 양가의 갈등과 어린 부모를 향한 주위의 불신 같은 멜로드라마의 고전적인 장애물이 그들을 가로막는다. 더욱이 젊은 연인은 사회의 차별과 폭력 앞에서 투쟁해야만 한다. 동세대에 팽배한 좌절과 무력감 역시 극복해야 할 숙제다. 그러나 배리 젠킨스 감독은 그 가혹함 속에서도 영화적 고상함을 등한시할 마음이 없는 감독이다. 할렘의 거리와 방 안을 수놓는 사랑의 생명력이야말로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이유다. 완연한 낙엽 속에서 다정하게 걸어가는 연인의 풍경을 부감 카메라로 좇고, 이어서 얼굴을 맞대고 밀어를 속삭이는 두 사람을 응시하는 오프닝숏은 이 영화의 낭만주의를 집약적으로 체감시킨다. 촉감과 냄새, 작은 소리에 이르기까지 미묘한 감각을 건드리는 이미지의 조각들이 우리를 그 시대에, 그 사랑 속에 살게 한다. <문라이트>에 이어 다시 한번 젠킨스 감독과 협업한 음악감독 니콜라스 브리텔의 서정적인 O.S.T 역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주요한 요소다. 더불어 포니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대두되는 인종, 계급간 차별의 복잡한 레이어는 제임스 볼드윈이 45년 전에 쓴 소설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의적절하다. 서로를 위해 버티고 사랑을 지속하는 광경을 담아낸 젠킨스의 유려한 몽타주 또한 여전히 최선의 진실로 다가온다.

<날 용서해줄래요?> Can You Ever Forgive Me?

제작연도 2018년 / 감독 마리엘 헬러 / 출연 멜리사 매카시, 리처드 E. 그랜트 / 상영 플랫폼 IPTV

“난 사람보다 고양이가 좋은 51살짜리 여자라고!” 반사회적인 성격에 알코올의존증까지 겸비한 리 이스라엘(멜리사 매카시)은 주로 전성기가 지나간 유명 인사의 전기를 쓰는 작가다. 나름대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부문에 오른 이력도 있건만, 직업적 자부심과 달리 작가로서 고유한 명성은 좀처럼 생기지 않아 애석한 상황. 오랜 동료인 출판사 사장은 “술 끊고, 깨끗한 옷 입고, 친절하게 말하라”고 조언하지만, 그녀의 불행이 자발적인 것으로 취급될수록 리는 점점 더 고독해지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타자기 앞에서 “타자나 치고 앉았다”는 문장만 간신히 적어내려가던 무소득 작가는, 결국 기발한 범죄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곧 유명 인사의 사적인 편지를 위조하고 수집가들에게 비싼 가격에 팔면서 수천달러를 벌어들인다.

<스파이>(2015), <고스트버스터즈>(2016)의 배우 멜리사 매카시의 가장 슬픈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날 용서해줄래요?>는 동명의 실존 인물 리 이스라엘의 회고록으로부터 시작됐다. 1990년부터 릴리언 헬먼, 도로시 파커, 노엘 카워드 등 문학계 인사들의 편지를 위조한 이스라엘의 행적은 이후 박물관과 기록 보관소 등에서 원본 편지를 훔칠 정도로 대담해졌으나 1992년 FBI에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집요한 고독과 가난을 노려보며 삶을 갈구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는 대개 파괴적이고 매력적인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날 용서해줄래요?>는 그 역할을 배우 멜리사 매카시에게 쥐어줌으로써 한층 더 인간적인 연민을 요청하는 영화다. 오랜 권태 속에서 스스로를 투박하게 취급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의 품새를 완벽하게 재현해낸 매카시는 이 작품으로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생계 유지에 이골이 난 작가의 신경증이 재즈 음악과 고양이 앞에서 비로소 누그러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어느새 범죄는 잊고 그녀를 남몰래 애처로워하게 된다. 안정적인 만듦새로 지난해 미국 텔루라이드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관객과 비평가들에게도 두루 호평받았다.

<파이팅 위드 마이 패밀리> Fighting with My Family

제작연도 2019년 / 감독 스티븐 머천트 / 출연 플로렌스 퓨, 드웨인 존슨, 레나 헤디, 빈스 본 / 상영 플랫폼 DVD

미국 드라마 <더 오피스> 시즌1의 감독·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해 배우로도 활동 반경을 넓힌(<로건> <거미줄에 걸린 소녀> 등) 스티븐 머천트의 신작. 영국 태생의 미국 프로레슬링 스타 '페이지'의 실제 이야기를 옮겼다. 레슬러 부부 아래서 싸움꾼의 기질을 장려받으며 자라난 막내딸 사라야(플로렌스 퓨)가 월드레슬링엔터테인먼트(WWE) 데뷔를 위해 가족의 품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검증된 감독과 상업적으로 이름난 배우들이 두루 출연하지만 <파이팅 위드 마이 패밀리>는 오롯이 플로렌스 퓨의 영화다. 아리 애스터 감독의 호러물 <미드소마>(2019)에서 기만당한 사랑에 울부짖던 대니, 박찬욱 감독의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2018)에서 배우와 스파이의 모호한 경계 위에 놓인 찰리가 보여준 성숙한 여성의 고뇌는 이번 영화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뒤덮는 고스룩을 지향하는 사라야는, 또래 집단의 미적 기준에는 도통 무신경한 채 어떻게 하면 더 세고 강하게 몸을 날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10대의 호기로 무장했다. 영국 노리치 지역을 떠나 WWE 선수촌에 입성한 사라야의 여정은 성장담으로서는 다소 싱거운 전개를 이루지만, 링 위에서 다부진 몸을 굴리며 유쾌하게 날뛰는 여성배우들의 활기가 드라마의 아쉬움을 무마한다.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괴짜 가족의 감성, 날것의 화면이 주는 리얼리티의 재미, 레슬링 쇼 비즈니스의 화려함이 뒤섞여 정신없는 희극으로 완성되었다. 특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의 본능적인 애착과 끈끈함 같은 가치가 스포츠 드라마의 육체성과 맞물릴 때 종종 미묘하고 뭉클한 시너지 효과가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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