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여전히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를 잊지 않고 있다. 한 나라의 왕임에도 버럭 화를 내고 육두문자를 쓰길 주저하지 않는, 언제나 백성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배우 한석규의 프리즘을 관통하여 세상에 나온 바 있던 이도 덕분에 세종은 역사책 속 한없는 존경의 대상이었던 세종대왕이 아니라 보다 현대적인 세종의 이미지를 얻게 됐다. 그랬던 그가 영화로 다시 한번 세종을 연기한다는 것은 배우로서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터. “<뿌리 깊은 나무>를 찍을 때 이도에게 친구가 있다면 아마 장영실이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해본 적 있다. 너무나 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살았던 왕으로서 그분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평생 골몰했다. 때문에 드라마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장영실과 절친한 사이였을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역사가 보여주지 않는 당시의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허진호 감독의 <천문>이 주목하는 점은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세상 누구보다 가깝고 허물없었던 그 관계에 있다. 학교 선후배 사이로 스무살 무렵부터 줄곧 배우라는 같은 길을 걸어온 한석규와 최민식 두 배우에게 세종과 영실 역을 맡기고 싶어 했던 허진호 감독의 선택 덕분에 한국영화 사상 쉬이 본 적 없는 화학작용을 목격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런데 두 배우 가운데 누구에게 세종과 영실을 맡길지는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함께 배역을 고민했다는 것이 의외다. “서로 양보했지. 주거니 받거니 양보하다가 자연스레 결정됐던 것 같다.”
믿음과 신의를 바탕으로 이뤄진 두 인물의 관계는 허진호 감독의 표현 을 빌리자면 ‘브로맨스’를 자아낸다. 천출로 관직에 올라 왕과 독대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데렐라 스토리에 가깝다. “상상만 해도 흐뭇하지. 민식이 형과의 작업은 늘 든든하다. 우리의 그런 마음을 관객과 나누고 싶었다.” 영화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휘둘려 어쩔 수 없이 영실을 내쳐야 하는 세종의 안타까운 상황부터 펼쳐놓는다. 관객은 몇 십년에 걸친, 그러니까 약간의 분장을 거쳐야 표현이 가능한 이도와 영실의 안타까운 관계 변화 안에는 왕과 신하의 주종 관계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상상하며 보게 된다. 특히 영실이 자격루를 만든 다음 세종과 함께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대화하는 장면이 대표적으로, 이는 두 사람의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세상을 보다 이롭게 바꿔보겠다는 서로의 이상을 뜨겁게 공유한다. 역사에도 기록된 사실이지만 극중 이도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힘겹게 조정 대신을 대한다. 영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사대부들의 협잡이 그의 몸과 마음을 더욱 괴롭힌다. “연기할 때 항상 사람에 대한 궁금함으로 임한다. <우상>의 명회를 통해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는 인물을 해보고 싶었다. 정말 비겁한 인물이지.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살아남겠다는 목표로 치열하게 사는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고 싶었다면, 이도는 쉽게 말해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죽음을 초월한 숭고함, 위대함에 대해서 표현하고 싶었다.” 한석규 배우가 인터뷰 내내 길게 강조했던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사람에 대한 반응을 연기에 담아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고민했던 이도라는 캐릭터에 스스로 생생하게 반응했고 그 모습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신구 선생님이 현장에서 그러시더라. 너희들은 꽃으로 치면 봉오리가 이제 만개하고 있을 나이라고. 정말 그 말을 듣고 공감했다. 이제야 연기에 대해서, 그리고 삶에 대해서 조금씩 알 것만 같다. 그런 마음이 영실을 바라보는 이도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우상>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관객에게 선보이게 될 <천문>은 배우 한석규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 “개인적인 바람이긴 한데 잊히지 않는 강렬한 장면이 하나라도 남게 되는 영화를 하고 싶다. 내게 있어서 영화란, 강렬하게 남는 한 장면을 기억하는 행위다. 그게 내 인생의 영화구나. 그런 한 장면이 추억으로 남아 관객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