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2016)은 더이상 새로울 게 없어 보이는 좀비물에서 여전히 보여줄게 남아 있다는 걸 증명한 영화다. 연상호 감독의 진가는 이렇게 익숙한 듯 보이는 것에서 새로운 요소를 발견하고 그걸 다시 재미있게 풀어낼 줄 아는 태도에 있다. 다소 아쉬운 결과를 남긴 <염력>(2017) 이후 연상호의 세계는 한층 넓어지고 견고해지는 중이다. 그는 한 가지에 몰두해서 나만의 세계를 쌓아올리는 대신 플랫폼에 맞춰서 다양한 소통 방식을 모색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문을 두드리면서 배우는 중”이라고 말을 아끼는 그의 모습은 훨씬 자유롭고 홀가분해 보였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연상호는 한층 단단해져서 돌아왔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반향을 일으킨 <부산행>에 이은 이야기인 만큼 <반도>에 대한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부산행> 이후 다양한 버전의 시나리오들이 있었다. 프리퀄, 시퀄, 스핀오프 등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이 이뤄졌다. <부산행>이 한창 흥행할 때 속편은 비행기로 가야 하나, 다음은 속초행인가 등등 농담 같은 이야기도 나왔다. (웃음) <부산행> 직후에 바로 속편을 찍었다면 농담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전작과 비슷하게 가되 그러니까 이동수단을 바꾸거나 목적지를 바꾸는 식으로 살짝 차이를 두는 게 안전한 속편 기획일 수 있으니까. 내가 처음 낸 원안은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 시간이 좀 지난 뒤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그린 상황이었다. 세계관을 계승하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 안전한 것과는 거리가 꽤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루자면 이야기의 규모나 제작비 상승 등의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 <반도>의 컨셉이 결정된 건 <염력> 이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염력>이 시원하게 망하는 바람에 거꾸로 돌파구가 열렸다. 연속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재밌고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었고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염력>은 흥행 면에서 아쉬운 결과를 남겼다. 연상호의 톤이나 색깔이 잘 드러난 영화인데 개인적으로는 저평가됐다고 생각한다.
=<염력>은 정말 공들여 찍었다. 장면의 완성도는 <부산행>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과와 무관하게 해보고 싶은 걸 했고, 후회는 없다. 솔직히 <부산행> 이후로는 다음에 더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려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한참 헤맸다. 그렇다고 망하겠다고 결심하고 망한건 아니지만. (웃음) <염력> 이후 창작자로서는 훨씬 홀가분해졌다.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다고 할까. 2월 10일부터 방영되는 tvN 드라마 <방법>의 극본을 썼고, 최규석 작가와 네이버 웹툰 <지옥>을 연재 중이다. 드라마, 웹툰 작가 등 여러 방면으로 창작을 하면서 느끼는 건 플랫폼의 중요성이다. 작품을 만들어놓고 플랫폼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이템이라도 플랫폼에 맞게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 <염력>은 어떻게 보면 마이너한 감성과 형식이다 보니 블록버스터영화를 기대하는 관객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었는데, 당시엔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부산행> 끝나고는 ‘나도 봉준호 감독처럼 될 수 있는 건가?’라고 붕 떴다가, <염력>이 끝나고 현실을 깨달았다. (웃음)
-겸손한 얘기다. 차라리 연상호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하고 싶다. 내가 볼 때 봉준호 감독은 하나의 세계를 깊게 파는 게 아니라 넓고 보편적으로 확장해나가는 쪽이다. 거기에 핵심은 서브컬처의 정수를 끌고 와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어 나가는 감각이 탁월하다.
=감사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대중적이었다. <돼지의 왕>(2011)도 전체적으로 보면 예술성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인디 애니메이션들의 경향에서 보면 매우 친절하고 대중적이었다. 다만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쪽이 서브컬처라 전체를 놓고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반도> 역시 여러 서브컬처를 자양분 삼아 탄생했다. 아마도 <아키라>(1988)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을 영화로 풀어내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물론 여름 블록버스터에 맞는 방식으로. 앞으로도 플랫폼에 맞춰서 유연하게 풀어나가려 한다.
-플랫폼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말이 무척 와닿는다. 그런 의미에서 <반도>는 앞에 두 가지 선입견이 놓여 있다. 하나는 흥행작 <부산행>의 속편으로서의 <반도>에 대한 기대, <염력> 다음으로 선보이는 연상호의 차기작으로서 <반도>에 대한 걱정이다.
=<반도>를 찍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좀비를 가지고 새로운 걸 해볼 여지가 여전히 많다는 점이었다. 막상 찾아보니 좀비영화 중 재난 이후의 상황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좀비물은 더 할 게 없다는 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이번 작업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반도>는 새로운 이야기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가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최소한의 뼈대 같은 거다. 익숙하고 납득 가능하며 쉬운 가이드랄까.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서사의 틀 위에 어떤 이미지, 어떤 움직임, 어떤 액션을 보여주는가에 달렸다.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언가를 목격할 거라는 것 정도다.
-연상호 영화의 핵심이라면 슬랩스틱이 전하는 직관적인 즐거움, 움직임 자체의 쾌감이다. 최근 본 시나리오 중 <반도>처럼 지문이 길고 많은 영화가 없었다. 대사는 최소한이고 액션으로 모든 걸 풀어나간다.
=그게 내가 지금 사랑하는 것들이고, 관객에게 다가가고 싶은 방향이다. 1940년에 제작한 월트 디즈니의 <피노키오>를 지금 아이들에게 보여줘도 여전히 사랑받는다. 움직임의 힘은 언어를 초월한다. 애니메이션을 연출할 땐 거꾸로 대사와 서사 위주였기 때문에 실사영화 같다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실사영화를 연출하면서는 또 반대로 움직임과 이미지가 주는 쾌감에 매진하게 된다. <반도>에서도 카체이싱, 추격전 등 여러 익숙한 상황들이 등장하는데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르다. 단언하건대 독창적이라 느낄거다. 예를 들면 자동차 액션 장면의 경우 거의 절반 이상은 CG라고 봐도 무방하다. CG가 얼마나 많이, 정교하게 들어갔는지를 자랑하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만 기대해도 좋다. 사실상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많은 분량이 사용됐고 그만큼 실사에서 재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볼거리 측면에서 <부산행>은 예산 대비 놀라운 완성도를 선보였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현장으로도 정평나 있는데.
=딱히 그런 목표를 가지고 한 건 아닌데 일찍 끝나는 현장이라고 소문이 났다. 사실과는 다르다. 늦게 끝나는 날은 늦게 끝난다. 다만 프리 프로덕션을 길게 가는 편이다. 이번에는 프리 프로덕션만 1년 정도 준비했고 현장에선 딱 필요한 것만 찍었다. 강동원 배우는 철저하게 준비를 마치고 와서 정확히 필요한 이미지를 연기해줬다. 화면만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린 CG랑 구분이 안 간다. (웃음)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할인데 액션 연기경험이 많아서 이번 영화에 기둥이 되어줬다.
제작 영화사 레드피터 / 감독 연상호 / 출연 강동원, 이정현, 이레, 권해효, 김민재 / 배급 NEW / 개봉 2020년 여름
•시놉시스
전대미문의 재난 이후 4년이 흐른 대한민국은 버려진 땅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고립된 섬이 된 반도에 갇혔고 누구의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석(강동원)은 피할 수 없는 미션을 받고 한국 땅에 다시 발을 들인다. 정석은 미지의 세계인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고 일촉즉발의 순간 ‘반도’의 생존자들을 만나게 된다.
•관전 포인트
직진하는 이야기였던 <부산행>에 비해 <반도>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탈출하는 구성이다.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이미지를 어떻게 구현할지가 첫 번째 볼거리인데 거기에 외부인의 시선에서 그 상황을 탐험하도록 만들어 스릴과 서스펜스를 더했다. <부산행>의 배우 마동석에 비견될 히든 캐릭터, 배우 이레의 활약에 주목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