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에는 요란한 사건도 자극적인 상황도 없다. 그저 깊고 아름다운 관계가 있을 뿐이다. ‘벗을 깊이 알면 내가 깊어진다’는 한줄 문구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정약전과 그의 제자 창대의 관계를 그린 속 깊은 드라마다. “솔직히 긴박한 상황과 자극, 스펙터클에 매달리는 최근 상업영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영화인데 비슷한 영화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런 호흡의 영화도 한편 있어야 하지 않나.”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가 도달하는 지점은 소중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워진다.
-정약전이 쓴 책 <자산어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
=조선 후기 최고의 천재로 불리는 정약용에 비해 그의 형인 정약전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정약용이 유배생활 중에 수백권의 저서를 남길 동안 정약전은 <송정사의>와 <표해시말>, <자산어보> 딱 세 권의 책밖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더 많은 책을 쓴 사람이 기록에 더 남는 법이다. (웃음) 근데 <자산어보>란 책이 참 오묘하다. 쉽게 말하면 유배지인 흑산도 주변의 물고기와 바다 생물을 관찰한 도감인데 이 한권의 실용서에 정약전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변산>(2018)이 흥행에 참패한 뒤에 한동안 헤매던 내게 인연처럼 다가온 책이다.
-<변산> 이후 다시 사극, 아니면 실화 바탕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건지.
=<자산어보>를 알게 되고 영화화를 결심하게 된 과정 또한 오묘하다. 본래 오래전부터 동학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이야기의 뿌리부터 탐험해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하다보니 동학이 아니라 서학이 보였다. 서학이 먼저 있었기에 동학이란 개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학을 공부하다보니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형제를 알게 됐다. 정약종은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였고, 정약용은 성리학의 보완재로 흡수했다. 그런데 정약전은 서학, 그러니까 철학으로 받아들였고 <자산어보>는 그 결실 중 하나다. <자산어보>를 통해 서학의 옆구리를 찔러 설명한 셈이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대사가 많을 뿐 아니라 철학적인 사유가 바탕에 깔려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영어 자막 번역을 맡았다. 예전 <왕의 남자>도 번역도 자청해서 해주신 바 있는데, 이번엔 내가 부탁드렸다. 셰익스피어와 성리학을 함께 공부하신 분의 깊이 있는 번역이 필요했다. 가령 영화에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번역하겠나. 성리학적 가치와 철학을 맥락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의미 전달이 어려울 수 있다. 다만 시나리오는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동주> 때처럼 문학적인 걸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게 영화의 매혹일 것이다.
-<동주>처럼 흑백으로 찍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이 정도 시대극을 온전히 다 보여주기엔 예산이 넉넉지 않았다. 그림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기에 예산을 줄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흑백으로 가는 거였다. 물론 <자산어보>의 이미지와 맞지 않았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흑백이기에 도달할 수 있는 깊이가 있다. <동주> 때는 워낙 저예산이라 화면의 퀄리티가 미흡한 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감히 말하건대 매 화면이 아름답다. 촬영지였던 비금도 일대의 풍광은 물론이고 CG가 들어간 장면도 운치가 있다. 정약전(설경구)과 창대(변요한),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망망대해 위에 배 한척 띄워놓고 함께 있는 장면들은 상당수 CG를 사용했는데, 그야말로 한폭의 수채화 같다.
-얼핏 정적이고 고요한 듯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의 우주가 바뀌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뒤집히는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영화에는 상황과 사건이 별로 없다. 신유박해라는 시대적 사건이 있지만 초반 설정을 위한 것이고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 간 뒤에는 인물의 정신세계, 그리고 시대를 반영하는 가치관의 문제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가볍게 보고자 한다면 정약전과 제자 창대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지만 한 단계 더 파고들어가면 가치관의 충돌, 세계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다. 정약전은 서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철학을 추구한 사람이다. 반면 정약용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서학의 일부를 수용했다. 창대는 기존의 질서하에서 성공을 하고 싶었던 인물이기에 정약전보다는 정약용의 길을 택한다. 그 과정에서 스승과의 충돌, 사상의 부딪침 등이 영화적인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가볍게 접근하면 두 사람의 우정을 즐길 수 있고, 깊이 있게 텍스트를 파내려가고자 한다면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정약전 역의 설경구 배우를 <자산어보> 촬영 중에 만난 적 있다. 얼른 <자산어보>의 현장으로 가고 싶다며 본인은 한번도 그런 식의 표현을 해보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영화’가 될 것 같다는 말을 남겼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저 풍광이, 그림이 아름답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물론 그림도 기가 막히지만. (웃음) 사람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 표현하기 어려운 걸 마주했을 때 그 생경한 경험 앞에 ‘아름답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설경구 배우는 그냥 정약전 그 자체였다. 아마 일생일대의 연기를 보게 될 것이다. 창대 역의 변요한 배우 역시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연기를 보여줬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부분이 있을 거다. 아니, 그걸 연기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카메라 너머에 진짜 약전과 창대가 있었다. 관객도 그들의 아름다운 만남을 지켜보길 고대한다.
제작 씨네월드 / 감독 이준익 / 출연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도희 / 배급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 개봉 2020년
•시놉시스
신유사화로 흑산도에 유배 간 정약전(설경구)이 섬 청년 창대(변요한)의 도움을 받아 조선 최초의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 입신양명을 위해 성리학을 배우고 싶어 하는 창대는 어류도감 집필을 돕는 대가로 정약전에게 가르침을 구한다. 정약전은 그런 창대가 기특하면서도 안쓰럽다. 그렇게 정약전과 창대는 서로 가치관의 충돌을 겪으면서도 긴 세월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눈다.
•관전 포인트
깊숙이 자맥질할수록 많은 것들이 보인다. 흑산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정약전과 창대,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따라가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조금 더 파내려가보면 이건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는 거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치관의 충돌, 관점의 차이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로 이어진다.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재에도 충분히 공감 가능한, 살아 있는 이야기이자 보고자 하는 만큼 즐길 수 있는 두꺼운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