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김성훈 기자의 '사라진 시간' 리뷰 - 용감한 데뷔작이 나타났다
2020-06-23
글 : 김성훈

“당신과 가까이 있을 때면 왜 항상 새들이 나타날까요. 나처럼 그들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가봐요. 당신이 걸을 때면 왜 항상 별들이 쏟아질까요. 나처럼 그들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가봐요.” 카펜터스의 히트곡 <Close To You>의 가사 속 커플이 그렇듯이,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은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부부다. “난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났을까.”(이영) “난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당신 같은 여자를 만났을까.”(수혁) 손발이 다소 오그라드는 철지난 대사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애틋한 부부의 모습을 보면 전생에 얼마나 많은 덕을 쌓았을까 싶다.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영화의 초반부 속 부부의 에피소드는 지고지순해 낯설면서도 정답다. <사라진 시간>이 주인공인 형사 형구(조진웅)가 아닌, 멜로영화 속 주인공 같은 이 부부의 사연으로 시작되는 건 꽤나 의미심장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초등학교 교사 수혁이 한적한 시골 마을로 부임하면서 수혁과 이영은 전원생활을 한다. 둘에게는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이 하나 있다. 마을 주민인 해균(정해균)이 부부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되고, 그 비밀은 순식간에 마을에 퍼진다. 마을 사람들이 부부의 비밀을 두고 수군덕거리는 가운데, 부부는 의문의 화재 사고로 돌연 세상을 떠난다. 형사 형구는 이 사건을 수사하러 마을에 들어왔다가 이상한 일을 겪는다. 형사로서, 가장으로서 살아온 그의 삶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형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 형구일까. 그의 사라진 시간을 되찾는 방법은 없을까. 수혁과 이영 부부에게 벌어진 화재 사건과 형구에게 일어난 미스터리한 일은 대체 어떤 관계일까. 화재 사건이 계획된 범행이라면 누가 범인일까. <약속>(1998),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 <평양성>(2011), <클레어의 카메라>(2017), <풀잎들>(2018) 등 많은 영화에서 배우로 활약한 정진영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인 <사라진 시간>은, 놀랍게도 이야기가 던져놓은 많은 물음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데 관심이 없다. 관객과 머리싸움을 하거나 관객을 서사에 몰입시키는 종류의 이야기도 결코 아니다. 사건이 벌여놓은 불균질한 설정들을 굳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그대로 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사라진 시간>은 (홍상수(<클레어의 카메라> <풀잎들>), 장률(<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감독 같은 작가들과의 작업도 있었지만) 수많은 상업영화의 자장 안에서 연기해온 정진영 감독의 이력과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에너지로 가득한 영화다.

인물의 목표가 분명하고, 장르적 규칙에 따라 서사가 전개되는 보통의 상업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장르의 관습을 활용하는 동시에 무너뜨리면서 전개되는 독특한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뒤에 주인공 형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영락없는 형사물 속 한 장면이다. 조진웅이라는 배우 때문인지 그가 출연한 드라마 <시그널>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형구는 사건을 수사하기는커녕 이상한 일에 곧바로 휘말린다. 영화는 새로운 사건들이 불쑥 끼어들어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수시로 전환된다. 그러면서 장르에 대한 관객의 익숙한 기대감이 보기 좋게 무너진다.

이러한 방식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정진영 감독은 장르적 편견을 버리고 인물의 여정을 자유롭게 따라가고, 온전히 받아들이길 원하는 듯하다. 카메라는 형구가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괴로워하면서 자신이 누구였는지, 새로운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을 자유롭게 따라가며 담아낸다. 장르영화에서 목적이 분명한 인물들을 주로 연기해온 배우 조진웅이 황당한 상황에 놓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꽤 신선하고 낯설다. 형구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닌 까닭에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할지,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도무지 예측하기 쉽지 않아 흥미진진하다. 세상 만물이 그렇듯이 하나가 등장해 퇴장하면 다음이 또 나타나고, 계획에도 없던 일들이 불쑥 끼어들어 삶이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말이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트윈픽스> 시리즈처럼 형구가 자신의 꿈속에서 사건의 단서를 얻는 설정이 이 영화에는 당연히 등장하지 않지만, <트윈픽스> 시리즈가 그렇듯이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구석이 <사라진 시간>에도 있다. 수혁과 이영 부부에게 화재 사건이 일어난 것도, 형구의 삶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그들이 잠에 든 뒤에 벌어졌다. 화재 사건이 일어난 뒤 벌어지는 일들이 수혁과 이영 부부의 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으며, 형구에게 벌어진 이상한 일이 형구의 꿈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영화는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려주지 않고,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꿈은 현실 같고, 현실은 꿈 같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관객이 형구가 겪는 당혹스러움을 똑같이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관객에게 형구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형구처럼 그간 살아온 인생을 송두리째 잃고, 남들이 규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포자기할 것인가, 남들이 생각하는 삶을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모두 잊(은 척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인가.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주인공 형구와 감독 정진영이 겹치는 자리

자신이 살아온 삶이 순식간에 부정당한 채 새로운 삶을 마주한 형구는,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한 대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단 한번도 연출을 한 적 없다가 갑자기 시나리오를 쓰고, 현장을 지휘한 뒤 개봉을 앞둔 ‘감독’ 정진영과 여러모로 겹친다. 정진영 감독은 “배우일 때와 완전히 다른 작업이었다”라고 말한다. “캐릭터로서 평가받는 배우와 달리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작품과 분리가 되지 않는다. 그간 함께 작업한 감독님들이 개봉을 앞두고 정신없고, 일희일비하고, 안 좋은 평가를 받으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심정을 잘 알 것 같다. 그게 창작자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형구는 새로운 출발을 선택한 감독 정진영의 또 다른 자기반영적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낯설고 독특하며 그래서 용감한 데뷔작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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