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수영을 배웠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13살이었고, 남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등록한 기초 수영반은 나보다 어린애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대부분 서로 이미 친구이거나, 그날 바로 친구가 됐다. 그때 나는 낯가림이 굉장히 심했고, 그래서 그들 중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심지어 진도를 잘 따라가지도 못했다. 나는 열등생이었다. 반면 다른 애들은 수영을 정말 잘했다. 너무 신기했다. 다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배우는 거지? 나는 내가 있을 곳에 있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더더욱 주눅이 들었다. 선생님은 내가 답답했으리라. 그녀는 내게 자주 소리를 질렀고, 아이들 앞에서 면박을 줬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주 혼자 울었다. 하지만 계속 수영 강습을 받았다. 그건 내가 뭔가를 시켰을 때, 싫다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물속에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아, 정말 좋았다. 물이 찰랑거리며 피부에 와닿을 때의 느낌. 파란 젤리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 나는 자주 물속에 머리까지 집어넣고 숨을 참았다. 고요했다. 다른 세상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왜 강습이 없는 날에는 수영장에 안 가?”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강습이 없는 날에도 수영장에 갈 수 있고, 그걸 ‘자유 수영’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혼자 연습을 하는 날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도 선생님도 없는 날, 혼자 물속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고, 아주 많이 설렜고, 돌아오던 자유 수영일, 사람이 가장 없을 것 같은 시간을 골라 수영장에 갔다. 영화 <톰보이>에는 수영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 부분을 몇번이나 돌려보았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미카엘을 보았다. 이 아이에게는 비밀이 있다. 제목에서 암시되듯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이 아이는 ‘진실’, 그러니까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행동하고 싶어 한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 ‘리사’에게 그 모습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사건은 조금씩 커진다. 리사를 통해 다른 친구들을 사귀고, 그 아이들은 모두 미카엘을 좋아하고, 다 같이 어울리고, 그래서 미카엘이 지켜야 할 비밀은 점점 더 커지고….
사실 나는 이런 유의 영화를 보는 일을 꽤 힘들어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아이의 비밀이 사람들에게 폭로되고, 그 이후의 감정을 아이 혼자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아주 개인적인 것이 온 천하에 드러났을 때의 고통, 수치심, 분노. 대체로 이야기는 그 감정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관객은 아이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이해를 넘어 좀 심하게 몰입하는 유형의 관객이다. 그 감정 상태를 견디는 게 어렵다. 실제로 나는 <톰보이>를 보다가 여러 번 일시정지를 했고, 미카엘이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코니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해가 찬란하게 비치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참, 왜 아직도 벗어나지를 못할까.
나는 ‘성장의 순간’이 무섭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 순간은 개인적인 비밀이 모두에게 공개되는 순간이 아니다. 바로 그 직후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나는 <톰보이>를 보는 내내 긴장했다. 정체성의 문제, 거짓말, 비밀, 편견을 다룬 이야기에서는 늘 폭력이 등장했고, 그것은 주인공이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카엘의 비밀을 알아차린 부모님은 그 아이를 진실 앞에 세운다. 다행히도 내가 각오했던 만큼 잔인하지는 않았다. 미카엘의 부모는 아이를 정말 사랑하고, 그 애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엄마는 말한다. “너를 상처주려는 게 아니야.” 그때 나는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그 상황을 밖에서 바라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래. 상대적일 뿐이었다. 미카엘은 정말 괴로워한다. 그리고 정말 좋아했던 사람들, 친구들의 비난과 외면, 폭력적인 언행을 피하지 못한다. 때문에 미카엘의 엄마가 선택한 방법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사랑이 존재한다고 해서 다 괜찮은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평일의 이른 아침 시간, 수영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코끝을 감싸던 소독약 냄새, 몸에 부드럽게 감겨오던 파란 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던 물 속. 오직 고요함만이 존재하던 그곳. 나는 드디어 내가 있을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심했다. 이후 나는 거의 매일매일 수영장에 갔다. 그러면서 조금씩, 강습일 날 집에 돌아오며 울지 않게 됐다. 연습을 하니 실력이 늘었고, 선생님은 내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고, 혼나고 면박당하고, 수치심을 느끼다가 안도하고, 위로를 받으며 각자의 시간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무사히 기초 수영반을 마쳤고, 다음 진도반을 등록했다. 그곳에는 나와 동갑인 아이가 있었다.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미카엘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무엇을 선택하고, 감당하며 살게 될까. 그건 알 수 없다. 영화는 그에 대해 어떤 힌트도 주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장면만을 남겨놓는다. 어떤 질문과 대답. 믿음과 배신은 늘 같이 붙어다니고, 때문에 우리는 늘 폭력의 순간을 무방비하게 맞이한다.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느낌을 자주 받는다. 어쩌면 그게 삶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이걸 몰랐다. 누구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누가 일러줬다고 해서 배울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어떤 목소리들은 늘 있었다. 다 지나가. 별 것 아니야.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네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야. 네가 있을 곳을 찾게 될 거야. 당시의 감정 상태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말들. 어쨌든 그 순간들은 지나갔다. 나는 지나왔다. 때문에 앞으로도 힘든 순간들을 잘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 믿으려 한다. 수영장에서 보낸 매일매일 덕분에 깨달았다. 직접 부딪히고 겪고, 연습하고, 뭔가를 극복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아지는 순간은 분명 있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때, 내가 있을 곳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종종 발코니로 나가 한숨은 쉴 것이다.
마지막으로 ‘잔’의 존재를 슬쩍 말하고 싶다. 나는 ‘기대와 달리’ 이 영화의 결말을 꽤 낙관적으로 읽었다. 그건 오직 미카엘, 그러니까‘로레’를 둘러싼 사람들 덕분이었는데, 그중에서도‘잔’때문이었다. 이 아이들이 서로를 돌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실 절망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별것 아니다. 등을 쓰다듬는 그 진심어린 작은 손길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