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삼육은 한국영화 초창기의 나운규(<아리랑>(1926)), 안석영(<노래하는 시절>(1930))과 해방 후의 최금동(<새로운 맹세>(1947)), 오영진(<시집가는 날>(1956)), 김지헌(<젊은 표정>(1960)), 신봉승(<갯마을>(1965)) 등의 뒤를 잇는 대표적인 제4세대 시나리오작가다.
1966년 30살 때 최영철 감독의 <그늘진 삼남매>의 각본으로 영화계에 진출한 이후 <어떤 눈망울>(감독 이강천, 1968), <소문난 잔치>(감독 고영남, 1970) 등 15편에 이르는 시나리오를 썼으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가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한 <소장수>(1971)부터였다. 노름빚 대신 빼앗아온 여자 옥분(임지성)을 다시 노름판의 담보로 내놓는 만석(박노식)이라는 비정한 소장수의 이야기다. 모두 97신으로 구성된 토속적인 이 시나리오는 <명동 노신사>(1970) 등 명동 시리즈와 <실록 김두한>(1974) 등 연작물을 내놓아 액션물에 강한 면모를 보인 김효천 감독의 대표작이 되었다.
윤삼육의 역작, <피막>
이처럼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과 여성의 희생을 다룬 <소장수>로 탄력을 받은 윤삼육은 분단 한국의 비애를 무속신앙과 토속적인 정서로 녹여낸 윤흥길 원작, 유현목 감독의 <장마>(1979)에 이르러 완전히 입지를 굳히게 된다. 6·25전쟁 동안 서울 외가쪽 식구들이 시골에 있는 친가로 피난 오면서 두 사돈간에 벌어지는 갈등과 비극을 131신의 영상언어로 엮어낸 이 작품의 성과는 상투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며 우익운동을 하다가 국군이 된 외삼촌(강석우)과 얼결에 빨치산이 된 친삼촌(이대근)으로 인해 서로 반목하게 된 두 사돈은 기다리던 친삼촌 대신 큰 구렁이가 대문 안으로 기어들어오면서 화해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이 구렁이를 친삼촌의 혼령으로 여긴 외할머니가 음식을 차려 정성껏 달래 보냄으로써 멀어졌던 친할머니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무속신앙의 일면을 보여줌으로써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소장수>와 <장마>를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윤삼육은 이두용 감독의 <피막>(1980)에 이르러 절정기에 이른다.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고 경직된 영화 정책으로 현실 고발적인 영화 제작이 불가능한 시기였다. 토속적인 소재를 추리극 형태로 엮은 <피막>은 이런 사회의 흐름 속에서 영화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종손의 병을 고치는 데 영험하다 하여 양반 가문의 노마님(황정순)에 의해 선택된 젊은 무당 옥화(유지인)가 원혼의 흔적을 찾는 동안 마주치는 운명적인 선택을 그린 것으로, 이 과정에 집안의 청상과부인 둘째 며느리(김윤경)와 정을 통했다가 죽임을 당한 피막지기(남궁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이를 복수하기 위해 피막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그 속에 뛰어든다. 다양한 형태의 굿거리 등 이승과 저승을 매개한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역작으로 구성력이 돋보였다. 그는 잇따라 <깊은 밤 갑자기>(감독 고영남, 1981), <뽕>(감독 이두용, 1985), <아다다>(감독 임권택, 1987) 등 가작을 내놓았다. <깊은 밤 갑자기>는 곤충학자(윤일봉)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초자연적인 공포와 광기를, 나도향 원작의 <뽕>은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욕망과 이기주의적 속성을 토속적인 에로티시즘으로,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를 원작으로 한 <아다다>는 벙어리 여인의 박복한 삶을 통해 남성 중심적 봉건사회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윤삼육은 첫 각본인 <그늘진 삼남매> 이후 <표절>(1969)까지 33년 동안 앞에 언급한 작품을 포함해 <무기와 육체>(감독 황학봉, 1968), <고교얄개>(감독 석래명, 1976),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감독 임원식, 1977), <최후의 증인>(감독 이두용, 1979), <사약>(감독 김효천, 1984), <돌아이>(감독 이두용, 1985), <내시>(감독 이두용, 1986),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쳤다>(감독 송영수, 1988) 등 모두 154편을 남겼다. 여기에는 공동 각본인 <아내들의 행진>(감독 임권택, 1974)과 <불꽃>(감독 유현목, 1975), <종로부르스>(감독 김효천, 1982), <장군의 아들>(감독 임권택, 1990) 등이 포함된다.
윤삼육은 1937년 5월 25일 무성영화시대부터 활약한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윤봉춘(1902~75)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윤봉춘이 <오몽녀>(감독 나운규, 1937)에 출연한 36살 때 얻은 늦둥이였다. 호적상의 이름은 태영이다. 윤삼육의 할아버지 윤득주는 평양에서 주전(鑄錢)을 만들던 기술자였으나 동학군에 가담한 후 쫓겨다니다가 피신처인 함경남도 정평(定平)에서 아들 봉춘을 얻었다. 윤봉춘의 지사적 기질이 어디서 왔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버지가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듯이 윤삼육도 2남 4녀 중 맏이로 출생했다. 윤봉춘의 어머니는 아들을 정평에서 가까운 회령교회에 다니게 했다. 이를 계기로 자연히 이곳 신흥보통학교 고등과에 들어가고, 이 학교에서 평생의 친구가 된 나운규를 만난다. 그가 10살 때였다. 나운규는 가끔 윤봉춘의 집에 놀러가서 밥을 축내고 한 이불 속에 자기도 했다. 그 뒤 학생 신분으로 함께 독립군의 지하운동에 가담, 선전물을 운반하는 이른바 ‘도판부(圖版部) 사건’에 연루돼 고초까지 겪었다. 윤봉춘을 영화계로 이끈 것도 나운규였다. 1927년에는 <아리랑>으로 스타가 된 나운규가 그를 서울로 불러내 <들쥐>에 출연시켰다. 이를 계기로 <금붕어>(1927), <옥녀> (1928), <사랑을 찾아서>(1928), <무화과>(1935), <오몽녀> 등에 나올 수 있었다. 모두 나운규 감독 작품이었다. 그러나 윤봉춘은 <도적놈>(1930)을 전환점으로 해 메가폰을 잡았다. <도생록>(1938), <신개지>(1942) 등이 그 산물이다. 해방 후에도 활동을 이어나가 <윤봉길 의사>(1947), <유관순>(1948), <애국자의 아들>(1949), <논개>(1956) 등 20여편을 내놓았다. <유관순>은 세번이나 영화화할 만큼 그에게는 애국지사적인 면모가 두드러졌다. 1956년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장을 역임하고 1963년에는 초창기 영화원로들의 중지를 모아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상연된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날’로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영화인 가족의 활약상
이와 같은 가계를 이은 윤삼육은 영화계에서 유일하게 3대에 이르는 ‘영화인 가족’을 이루고 있다. 여동생인 배우 윤소정(1944~2017)과 그 부군인 오현경과 함께한 2대에 이어 시나리오작가인 장녀 윤선희와 조카 배우인 오지혜(윤소정의 장녀)까지 내리 3대째다. 그는 시나리오 외에 <참새와 허수아비>(1983),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 달이 뜨는가>(1991), <살어리랏다>(1993), <표절>(1999) 등 네편의 연출작을 남기고 7월 2일 오전 패혈증으로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앞서간 배우 신성일과 같은 정축생(丁丑生) 83살이었다. 윤삼육은 멜로, 액션, 시대극, 하이틴, 미스터리, 문예물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든 전천후 영화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