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 <증강 콩깍지> <하얀 까마귀>는 미래이지만 현시대의 기술 진보와 연관이 깊은 소재를 다룬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가상현실(VR)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발전을 거듭해가고 있다. <연애의 온도> <특종: 량첸살인기>를 연출했던 노덕 감독의 <만신>은 오차범위 5% 내외로 높은 적중률을 보이는 인공지능 운세 서비스 ‘만신’을 신격화하고 맹신하는 사회에서 앱 개발자를 직접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선물> <패션왕>의 오기환 감독은 가상 연애 앱 ‘증강콩깍지’ 때문에 현실 커플보다 가상 커플 수가 더 늘어난 근미래, 가상에서 마음이 맞던 커플이 현실에서 만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린 독특한 로맨스 <증강 콩깍지>를 연출한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연출한 장철수 감독의 <하얀 까마귀>는 과거 조작 논란에 휩싸인 게임 BJ가 명예 회복에 나섰다가 게임에 갇히는 스토리를 다룬다.
-<SF8>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오기환 민규동 감독의 주도하에 지난해 2월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다. MBC와 함께 원작이 될 SF소설을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창 OTT 기반의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차기작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드라마 작업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개인적 판단도 있었다. 또한 이게 <멜로8>나 <스릴러8>가 아닌 <SF8>이었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명분이 훨씬 강하지 않았나싶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러닝타임이 40분이나 2시간이나 결국 걸리는 시간은 똑같다는 교훈을 얻게 됐지만. (웃음)
노덕 지난해 말쯤 제안을 받고 12월부터 본격적으로 <만신>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원래 SF 장르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기때문에 크게 재지 않고 고민 없이 선뜻 참여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영화감독으로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다른 영상매체에도 늘 열려 있다.
장철수 나 역시 지난해 말에 제안받았다. 이게 단막극인지, 중편영화인지, 아니면 또 다른 틀이 있는 건지 형식에 대한 고민이 좀 있었지만 SF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예산도 많이 들고 영화계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장르다 보니 이 기회를 통해 꼭 해보고 싶더라.
-원래 SF 장르에 관심이 많았나.
오기환 한국에서 SF를 다룬다는 게 왜 먼 일처럼 느껴졌을까 생각해보니 예전에는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더라. 지금은 한국의 CG 기술이 중국영화 <유랑지구>를 가능케 한다. 세계적으로 가격 대비 CG 효율이 가장 높은 게 한국이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우리의 기술력 수준이 꽤 높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에, 발굴되지 않은 원석 같은 스토리들도 있었던 거다. 그리고 SF는 ‘사이언스 픽션’의 줄임말이지만, 우리가 과학을 본질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그래서 말장난으로 SF가 ‘슈퍼 판타지’의 줄임말이라고 얘기한다. 과학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판타지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탈출구 같은 장르가 아닐까.
노덕 다른 장르였다면 그냥 단막극 프로젝트로 느껴졌을 텐데, SF라고 하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SF 장르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SF도 안으로 들어가보면 종류가 다양하다. 감성 SF, 우주 SF…. 관심 있던 분야의 SF물을 관객 평가나 흥행에 대한 부담 없이 해볼 수 있다는 게 선택에 크게 작용했다.
장철수 몸통이 되는 것은 플롯과 캐릭터고, 장르는 그냥 옷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통이 좋으면 장르는 안 따지고 좋아하는 편이다. 우연히 받은 제안인데 그게 SF라서 좋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SF8> 프로젝트는 전반적으로 신선한 신인배우들을 캐스팅하거나 기성배우들도 기존에 보여주지 않았던 캐릭터와 매치시킨 결과물이 많아 흥미롭다. <만신>의 이연희는 지금까지 한번도 보여주지 못한 이미지로 등장하고, <하얀 까마귀>는 EXID 출신인 안희연(하니)이 주인공을 연기하며, <증강 콩깍지>의 유이와 최시원의 조합도 흥미롭다.
오기환 최시원씨는 중국에서 영화를 찍은 적이 있지만 한국에선 우정출연 정도가 전부다. 유이씨는 드라마 출연 경험만 있다. 최근에 믹싱 작업을 해주던 분이 “이런 배우들이 있는데 왜 영화에서 보지 못했을까”라며 이들의 연기에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두 사람 모두 저평가된 배우라고 생각한다. 영화감독들이 TV 주력 배우들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와 드라마, 플랫폼의 경계가 무너지고 미디어가 서로 혼재되면서 드라마를 주로 하던 배우들이 영화를 할 수 있고, 영화를 주로 하던 배우들이 드라마를 할 수 있다. 두 배우는 내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작품을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나 역시 이들 덕분에 독특한 기회를 얻었다.
장철수 배우들이 이 프로젝트를 굉장히 낯설게 생각해서 처음엔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다. 민규동 감독님이 안희연씨를 개인적으로 안다며 착하고 성실한 배우라고 소개해줬다. 이미지도 <하얀 까마귀>와 잘 어울리고, 실제로 아이돌 출신이다 보니 네티즌 댓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경험이 있어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동일시가 잘된다고 판단했다.
노덕 여자가 극을 이끄는 작품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그리고 싶은 비주얼이 있었다. 이미 터프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가 나오면 오버스럽게 표현될 것 같아서, 기존에 이런 모습이 많이 비치지 않은 배우들을 봤다. 이연희씨의 경우 러블리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프로필이나 커리어를 살펴보면 도전을 많이 한 배우다. 보기보다 독기 있고 카리스마 있는 성격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그 생각을 확인하고 싶었다. 직접 만나보니 기존에 보여준 캐릭터들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남자 캐릭터의 경우 콤비플레이를 해줘야 하는 입장이라 순수한 매력이 있는 남자배우가 필요했다. 이동휘씨가 적합했다.
-증강현실과 앱,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게임이 앞으로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나갈 거라고 보나.
오기환 작품 들어가기 전에 ‘인류의 미래엔 결국 디바이스가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글을 봤다. 각막에 디바이스가 이식되고, 신경이 센서와 연결되는 식으로 말이다. <블레이드 러너>나 <토탈 리콜>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멀게 느껴졌던 미래가 지금은 동시대의 일이 됐다. 가령 뇌에 지식을 탑재할 수 있는 기술이 마련돼서 다들 지적 수준이 상향평준화가 된다면 그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다음 미래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아까 SF는 ‘슈퍼 판타지’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슈퍼 리얼리티’가 될 수 있는 거다. <SF8> 프로젝트를 끝내고 난 후 이게 멀지 않은 미래 같아서 양가적 감정을 갖게 된다. 디바이스가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니 섬찟하다.
장철수 지금까지 증강현실은 외부의 비주얼을 만들어 보여주며 체험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하얀 까마귀>는 미래에 어떤 사람의 머릿속을 파헤쳐서 그 내면을 타인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올지 모른다고 가정한다. 그런 시대가 정말 온다면 거짓말탐지기 같은 도구로도 쓸 수 있을 거다. 인간에게 되게 잔인한 일이다.
노덕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 자체는 보편화돼 있다. 누가 어떤 발상을 갖고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기술도 다르게 활용될 수 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고 그것이 세상을 바꿔버린다. ‘만신’ 같은 앱이 나오면 일종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이미 상상만 하던 기술이 현실화되고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공존하며 함께 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