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영화 '조제'를 위한 변명 - 한국영화 '조제'는 이누도 잇신의 원작과 어떻게 다른 길을 가나
2020-12-15
글 : 송경원
예쁘게, 덧없을지라도 예쁘게

울타리가 무너질 때

매번 누가 이런 걸 조사하나 싶은 것만 깨알같이 찾아내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상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데까지 10초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진정 놀라야 하는 건 10초라는 짧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을 빼앗긴다는 불가항력의 사태 그 자체다. ‘첫눈에 반한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강조하고 싶은 건 어쩌면 짧은 시간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의 크기일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세계가 세차게 흔들린다는 신호. 나의 세계로 누군가가 뛰어들어온다는 통제 불가능한 사건. 하지만 사랑 한가운데에 있을 때 우리는 대체로 그 감정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사랑이라고 단정지으면 왠지 날아가버릴 것 같으니 그냥 ‘너에게 빠진다’ 정도로 해두자.

누군가에게 빠지는 일은 실은 빈칸을 만드는 작업이다. 나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 안에 안착하는 과정은 교통사고와 같아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동안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랑에는 현재가 없다. 오직 빠지기 전과 후, 그러니까 검은 밤바다 같은 미지를 앞둔 망설임과 빠져나온 후 빈칸을 되돌아보는 기억으로 존재한다. 김종관의 <조제>는 그 공백과 침묵의 시간의 한 귀퉁이에서 곁불을 쬐려는 듯 가만히 쭈그려 앉으며 문을 연다.

한 여자가 휠체어에서 튕겨나와 넘어져 있다. 망가진 휠체어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리어카를 발견하고 여자를 태운다. 리어카를 끄는 남자와 뒤에 탄 여자, 그리고 망가진 휠체어. 어색하고도 특별한 만남. 이상할 법도 하건만 어딘지 자연스럽게 시작된 인연. 영석(남주혁)과 조제(한지민)의 시간은 그렇게 서로의 울타리를 부순 교통사고와 함께 열린다. 그날 이후 영석은 조제가 계속 눈에 밟히는 듯 조제 주변을 맴돈다.

이건 보통의 사랑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만나고, 문득 상대에게 스며들었다가, 한참을 함께한 뒤 결국엔 헤어지는 이야기다. 옆구리가 쓸쓸해지는 가을이란 계절이 생겨난 이래 무수한 이야기 속에서 수없이 반복된 그저 그런 연애담. ‘그래서 행복해졌습니다’라는 대리 만족의 해피엔딩도 아니고, 애정이라는 운명의 장난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깊숙이 탐구해가는 것도 아닌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비범한 지점은 끊임없이 시선을 붙들어둔다는 것이다. 다음 사건이 궁금해지는 이야기의 동력과는 다르다. 별거 없는데 괜히 눈길이 가는 마음. 카메라는 영석이 왜 조제에게 끌렸는지 설명하는 대신 서로의 울타리가 허물어지는 순간이 오기까지 그저 가만히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예쁘게 부스러지는 부스러기들을 하나씩 주워 모으다 보면 어느새 하나가 된 둘이 있다.

<조제>가 계속 눈에 밟히는 이유

되도록 피해가고 싶지만 아예 외면할 순 없을 것 같다. 김종관의 <조제>와 이누도 잇신의 <조제…>는 마음의 형태를 그리는 방식이 다르다. 이누도 잇신의 <조제…>는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상의 노래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사람이 있다. 그녀와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츠네오(쓰마부토 사토시)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사랑보다는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읊조린다. 때문에 츠네오의 시점에서 조제를 되돌아본다는 행위가 중요하다.

이누도 잇신의 <조제>는 사랑이 지나간 흔적, 빈자리로 마음의 부피와 무게를 가늠한다. 엔딩의 두 장면. 조제와 헤어진 후 산뜻한 척 집을 나서던 츠네오는 서럽게 울음을 터트린다. 무엇을 향한 울음인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지만 우리는 거울 같은 그 장면을 통해 우리가 지나온 날들, 도망쳐온 비겁하고 서러운 순간들을 마주한다. 반면 조제에게 헌사된 장면은 홀로 집에서 밥을 지어 먹는 모습이다.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방 안은 적막하고 고독하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뒤가 생략되어 있다. 고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 고독하지 않다고 자신을 방어했던 조제는 이제 기꺼이 고독하기로 한다. 이 모든 것은 츠네오가 조제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아봄으로써 완성되는 사랑의 기억들이다.

반면 김종관의 <조제>는 시점이 혼란스럽다. 영석의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 영화는 조제의 내레이션으로 문을 닫는다. 초중반 영석의 시점으로 조제를 관찰하던 영화는 눈 내리는 밤, 영석과 조제가 함께 있기로 결심한 그 밤부터 조제로 초점을 옮긴다. 그러나 웬일인지 조제의 독백이 늘어날수록 이야기는 편편해지고, 선명하던 사랑의 형태마저 뿌옇게 흐려진다. 서사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화자의 이동은 명백한 실패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조제>는 누군가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몰라. 이누도 잇신의 <조제>가 ‘되돌아보는 이야기’라면 김종관의 <조제>는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정성스럽게 수집한 보석함이다. 다만 여기서 아름다움의 기준은 철저히 조제의 내면을 따른다는 게 중요하다. 영석이 책으로 가득한 조제의 방을 보며 감탄하자 조제는 으쓱함과 쓸쓸함의 중간쯤 걸터앉은 표정으로 말한다. “할머니가 주워온 것들에서 골라낸 거야. 사람들은 책을 버리니까. 사람들이 잔뜩 버린 쓰레기 책들이 나한테는 용도가 있는 거지. 여긴 버려진 것들의 쉼터 같은 곳이야. 내가 이뻐해주지.”

<조제>는 낯설고 비루해 보였던 것들이 점차 소중해지는 시간을 따라가는 영화다. 영석은 선물받은 햄 세트를 핑계 삼아 조제를 보러 가서 전한다. “난 안 먹는데, 안 먹으면 쓰레기니까.” 조제는 답한다. “쓰레기를 줘서 고맙다.” 할머니와 사는 낡은 집은 조제의 성이다. 영화 초반 조제의 집을 보여줄 때 우리는 쓰레기 더미 속에 묻힌 삶을 목격한다.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의 집은 변두리로 밀려난 궁핍한 생활상을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시선으로 전한다.

왜 <조제>인가. 왜 이 영화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화답은 영화가 수집한 공간의 디테일에서 묻어난다. 영석과 조제의 만남이 이어지며 바뀌는 것은 바로 이 공간과 소품들을 묘사하는 온도다.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보이던 것들이 점차 조제의 세상을 둘러싼 보물들로 보이기 시작할 때, 영석을 비롯한 관객은 어느새 조제의 울타리 안에 들어서는 셈이다. 관계란 무엇인가. 결국 서로의 쓸모와 의미로 자리 잡는 과정이다. <조제>는 누군가의 관심과 손길이 닿은 순간 더이상 잡초가 아닌 꽃이 될 수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다. 가난한 지방대생의 현실이나 취업에의 압박, 복지의 사각지대 등 한국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실감 위에서, 김종관의 카메라는 고요하고 담담하게 서로의 쓸모가 되는 순간들을 채집한다. 물론, 꽃도 언젠가 진다.

이제 괜찮다는 말

밋밋하거나 인물이 잘 보이지 않거나. <조제>의 아쉬움을 지적하는 평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뉘는 듯하다. 조제가 어떤 사람인가. 영석은 왜 조제에게 빠지나. 조제의 매력이 무엇인가. 두 사람은 왜 헤어질 수밖에 없나. 영화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대신 조제의 울타리 안으로 우리를 초대해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진 않겠다. 다만 울타리 안에서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올 법할 기억을 마주한다. 평범하고 심심해서 더 예쁜 순간들. 영석과 조제의 만남은 필연도, 대단한 사건도 아니다. 그저 만나고, 고독을 나누고, 마음이 다한 뒤 헤어진, 그뿐인 이야기. 그러나 이 범상한 기억들을 기어코 예쁘게 기억하려는 의지가 이 모든 순간을 어여쁘게 만든다.

김종관의 <조제>가 이야기를 닫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기억이 어디에 맺혀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 “와, 꽃들이 죽는다. 예쁘게, 조용하게 죽는다.” 예쁘게, 덧없을지라도 예쁘게. 사랑, 아니 마음을 빼앗긴다는 기적은 그런 ‘예쁨’을 향한 발버둥 속에 삶을 지탱한다. 기억 속에서 내가 더이상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이제 괜찮아. 앞으로도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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