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선한 이미지의 배우는 한계가 있다고, 불퉁하고 공격적인 모습도 내재돼 있어야 세계의 매몰찬 풍경까지 선명히 그려내는 진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박보검 배우는 오랜 편견에 대한 반가운 반례다. 누굴 만나든 친절을 베풀고 세심하게 챙기기로 유명한 그는 선의의 힘을 신뢰하는 연기자다. 어쩌면 매 작품마다 박보검이 연기하는 인물이 몇마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맥락으로 구현되는 이유도 평소 타인을 관찰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그의 성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복>에서 박보검은 줄기세포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인류 최초의 복제 인간을 연기한다. 선의의 힘을 믿는 배우가 보여주는 서늘한 무표정에는 왠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거라 짐작게 하는 설득력과 페이소스가 서려 있다. 군 입대를 한달 조금 넘게 앞둔 7월의 어느 날, 박보검이 영화와 배우 자신의 이야기를 사려 깊고 진솔하게 들려줬다. 지면에 실리지 않은 미공개컷도 함께 공개한다.
-<서복> 프로젝트가 처음 기사로 언급된 건 2017년 1월이에요.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그간 있었던 일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그때 회사 관계자분들이 <서복> 시나리오를 보여줬어요. 당시 <서복>의 비주얼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고, 이용주 감독님이 계속 시나리오를 수정하실 거라는 얘기도 함께 들었어요. 뭔가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고, 내가 과연 복제인간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을 끝낸 후 학업에 전념해서 대학을 확실히 졸업하고 싶었어요. 지금만큼 자신감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였던 부분도 있어서 정중하게 고사했던 기억이 나요. 이후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여러 번 고쳤고, 공유 선배님이 <서복>에 출연하게 됐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그리고 보검 씨도 함께 하지 않겠냐며 다시 제안을 받게 됐어요.
-그렇게 캐스팅이 성사가 된 것을 두고 어떤 네티즌들은 이용주 감독의 ‘존버’가 성공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 단어를 이용주 감독님 때문에 알았어요. 팬분들이 그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요. 그거, 은어잖아요. (웃음)
-공유와 박보검을 같이 캐스팅하다니, 감독님 진짜 복 받았어요. 역시 ‘존버’한 보람이 있어요.
=아니에요. 복은 제가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웃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최택은 친구들에게 ‘쌍문동 희동이’라 불리고, <남자친구>의 진혁은 “청포도 같다”라는 말을 들어요. 연기한 입장에서 <서복>의 서복은 어떤 친구였나요.
=음, 하얀 도화지 같았어요. 어떤 때도 묻지 않고 아주 깨끗한. 책으로 배운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씨앗만 먹고, 잠도 자지 않잖아요. 연구소에서 모든 것을 관리해주니까 정갈하고 튼튼한 몸을 갖고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건장하고 체격이 좋다는 느낌은 아니고요. 물리적인 나이는 10살이지만 지능 같은 성장 속도는 2배 더 빨라요. 감독님이 앳된 소년의 얼굴도, 간혹 청년 같은 모습도 보였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러한 외모를 유지하는 데 포커스를 뒀어요. 헤어스타일이 후반에 바뀔 예정인데,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사실 머리를 더 짧게 깎고 싶었는데 그때 모습이 딱 적당하다고 말씀해주셔서…. (웃음)
-설정은 다르지만 <A.I.>(2000)의 인공지능 로봇도 왠지 연상됐어요. 혹시 연기에 참고한 작품이 있나요.
=직접적인 레퍼런스가 되진 않았지만 감독님이 꼬마(미래의 레인메이커가 되는 10살 소년 시드.-편집자)의 눈빛을 관찰해보라며 라이언 존슨 감독의 <루퍼>(2012)를 추천해주셨어요. 현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자는 메시지도 <서복>과 일맥상통하더라고요.
-서복은 아주 높은 뇌파를 통해 전자기력을 발생시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서복이 슈퍼히어로는 아니니까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했을 듯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막 소리를 질러야 하나? 감독님이 서복은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직접 표현하지는 않는 캐릭터라고 설명해주셔서 눈빛이나 미세한 떨림으로만 서복의 능력을 연기했어요. 카메라가 제 눈을 많이 잡아줬는데, 영화에 어떻게 나올지 너무 궁금해요. 눈빛으로만 표현한 서복의 감정이 관객에게 잘 전달이 됐으면 좋겠어요.
-시나리오를 보니 초반에는 서복과 동행하게 되는 정보국 전직 요원 기헌(공유)에 비해 서복의 감정을 짐작할 만한 구체적인 지문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냥 감정을 빼기만 하면 자칫 연기를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으니 캐릭터를 표현하기 상당히 어려웠을 듯해요.
=서복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다가 뒤로 갈수록 표현하는데, 그게 기헌을 만나고 삶과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전환점을 맞는 거예요. 초반에는 서복이 일차원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듣는 이에겐 심각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게 포인트예요. 그리고 겉으론 감정이 없어 보여도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씨앗처럼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저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연기하긴 했어요. 카메라가 서복만 지켜보고 있으니 연구소를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은 애초에 갖지도 못했겠지만, 서복 역시 삶에 대해 고민해요. 나는 왜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일까? 나는 누구지? 죽지 않는 서복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무한한 삶이 궁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고, 연구소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이용하려는 것만 같죠. 이런 고민은 하지만 밖으로 크게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연기했는데, (멋쩍은 듯 웃으며) 잘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게 조금씩, 설핏 감정이 드러나는 신을 감독님이 잘 잡아주셨어요.
-기헌과의 케미스트리를 기대하는 관객이 많아요. 서복과 임세은 박사(장영남)의 묘한 관계도 주목할 만해요.
=원래 공유 형의 작품을 재밌게 보던 팬이었어요. 특히 형이 출연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제일 좋아했어요. 그런 형과 함께 작업하게 되다니! 초반에는 서복이 기헌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경계하는데, 기헌과 서복이 가까워지면서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저와 형의 호흡도 잘 맞았던 거 같아요. 원래 신 순서대로 촬영하지는 않잖아요. 공유 형이 동적인 감정을 전혀 이질감 없이 표현하며 장면을 연결하는 것을 보면서 옆에서 많이 배웠어요. 형에게 조언도 구하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작품을 통해 되게 좋은 선배이자 형을 만난 것 같아요. 또 몇년 전에 장영남 선배님이랑 함께 연기하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이루어졌어요. 진짜 신기해요. 선배님이 서복의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만져주고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서복을 생각하는 거예요. 임세은 박사는 서복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잖아요. 선배님과 눈을 마주치면 미안한 마음도, 고마움과 애틋함이 전부 느껴져서 연기하면서 되게 뭉클했어요.
-가장 흥미롭던 대목이 서복이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시퀀스였어요. 그동안의 박보검 배우는 대체로 피 흘리며 아파하는 쪽이었는데!
=CG가 추가되는 신이다 보니 상상하며 연기해야 했어요. 잘하고 싶고 흥미롭더라고요. 아, 누군가를 해치는 게 흥미롭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웃음) 제가 가진 기와 능력을 갖고 무언가를 압살해버리는 느낌이 연기할 때 재밌었어요. 그만큼 어려움도 따랐지만요.
-그렇게 상상하며 연기해야 하는 신이 많은 작품이에요.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 박보검 배우는 대본을 철저히 연구해서 성실하게 준비해오는 타입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마음먹은 대로 안 하면 후회하는 징크스가 있다고 배우 자신이 말한 적도 있고요. 이번엔 어땠나요.
=저와 감독님이 생각한 결이 조금 달랐는데, 거의 감독님을 믿고 갔어요. 감독님이 확실하게 원하는 그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경험을 했어요. ‘감독님이 원하는 그림이 이런 거구나’ 하고 제가 찾아가고, 그 와중에 제가 의견을 말하면 그걸 받아들여주고 그렇게 현장에서 서로 밸런스를 맞춰갔어요.
-결국 <서복>은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을 담은 작품이에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에서 자라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어요.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생명을 연장하려고 해봤자 어차피 죽을 목숨이에요. 태어날 땐 순서가 있어도 죽을 땐 순서가 없고, 뭔가를 더 쟁취하려고 발버둥쳐도 죽을 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해요. 성경에 욕심이 과하면 죄를 낳고 죄가 과하면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 있어요. 인간의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요.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면서 새로운 판단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생명과학과 기술 발전의 영향, 과학윤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고, 서복이 신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욕망에 도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건 확실히 짚어주는 영화가 될 것 같아요.
-박보검이라는 배우는 ‘선한’ 이미지와 모두에게 호감을 얻는 ‘웃는 얼굴’이 연기할 때 정말 좋은 쪽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갑자기 표정이 사라지거나 말간 미소가 역설적인 의미를 갖게 될 때 캐릭터의 입체성이 잘 사는데, <서복>은 그 집결판 같은 작품이 될 것 같아 기대가 커요. 본인 얼굴을 어떻게 활용해야겠다는 ‘감’은 언제부터 잡았나요.
=직접 보여지는 부분은 스타일링으로 변주를 줄 수 있고요, 감독님과 작가님이랑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평소엔 거울을 보고 표정을 바꿔가며 얼굴이 어떻게 보일지 관찰을 많이 했어요. 제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선배님들이 좋은 연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걸 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시간도 있었고요. 그리고 예전엔 대본을 읽고 그냥 제가 받았던 느낌 그대로 연기했어요. 작은 배역이라도 저에겐 전부 큰 역할로 다가왔고 ‘내 것만 잘하면 된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감독님과 선배 배우님들이 “굳이 여기서 모든 감정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감정을 보여주는 게 작품에 더 좋다”라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읽을 때 숲 전체를 생각할 수 있게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늘 제 연기를 돌아보고 연구하고 고칠 점은 고치려고 하는데, 결론적으로는 항상 어려워요. (한껏 울상 지으며) 연기는 너무 어렵더라고요. 아무래도 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니까요. 요즘엔 어떤 캐릭터를 맡더라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혹 해요.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일이고, 왠지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저는 박보검인데, 박보검을 지우고 다른 배역을 입는 것 자체가 어렵겠지만 그런 갈망이 생겨요.
-굳이 배우를 두 부류로 나눈다면, 자기를 완전히 지우는 것을 지향하는 배우가 있고, 본래 모습을 어떻게든 녹이는 배우들이 있잖아요. 지금까지의 박보검 배우는 후자로 보였어요. 하지만 연기 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둔 것 같네요.
=예전엔 ‘내가 갖고 있는 장점을 이 캐릭터에 녹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연기가 좀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물론 박보검과 캐릭터간에는 차이점이 있으니 걸음걸이나 행동, 습관, 말투 같은 것은 조금씩 다르게 표현했지만요. 저와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런 걸 잘 조절하며 연기하는 게 연기자의 임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군대 갔다 온 이후 내 모습이 조금 달라져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완전히 파격적인 장르를 추구하겠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메시지와 중심은 확실하게 지키되 이해할 수 있는 역할이라면 새로운 작품에 도전하고 싶어요.
-제대 후에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요.
=계속 고민이 돼요. 제가 아직 보여드리지 않은, 사람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어요. 제가 이해하지 못하면 연기할 때 항상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동안은 제가 느낄 수 있는 것만 연기했어요. 먼저 공감을 해야 보는 사람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만약 지금 제가 할아버지 캐릭터를 맡는다면 연기 연습하고 분장도 해서 어떻게든 연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할아버지가 평생 살아온 경험은 표현할 수 없어요. 시간이 축적된 만큼 마음이 담긴 그릇도 조금씩 할아버지의 눈에 씌어지는 건데 제 눈은 그것을 담고 있지 못해요.
-그리고 의외로 배포가 큰 것 같아요. 대사 칠 때 보면 한 박자 먹고 들어가는 독특한 리듬이 있는데, 그건 상대가 선배배우일 때도 그런 것 같아요.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더라고요. 이번에 공유 형도 그 얘기를 해줬어요.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연기에 확신이 생기지 않아요. 그래야 상대배우의 눈을 보며 얘기할 때 팽팽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데, 간혹 해이해지는 제 모습이 나오려고 하면 “정신 똑바로 차려!!!” 하고 스스로를 혼내요. (웃음) 저도 간혹 주눅 들 때가 있고, 그런 부분을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김성윤 감독님이 지적하고 잡아주신 적이 있어요. 중심은 항상 잃지 않으려고 해요.
-보통 착하고 남을 잘 배려하는 사람들은 강단 있기가 어렵다는 편견이 있는데, 박보검 배우는 굉장히 똑 부러지는 게 눈에 보여요.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는 게 보는 입장에선 신기해요. 사람이 강인한데 날이 서지는 않았어요.
=저를 너무 예쁘게 표현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언제나 상대를 배려하려고 노력했거든요. 그런데…. 제 마음이 왜곡되는 일들이 생겨요. 어려워요. 사람을 헤아리려고 했던 행동이 절 너무 쉽게 보이게 만드는 걸까요? “호의가 계속되니까 권리인 줄 안다”라는 영화 대사도 있잖아요. 저는 무조건 뭐든지 다 해주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배려해왔던 건데, 제 행동을 상대가 다르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도 있었어요. 이제는 좋고 싫다는 걸 확실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드라마 <청춘기록>을 촬영하면서 캐릭터에 흠뻑 빠져서(웃음), 사혜준은 맺고 끊는 게 정확한 인물이거든요. 요즘엔 현실에서도 정확히 얘기하려고 노력해요.
-학생 시절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박보검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 끝난 후 1년간 학업에 전념했죠.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배움을 얻을 수도 있었는데 굳이 학교로 돌아간 이유가 있나요.
=연기를 시작했을 때 선배님들이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현장에서 배우는 게 정말 좋아. 더 많은 경험을 하도록 해. 그런데 학교생활도 중요해. 대학에 간다면 연기 말고 다른 걸 전공해봐.” 그래서 뮤지컬공연전공으로 입학했어요. 춤·발레·보컬 발성을 배우면서 스트레이트로 학교를 다니고 졸업했어요. 배움 자체의 즐거움도, 배운 것을 현장에 접목시켰을 때의 즐거움도 커요. 기초를 탄탄하게 쌓고 다양한 것을 배우면 공사가 완공됐을 때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뮤지컬이나 뮤지컬영화도 하고 싶어요. 그렇게 내실을 다지고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학교생활을 감안해도 드라마 <남자친구> 전까지 공백기가 있었잖아요. 2년 정도 작품에서 볼 수 없었어요. 좀더 자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제일 아쉬운 게 그거였어요. 사실…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가려고 했거든요. 가족과도 이미 이야기를 나눴는데 음…. 회사에서 더 좋은 때가 있을 거라고 얘기해서 군대에 못 갔어요. 지금이라도 갈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한데…. (웃음) 저도 그 시간이 아쉬워요, 아깝고요. 그때 차기작을 적극적으로 고를 수 있었다면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선배님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에 함께하고픈 마음도 컸어요. 그동안 회사와 저의 소통은 제가 설득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저에게 어떤 작품이 들어오는지 확실하게 다 아는 게 아니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커요. 저도 모르게 들어왔던 뮤지컬도 있었더라고요. 회사와 좀더 이야기를 많이 나눴더라면 그 안에서의 배움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회사의 마음을 이해해요. 박보검이라는 배우를 잘 케어하고 서포트해서 제게 소중한 작품들을 만나게 해줬어요. 제가 배우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있고 연기적으로 돋보일 수 있는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을 거예요. 그때 제 의견을 좀더 피력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싶은 작품과 캐릭터를 솔직하게 다 얘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또 느꼈어요. 뭔가… 후회만큼 아픈 건 없는 것 같아요.
-박보검 배우가 영화를 더 많이 찍었으면 좋겠다고 많은 기자, 평론가들이 말하거든요. 하지만 “지금 충무로 분위기에는 어울리는 영화가 많지 않다. 젊은 배우가 출연할 만한, 다양한 작품이 나오면 좋을 텐데” 같은 말을 덧붙이곤 하죠.
=2014년 <씨네21>과 처음 만났을 때 대화의 주제가 ‘라이징 스타’였어요. 그때 절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그때 사진 찍어준 기자님을 오늘 만났는데, 제가 잘돼서 너무 좋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들어 한국영화의 장르와 캐릭터가 많이 열리고 있지만 이보다 더 스토리가 다양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항상 갖고 있어요.
-박보검 배우 또래 배우들이 욕심낼 법한 선택이 있어요. 예컨대 ‘남자 냄새 나는 진짜 배우가 됐다’고 인정받을 만한 마초적인 작품에 함께하는 것. 그런데 그 길을 가지는 않는 걸로 보여요.
=제가 어리고 표현할 만한 역량이 되지 않아서 누아르 장르는 잘 소화하지 못할 것 같아요. 반대로 풋풋한 감성을 담은 작품을 30대 이후에 연기한다면 젊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연기하고 싶어요.
-일기를 꾸준히 쓴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혹시 지금도 쓰나요.
=써요. 그런데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촬영이 있어서 조금 많이 빼먹었어요. (웃음) 최근에는 군대 가기 전에 정리해야 할 목록 같은 걸 일기장에 정리했어요. 통장이나 보험, 연금 같은 것들.
-오늘은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없으니 일기를 꼭 쓰는 걸로. (웃음) 어떤 내용을 담을 건가요.
=공유 형과 함께한 화보 촬영이 되게 좋았다~! (웃음) 사실 죄송한 마음이 커요. 군대는 저만의 인생 계획이잖아요. (<서복>은 박보검 배우의 군 입대 이전인 여름 개봉을 논의하다 코로나19로 일정이 연기됐다.-편집자) 공유 형과 무대 인사를 너무 하고 싶었고, 관객과의 대화(GV)를 해본 적이 없어서 관객과 만나서 얘기도 나누고 싶었어요. 이용주 감독님과 함께 방송 나와서 “우리~ 이렇게 만들었어요~” 라고 영화 소개하고,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이나 영등포 타임스퀘어! 레드 카펫에서 악수하고 사인해주고!! 제가 그걸 얼마나 해보고 싶었는지!!! (인터뷰 중 가장 목소리 커진 모습에 주변 폭소) 저랑 공유 형이랑 같은 영화에 나온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데 상황도 상황이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 제가 군대 간 사이에 나올 작품들의 홍보 의무를 다하려고 해요. 오늘 공유 형과 함께 촬영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 게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 지금 이 인터뷰가 너무 좋았다는 얘기도 꼭 쓸게요. (웃음)
-이루고 싶은 꿈을 적는 소망 다이어리도 있다면서요.
=예전에 “군대 빨리 가고 싶다”라고 쓴 건 지웠어요. (웃음) 최근엔 다른 아시아영화, 할리우드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 얘기를 써뒀어요.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를 함께 했던 심은경 배우가 <블루 아워>에 출연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에게 시나리오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외국 작품에도 출연하고 싶어요.
-입대 전 마지막 인터뷰라고 들었어요. 제대하면 30대가 되고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어때요.
=제가 선택하거나 혹은 회사가 설득해서 맡게 해줬던 모든 작품들을 잇는 연결고리가 있어요.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 가족·친구·연인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말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자는 메시지가 들어 있어요. 악한 역할… 도 열심히 준비하면 저도 잘할 수 있어요.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캐릭터가 가진 사연에 공감을 해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고, 무자비하게 칼로 찌르고, 잔인하게 죽이는 작품들도 있잖아요. 볼 때는 이 작품을 만든 모든 분들에게 박수를 쳐드리고 싶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 감탄하거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의 찜찜함이 제 마음을 어둡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돼요. 그래서 제대 후 새로운 장르와 소재에 도전할 때도, 그 안에 메시지와 감동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항상 갖고 있어요. <청춘기록>은 나이에 상관없이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청춘이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더 사랑하자는 이야기예요. <원더랜드>도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더 잘해야겠다는 감상이 드는 작품이고요. <서복>을 보신 분들이 삶에 대해,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