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 기자 이건 분석이나 평가라기보다는 반성문에 가깝다. 아님 기어코 희망의 자리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이거나. 프런트라인 순서상 피치 못하게 앞자리에 놓인 글이지만 가능하면 제일 마지막에 읽어주시길 희망한다.
올해는 ‘소리도 없이’ 한국영화들이 ‘사라진 시간’이었지만 ‘작은 빛’은 보였다. 빛의 이름은 애착이다. 마음이 끌리는 것을 가까이하고 유지하려는 행동. 무엇에 좀더 마음이 쓰이는지, 취향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도 좋겠다. 삶의 조건이 점차 궁핍하고 버거워지는 건 사실이지만 취향이 있으면 마음이 덜 가난해진다. 이건 취향이라는 이름의 도피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연민하거나 타자화하는 대신 지금 현재 주어진 것들을 긍정하는 가운데 자신을 돌보는 자급자족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영화가 폐허의 풍경에 집착해온 건 이미 오래된 일인데 올해는 그 경향이 유독 도드라진다. 망가져버린 헬조선에서 시작하는 <사냥의 시간>이나 좀비 바이러스로 격리 지대가 되어버린 <반도>는 말할 것도 없다. 양상은 다소 다르지만 안온해 보였던 일상의 한 꺼풀을 벗겼을 때 주변이 한순간에 지옥 같은 상황으로 바뀌는 영화들도 유사한 맥락하에 있다. <침입자>에서는 사라졌던 동생이 침투해 들어와서 믿어왔던 것들을 박살내고, <콜>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덮어씌워버리며 머물 자리를 앗아간다. 결국엔 모든 것이 파괴되거나 불타버리는, 쓰레기가 되어가는 삶 앞에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추방당하거나 도피하거나. 2020년 한국영화에서 반복되는 것은 폐허의 풍경이라기보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시 말하지만 사실 이러한 태도 역시 몇해째 반복되어왔다.
반복된 디스토피아에서 두 가지 욕망을 발견한다. 하나는 일종의 도피처를 제공해주겠다는 오락영화로서의 서비스. 다른 하나는 화면 속에 넘쳐나는 불안의 풍경들을 통해 실제 현실에서 받는 압력을 유예시키는 마취. 어쩌면 이건 환상을 제공하는 모든 영화의 기본 속성일지도 모른다. 볼거리와 갈등을 탐닉하는 장르영화에서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구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 없는 최악의 상황은 자극적인 그림들을 펼치고 인물들을 몰아붙이기에 최적의 무대이므로 영화는 디스토피아를 선택한다.
영화가 진정 무의식을 드러내는 지점은 디스토피아라는 무대 자체가 아니다. 그것을 누구의 시점에서, 어떤 형식으로 재현해내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외계인 침공의 상투적인 가족 드라마를 “포스트 9·11의 미디어에 관한 비평”(<씨네21> 511호, ‘하층민의 냉혹한 묵시록 <우주전쟁>’, 허문영)으로 승화시켰다. 외계인에 맞설 영웅이 아니라 무식한 부두노동자, 이혼남, 자기중심적이고 야비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설정, 이해 불가능한 재난 한가운데 떨어뜨림으로써 미국 하층민의 무의식에 쌓여온 악몽을 건드리는 것이다.
잔물결들이 겹쳐 파도가 될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라는 상황을 걷어내고 말해보자. 한국 상업영화가 디스토피아를 재현하는 방식은 빈곤하다. 전직 군인 정석(강동원)이 폐허가 된 반도에 침투했다가 탈출할 때 내러티브는 수만번 반복해온 놀이기구의 레일 위에 또다시 안착하고, 한국에서 버티고 살아가는 이들의 아무것도 포착하지 못한다. <반도>가 의외의 생기를 발하는 지점은 준이(이레)가 입을 떼는 순간이다. 아이들을 <반도>에서 탈출시키는 이들은 바깥에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거라고 약속한다. 그때 준이는 답한다. “내가 있던 세상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이건 적응과는 질적으로 다른 발언이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무기력하게 포기하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차라리 ‘어떻게’ 희망을 발견하고 버티며 살아가는지의 문제다. 지옥 속에서도 꽃은 피고, 숨구멍은 있다.
하지만 많은 영화들이 바깥의 시선 혹은 타자의 시선에서 상황을 묘사하는 데 집착하다가 이들의 체험을 누락하거나 쉽게 그들의 처지를 동정해버린다. 그곳을 지옥이라고 정의내린 건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다. 외부인들, 혹은 (괜찮았다고 믿어지는)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다. 그 땅에서 나고 자란 현세대의 목소리가 배제된 상상. 만약 <반도>가 준이와 유진(이예원)의 시점에서 전개되었다면 <우주전쟁>처럼 의도 이상의 장면들을 포착할 수 있었을까.
의외의 돌파구는 다큐멘터리에서 발견된다. 박윤진 감독의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보면서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일랜시아>는 신규 유저는 고사하고 서비스 종료가 되지 않는 게 신기한 망겜이다. 하지만 망가져버린 그 세계에서 생존자들은 각종 버그와 매크로 등 편법까지 동원하면서 버티고 있다. 바깥에서 보면 그저 버티는 삶일지 몰라도 실제 커뮤니티 안에서는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영화 말미 열기구를 타는 작은 이벤트를 즐기는 이들의 읊조림이 가슴을 때린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미있냐.” 지금 쏟아져 나오는 게임들과 비교하자면 조잡한 폐허처럼 보일지라도 <일랜시아>의 생존자들에겐 더없이 즐거운 순간들. 시스템을 자의적으로 재조립한 끝에 스스로 일궈낸 소박한 연대와 소통의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어원이 ‘없는(ou-) 장소(toppos)’라지만 이들의 유희가 현실을 유예하는 도피라거나 가상 세계에서만 허락된 추억 팔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록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카메라는 그들의 행복이 거기에 있었음을, 존재의 시간을 기록한다.
문득 올해 극영화들 역시 과거로의 회귀나 도피, 탈주, 유예에만 집착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지금 여기’에서 싹을 틔우는 시선들이 존재한다. <남매의 여름밤>이 경험해보지 못한 향수를 복제한다고 말하긴 쉽다. 하지만 <남매의 여름밤>의 시점은 과거를 ‘되돌아보는’방식과 결별하고 지금 여기서 무엇에 대해 애착하는지에 맺혀 있다. 할아버지와 얽힌 한여름 밤의 기억은 바깥에서 소환되는 것이 아니라 소녀의 경험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것이다.
조민재 감독의 <작은 빛>도 마찬가지다. 뇌수술을 앞둔 남자는 앞으로 흩어질 기억에 대한 불안으로 카메라를 든다. 하지만 <작은 빛>이 부지런히 수집하는 건 언젠가는 되돌아볼 기억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 현재로서 존재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고백이다. <남매의 여름밤>과 <작은 빛>을 돋보이게 하는 건 대상(할아버지와 가족, 혹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향한 이들의 태도다. 폐허의 자리,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으로 채워진 올해의 영화들에서 새삼 그들 각자의 애착을 마주한다. 시대 앞에 나를 고백하는 이야기들. 보이는 대로 전달해도 충분하건만 여기서 어떤 프레임을 씌워왔던 건 도리어 이야기 바깥에 버티고 선 이들의 (걱정, 배려 무엇이라 부르건 익숙한 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신인감독들의 결과물이 아직 충분히 영글지 않았다. 분리불안을 떨치지 못한 유아적 단계, 거울-모방 단계의 애착인형에 불과하다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일련의 고백들 속에서 끝내 새로운 파도로서의 씨앗들을 발견한다. 아니 발견하고자 한다. 사실 진짜 불안한 건 이들의 고백이 제대로 수신이 되고 있는가의 문제다. 일련의 데뷔작에서 모자란 건 ‘새로움’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물결로 증폭시킬, 제대로 된 목소리가 없는 게 아닐까 자조해본다. 어떤 경로, 어떤 형태의 만남이라도 개의치 않으니 부디 이들의 잔잔하고도 단단한 시그널이 여러분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