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환 평론가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이상한 논리의 시대다. 그게 참 이상해서 썼다.
2020년 한국영화의 키워드를 묻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생존 투쟁’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죽자고 도망치는 인물들의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시작으로 <사냥의 시간>과 <#살아있다>를 거쳐 <반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콜>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들려오던 날카로운 비명이 잔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 영화 대부분은 어딘가로의 도주를 꿈꾸고 있었다. 때로는 일본으로(<지푸라기라도…>), 대만으로(<사냥의 시간>), 파나마로(<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아니면 익명의 또 다른 장소(<반도> <#살아있다>)로 말이다. 각자도생하며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버린 세계는 곧잘 폐허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재건이 아니라 탈출을 꿈꾼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죽고, 또 다른 누군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힘을 빌려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 육체적인 생존이 조금도 희망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삶이 아니라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삶을 보며, 우리는 그 생존에 안도할 수 있을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안타고니스트의 시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이미지를 알고 싶다면 2020년 개봉한 한국영화의 안타고니스트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지금은 안타고니스트가 세계를 장악한 시대니까 말이다. 지금 한국영화의 안타고니스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계에 가깝다. <사냥의 시간>의 한(박해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레이(이정재), <콜>의 영숙(전종서) 등은 주인공을 극단의 궁지까지 몰아가려는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욕망의 기계들. 그것이 자기 파멸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그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 안타고니스트 옆에 나란히 놓여 동일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반도>와 <#살아있다>의 좀비라는 사실은 그리 우연이 아니다.
좀비가 인간의 이해를 바라지 않듯이, 이들 안타고니스트 역시 그 집요함의 이유를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자기 파멸을 그 대가로 지불하면서까지 인남(황정민)을 지독하게 몰아붙이는 레이의 행동은 서사적 인과관계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 대신 레이의 광기와 집요함을 더 과시할 뿐이다. 이는 <사냥의 시간>의 한이나 <콜>의 영숙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은 빈곤하기에 과잉된 채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행동이 이해의 영역 너머에 위치한다는 것은, 이들 영화의 주인공들이 최소한의 원인에 최대한의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비대칭의 서사 구조 속에서 주인공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안타고니스트가 장악한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련한 인물들의 비명으로 가득하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상황에 반응(리액션)하기에 급급하다.
<지푸라기라도…>의 태영(정우성), <사냥의 시간>의 세 청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인남, <콜>의 서연(박신혜) 등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능력이 없다. 당장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이 안타고니스트에게 주도권을 뺏긴 채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마디로,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전력질주.
우리는 안타고니스트가 지배하는 서사, 안타고니스트가 폭풍처럼 주인공을 덮쳐오는 위기의 서사 속에서 ‘삶’이 아니라 ‘생존’의 치열함을 목격한다. 이는 주인공과 안타고니스트의 관계가 우리가 현실과 맺은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질 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이들 안타고니스트가 우리에게 어떤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게 된 동시대 대중의 정서 구조를 공격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의도된 무지함
<반도>와 <#살아있다>는 종말론적인 상황 속에 인물을 던져놓지만, 실제로는 ‘의도된 무지함’의 힘으로 인물을 그 세계와 분리하고 있다. <#살아있다>는 준우(유아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좀비로 가득해진 세상을 보여준다. 심지어 가족들의 행방도 알 길이 없다. 통신이 끊기고 세상과 단절된다. 그럼에도 준우는 상황의 심각성만큼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고, 영화는 생필품을 아끼며 생존의 원리를 깨닫는 준우의 소소한 에피소드에 집중한다. <반도>가 종말 이후 서울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보여줄 때조차, 그것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가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두 소녀가 신나게 카 체이싱을 펼칠 수 있는 조건과 배경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반도>의 어린 소녀 준이(이레)는 “내가 있던 세상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2020년에 들은 최고의 거짓말이다. 준이는 이 대사로 유사 가족으로 표현된 사랑과 연대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표했지만, 이 대사가 가능한 진짜 이유는 ‘폐허가 된 세상’이라는 영화적 설정을 <반도> 자신이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도>의 이 대사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의도된 무지’의 결과이며,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입을 빌려 이를 합리화한다. 시간을 돌려 <복수는 나의 것>의 엔딩을 떠올려보자. 아나키스트 조직에게 처형된 동진(송강호)은 자신의 몸에 꽂힌 판결문을 읽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감히 알려고 하는 것, 그것이 그가 죽기 전에 보여준 마지막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영화의 인물들은 동진의 반대편에 있다.
이들 영화는 ‘의도된 무지’ 속에 종말론적 파국을 상상하고, 전시하고, 시각적으로 즐기는 자폐적 놀이를 즐긴다. 그 놀이를 위해 ‘장소성’이 삭제된 고립된 공간을 만든다. 각자도생의 삶, 또는 각자도생의 유희. <사냥의 시간>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가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 땅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징표로 끌려나온 장소들이 기껏해야 덜 자란 세 청년의 총놀이를 위한 배경으로 그곳에 텅 빈 채 놓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 영화는 자신을 파생시킨 ‘지금, 여기’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금 여기’와 ‘익명의 저기’ 사이 어딘가에서 서성거린다. 아니, ‘지금, 여기’를 보여주는 척하면서 그것을 허공으로 휘발시킨다. 이 시대의 공기를 담은 한국이라는 장소성은 단지 기표로서 그 자리에 놓이면 충분하다.
<반도>와 <#살아있다> 모두 (그것이 기적을 빙자한 억지라 하더라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힘을 빌려 생존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생존이 ‘궁극적인 원인의 체계’로서의 ‘지금, 여기’의 세계를 삭제한 대가라면, 우리는 그 생존에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 세계에 눈감는 한,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동물적인 것에 머물고 말 것이다. 생존이 전부인 삶, 또는 삶이 사라진 생존. 이들 영화와 함께, 폐허의 잿더미는 좀 쌓일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