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승리호> 김태리 - 뻔뻔하게, 주체적으로
2021-02-06
글 : 임수연
<승리호> 김태리
사진제공: 넷플릭스

김태리라고? 올백 단발머리, 보잉 선글라스, 작중 배경은 2092년이지만 1992년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복고풍 옷차림을 한 <승리호> 속 장 선장의 비주얼이 처음 공개됐을 때 느낀 충격을 잊지 못한다. 선장이라고? UTS 기동대 최고의 에이스 출신 태호(송중기), 지구에서 마약 밀매 조직을 이끌었던 타이거 박(진선규), 로봇 업동이(유해진)가 그들보다 어리고 물 대신 술을 마시며 사기 고스톱에 심취한 장 선장의 말에 복종한다. 하지만 과거 우주 해적단을 이끌었던 브레인이자 우주선 승리호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설정이 하나씩 드러나고, 옳은 길을 위해 희생을 불사하는 장 선장의 추진력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도 특유의 당당함이 돋보이는 김태리를 통해 설득력을 입는다.

-처음 <승리호> 프로젝트의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기대감을 안고 이 작품을 선택했나.

=두근두근했다. 이야기도 캐릭터들도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팀플’이라는 점이 좋았다. 히어로물처럼 누군가가 가진 하나의 힘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사연을 지닌 다정하지 못한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 겨우겨우 지구를 구출하는 이야기. 물론 고민도 많이 됐다. 장르물은 처음이고 장 선장은 지금까지 연기해왔던 인물들과 확연히 달랐으니까. 조성희 감독님을 직접 만났을 때 작품에 대해 갖고 있는 자신감과 순수한 애정이 전해져서 출연을 결심하게 됐다.

-<승리호>는 2092년의 우주가 배경이며, 만화적으로 구현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가며 연기했나.

=촬영이 시작되고 사실 많이 헤맸다. 지금껏 해오던 접근방식이 장 선장에겐 맞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승리호>는 전부 세트 촬영이었기 때문에 촬영이 진행된 4개월 동안 많은 시간 선배님들과 숙식을 함께했다. 촬영이 끝나고도 선배님들과 자주 모여서 얘기를 나눴는데 그때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선배님들이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어보시더라. 창피했지만 장 선장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혼났다. 여기 알고서 연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중요한 건 네명의 케미스트리라고 하시더라. 내 역할에만 갇혀 있다가 눈이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장르물 연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 인물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장면의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최대치로 살려내는 것이 필요하다.

-<승리호>의 세계관을 만든 조성희 감독이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장 선장의 전사 등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주던가.

=장 선장의 과거사나 레퍼런스가 된 작품 등을 담은 USB를 주셨다. 시나리오에 나오지 않는 스토리도 정말 구체적으로 구상하셨더라. 나는 장 선장의 이야기만 받았지만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사연이 있다. <승리호>는 글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감독님의 머릿속에 정확히 존재하는 세계였고, 고유의 오리지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선 오로지 배우들을 믿어주셨다. 오케이를 너무 쉽게 내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라 (진)선규 선배님과 촬영 내내 했던 농담이 있었다. 오케이가 떨어지면 “정말이요? 감독님 정말이요?” 하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중얼거렸다. (웃음)

-올백 단발머리와 보잉 선글라스 등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파격적인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장 선장의 이미지는 캐스팅 전부터 이미 그려져 있었다. 옷차림이나 선글라스는 감독님 머릿속에 있던 모습을 그대로 입은 것뿐이다. 헤어스타일만 이전 화보에서 시도해봤던 스타일 중 찾았다. 물이 귀한 우주선 생활과 단순한 선장의 성격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하는데 관객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승리호>가 지닌 컬러들이 참 재밌다. 타이거 박은 노란색, 태호는 파란색, 선장은 주황색, 업동이는 총천연색인데 통일감을 주면서 인물의 성격을 대표하기도 하고 특히 <승리호> 같은 장르물에서 근사한 효과를 낸다. 현장에서 선규 선배님이 딥블루, 패션오렌지, 더티옐로, 섹시그린이라는 별명을 배우들에게 붙여줬다.

-태호처럼 장 선장 역시 조종간에 앉아 기기를 움직이는 연기를 할 때가 많다. 우주 활극의 역동성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기 위해 배우에게 필요했던 것은.

=뻔뻔함. 물론 모든 연기는 뻔뻔하게 하는 거지만 이건 필요한 뻔뻔함의 정도가 달랐다. 정중앙을 표시한 테이프뿐인 녹색 스크린을 앞에 두고 조용한 세트장에서 나 홀로 일종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무엇인지,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집중하며 연기해야 했다.

-10대 때 이미 기동대 최고의 에이스가 된 태호부터 마약 조직을 이끈 타이거 박까지, 승리호 선원들은 각자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나. 그중에서도 장선장이 대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그리고 ‘승리호’는 쓰레기 줍는 배치고 너무 스펙이 좋다. 장 선장이 이런 괴물 같은 배를 만들게 된 사연이 궁금하다.

=장 선장은 이 세계의 구조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상황에만 있지 않고 더 멀리 볼 줄 안다. 대의를 가진 사람에게서 오는 신뢰감이 있다. 장 선장이 승리호를 만든 건 돈을 벌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좋은 머리에 비해 돈 머리는 그리 좋지 못하지만. 장 선장이 돈을 벌려는 이유는 영화에 소개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장 선장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예고편에 등장하는 장 선장의 대사 중 이런 게 있다. “안돼. 정의롭지가 못해.” 장 선장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극중에서 그 대사는 장 선장이 속물인 것처럼 묘사되는 신에서 등장하지만, 내가 혼자서 아주 좋아했던 대사다. 본인은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 인물을 분석하고 연기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캐릭터를 완성하는 굉장히 큰 파이를 차지했다. 이건 선하다는 개념과는 좀 다르다. 장 선장은 불가능으로 수렴하는 상황 속에서도 신념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김태리가 극중 내내 여럿 배우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티티카카’를 하는 연기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코믹한 느낌을 살려야 하는 순간도 많다. 배우에겐 새로운 도전이었을 듯한데.

=정말 어려웠다. 일단 부딪혀 보자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한방 먹었다. 현장에서 선배님들 특히 업동이에게 많이 배웠다. 업동이는 해진 선배님이 창조한 캐릭터다. 나는 시나리오에 담긴 선장을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해진 선배님은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하시면서 업동이 캐릭터의 색을 한겹 한겹 쌓아갔다. 해진 선배님의 업동이가 아니었다면 지금만큼 한 팀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장 선장과 승리호 선원들은 꽃님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한다. 그가 이런 용기를 낼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글쎄, 그들이 그때까지 살아있던 이유가 그 이유 때문일 테고 그것은 아마 거창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따로 생각해보지 않았을 만큼 나에겐 그들의 선택이 당연했다. 조금은 바보여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아주 선하지만은 않은 주인공들이 거창한 이유로 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가족애가 인류애로 확장되는 이 지점이 영화를 만든 조성희 감독님에게 중요하지 않았을까.

-<승리호>는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어드벤처물이면서 환경 문제부터 인류의 공생을 아우르는 다양한 고민이 녹아든 작품이다. <1987>은 변화를 위해 뛰어든 시민들의 이야기였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역시 조국을 위해 투쟁하는 의병들을 그리지 않았나. 어떤 거시적인 변화를 위해 각성하는 개개인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연이어 선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꼭 그런 요소를 염두에 두지는 않지만, 결과가 그렇게 나온 건 그런 이야기에 확실히 더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겠지.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인물에게는 각자의 성장 스토리가 있다. ‘각성’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물이 시나리오상에서 기능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때 매력을 느낀다. 자신의 신념대로 선택하면 실패하거나 벽을 만나도 스스로 느끼고 고민할 수 있고, 그러다보면 성공 여부를 떠나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다. 연기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나는 캐릭터가 이성적으로 이해돼야 연기하기 편해지는 쪽이다. 논리적으로 이 행동이 설명되거나 혹은 그럴 수 있다고 감성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기능적인 인물에겐 그런 설득력이 없다.

-<승리호>와 같은 2092년 상황이라면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나.

=그런 상상력이 부족해서 글을 못 쓰고 지금 배우를 하고 있다. (웃음) 일단 UTS에 있을 것 같진 않고, 지구에서 빌어먹고 있지 않을까. 그때도 배우라는 직업을 유지할 수 있을지. 당연히 배우가 남아 있겠지? 작은 무대에서라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종종 UTS에서도 공연을 하려나. ‘승리호’ 같은 청소선이나 얻어탈 수 있으면 즐거울 것 같은데,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니 무서워서 안 탈 것 같기도 하다. 아, 너무 어렵다. (웃음)

-공교롭게도 <승리호>와 <외계인> 모두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시도되는 SF 대작들이다. 업계의 관심 또한 뜨겁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배우로서 한국형 SF에 어떤 기대감을 안고 있는지 듣고 싶다.

=굉장히 고무적이다. 포문을 여는 의미 있는 작품들에 연달아 함께 하게 되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내가 큰 몫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해야 할 역할만은 잘 마쳤으면 좋겠다. <승리호>를 보시면 알겠지만 한국영화계 기술력이 정말 좋아졌다. 이제 구현하지 못할 이야기는 없다.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만 있으면 된다.

-지난해 3월부터 <외계인>을 찍고 있다. <미스터 선샤인>을 거의 10개월 동안 찍으면서 배우로서 캐릭터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고 한 적이 있는데, 지금 현장에 1년 가까이 임하면서 김태리에게 생긴 변화가 있다면.

=모든 작업이 다르지만 지금 현장은 그 전 작업들과 또 많이 다르다. 엄청나게 많은 배우들이 나오다보니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또 혼자 고민하기보다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다. 덕분에 전보다 부담감이 줄고 좀더 자유로워진 것 같다.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연기할 수 있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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