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상궂게 나타나 다정하게 돌아선다. <승리호>에서 배우 진선규가 연기한 타이거 박은 온몸에 문신을 새긴 채 티타늄 도끼를 든 육체파 대원이지만, 시선을 그의 이목구비에만 고정시킨다면 고된 우주살이에서 이보다 여린 남자를 찾기는 힘들 것 같다. 조그만 감동에도 자주 글썽이는 눈과 씰룩이는 입꼬리는 그가 한때 유명 지하조직의 두목이었다는 사실을 의심케 한다. 의문의 실종 아동 도로시를 데리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찾아나가는 이야기인 <승리호>에서 타이거 박은 기꺼이 아이의 보호자로 지목하고 싶게 만드는 인물이다. 제각기 한 성격하는 크루들의 관계를 부드럽게 다지고, 관객에겐 푸근한 호감을 안겨주는 인물의 완성은 배우 진선규가 가진 느긋한 따뜻함, 그리고 반전 매력으로부터 나왔다.
-한국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가 전무했던 만큼 출연에도 결심이 필요했을 듯하다. 어떤 이유에서 끌렸나.
=감독님을 만나보니 ‘역시 디자인 전공자답구나’ 할 정도로 승리호에 대한 훌륭한 프리비주얼을 그려놓고 굉장히 오랜 시간 스타일을 구상해왔음을 알 수 있겠더라. 새로운 장르, 새로운 연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시기였고 시나리오 안에 담긴 따뜻한 이야기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전세계 많은 분들이 한국의 SF영화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타이거 박은 지구에서 한때 마약 조직 두목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승리호에선 인정 많고 마음씨 좋은 면이 부각된다. 캐릭터에 대한 호감도 역시 그 대비감과 비례하는 듯 싶다.
=승리호 선원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느낌을 주는 인물이라, 실은 내가 해도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웃음) 타이거 박은 센 사람이긴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동경하는 것, 자기만의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뚜렷한 색깔이 있는 사람이다. 특히 그 색깔이 어린아이를 향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아이를 아끼는 인간적인 면, 지구에서와 또 다른 모습인 승리호 크루로서의 모습 등 여러 경계선을 넘나드는 점이 매력적이다.
-도로시와 놀아줄 때 스스로 ‘독거미’라고 표현하는 레게 헤어, 온몸의 문신과 티타늄 도끼 등 타이거 박은 시각적으로도 흥미로운 요소를 품고 있다. 외양 묘사에 있어 어떤 부분을 고심했나.
=크고 거친 외형의 인물이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드랙스 같은 인물을 떠올릴 수도 있었지만, 조성희 감독은 타이거 박을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결정짓고 싶어 하지 않았다. 타이거 박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함께 찾아보자는 게 감독님의 제안이었다. 타이거 박을 위해 유일무이하게 디자인된 타투는 각 부분이 모두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도끼 역시 싸우는 목적보다는 엔진실에서 일할 때 필요한 도구에 가깝다. 그리고 이 모든 외형적 요소들이 그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타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 매번 촬영장에 가장 먼저 가서 분장을 받고 또 가장 늦게 퇴근했던 기억이 난다. 그 결과, 영화에서 보이는 타이거 박의 모습이 마음에 쏙 든다.
-만약 승리호 IP가 앞으로 하나의 유니버스로 꾸준히 이어진다면 언급한 것처럼 타이거 박의 과거가 자세히 나올 법하다. 인물의 전사를 구체적으로 떠올린 부분이 있을까.
=감독님과도 이야기한 부분인데 타이거 박은 지구에서도 자신의 재산으로 어린이들을 돕지 않았을까 싶다. (웃음) 방법은 좋지 않았지만 그 돈을 나쁜 데 쓰지는 않았을 것 같다. 승리호에서 돈을 벌고자 하는 목적도 아이들을 구하려는 목적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봤다. 만약 프리퀄이 나오다면 그때 더 집중해서 연구해보고 싶다.
-타이거 박이 일하는 기관실은 작동원리나 공간의 세부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맨몸으로 힘을 쓰며 승리호의 에너지를 추진하는 모습이 강렬했다.
=낡은 우주선의 엔진이 오래되어 일일이 손으로 다 돌려야 하는 상황에 대해 감독님이 구상한 디테일이 다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자동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면 타이거 박의 역할이 너무 작지 않았을까. (웃음) 이성, 감정, 지식이 아닌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의 특성에도 꼭 맞는 공간이었다. 촬영은 세트가 아닌 실제 부산에 정박해 있는 배의 내부에서 했다. 엔진실이 몹시 좁아서 촬영 시에 소수의 인원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엔진 소음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소리를 질러야 했다. 한여름에 비좁고 덥고 시끄러운 공간에서 하루 종일 촬영했고, 여기에 훌륭한 CG가 더해져 승리호라는 우주선의 기관실로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힘들었지만 묘한 경험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기본기를 다진 배우이기에 더 궁금한 부분인데, 크로마키 스크린 앞에서 CG를 염두에 두고 연기하는 분량이 상당했을 <승리호> 촬영 과정에서 이색적인 감흥은 없었나.
=조종대에 앉은 장면에서 배우들의 시선이 같아야 하니 감독님의 지시가 무척 중요했다. ‘두시 방향에 적기! 세시 방향에 적기! 어, 저기 뒤에!! 뒤에서 이제 빵!’ 이런 상황 속에서 연기했다. 마치 <TV 유치원>에 출연한 아이들이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웃음) 그때만큼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이처럼 순진하게 연기했던 순간이라 재미있었다.
-타이거 박은 코미디, 드라마, 액션 등 장르적인 연기 스펙트럼을 전부 커버하고, 이를 시시각각 다채롭게 펼쳐 보여야 하는 포지션이다. 이런 경우 사전 준비와 계획에 힘쓰는 편인가, 즉흥과 본능에 맡기는 편인가.
=설정에 따라 계획하고 분석하는 것 보다는 상대 배우를 만나 순간순간 진실하게 임할 때 얻는 것들이 아직은 더 좋다. 그런 방식이 단점일 수도 있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상황에 따라, 상대 배우와의 호흡에 따라,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편이다. 내가 맡은 인물, 그 인물의 연기는 현장에서 만들어져 가는 경우가 많다. <승리호>를 찍을 땐 현장의 모든 배우들과 매일 만나 촬영해도 매일이 재밌고 신선했다. 매일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고, 타이거 박의 거친 외모에 비해 많은 사랑을 주는 느낌도 줄 수 있어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모든 배우들이 승리호의 크루로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서로 확실하게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계획하지 않아도 액션과 리액션의 완벽한 유기적 흐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유해진 배우가 연기한 로봇 업동이와는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기 호흡을 맞췄나.
=유해진 선배가 매번 모션 캡처 옷을 입고 직접 연기를 했다. 얼굴이 나오지 않는데도 항상 아이디어를 내고, 우리 셋과 함께 연기해주었기 때문에 지금의 맛깔나고 신선한 장면들이 나왔다. 유해진 선배가 있는 상황에서 한번, 대역배우와 한번, 그레이볼까지 총 3번씩 촬영해야 했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현장에서 모션 캡처 의상을 입은 선배의 모습을 두고 우리 모두 ‘섹시 그린’이라고 불렀다.
-한정된 공간에서 나이대, 성별, 캐릭터가 매우 다양한 배우들이 계속해서 함께 부딪치는 영화다. 함께하는 동료들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었나.
=아내에게 “나 오늘 연예인 만나러 간다”고 말할 정도로 현장이 긴장되고 어려울 것 같았는데, 막상 만나니 모두들 정말 사람 냄새나는 사람들이었다. 송중기 배우는 주인공으로서의 아우라, 큰 그릇을 지닌 사람이다. 현장에서 한 명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스태프들까지 챙겼다. 내게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송중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김태리 배우는 선하고 영민하게 연기하는 사람이고 아주 좋은 배우다. 그의 장점들이 스크린에서도 부족함 없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 같다. 카메라 앵글 안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에 대해 아주 세밀한 디테일까지 표현해내는 배우이기도 한데, 그래서 그녀가 연기한 장면을 보면, ‘아! 찍을 때는 몰랐는데 그래서 저 때 저렇게 연기했구나!’ 싶은 깨달음을 준다. 그녀가 연기한 주인공들에게 저절로 끌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유해진 선배는 깊이와 넓이를 두루 지니고 있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자유자재로 보여주고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이자 좋은 형이다. 그의 성실한 참여와 연기, 그리고 애드립이 우리를 똘똘 뭉치게 하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장르 특성상 극장 상영을 고대했을텐데 코로나19의 장기화로 개봉 연기 끝에 넷플릭스로 향하게 됐다. 소감이 어떤가.
=더 많은 분들이, 나아가서는 전세계 수 많은 분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을 품고 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스마트폰 보다는 조금 더 큰 화면과 좋은 사운드로 감상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정도다.
-범죄, 스릴러, 코미디, 액션, 드라마, 호러, 오컬트, SF까지 지난 3~4년간 한국 상업영화의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한 게 아닐까 싶다. 작품 선택에 있어 다양한 모험을 시도한 시간들이었다.
=색다른 장르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다. 비슷한 장르에서 비슷한 역할을 한다면 이전의 역할들을 능가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장르와 캐릭터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인다. 마침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싶었을 때 다가왔던 영화가 바로 <승리호>다. 앞으로 개봉할 복싱 영화 <카운트>, 故 김현식과 유재하의 이야기를 다룬 음악영화 <너와 나의 계절>도 그런 맥락에서 즐겁게 작업했다. 앞으로 진선규라는 배우가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여전히 설레임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