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따로 또 같이’…급변하는 산업 환경 속 변화를 모색하는 한국영화 제작사들의 생존법
2021-03-19
글 : 김성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날아라 개천용>

얼마 전 6개 영화 제작사가 한배를 탔다. 다이스필름(대표 김성우), 리양필름(대표 이한승), 미지필름(대표 서종해), 오스카10 스튜디오(대표 장진승), 영화사 람(대표 최아람), 영화사 일취월장(대표 최문수)은 지난 3월 2일 연합 법인인 플랫폼 프로듀서(plat p)를 설립했다. 모두 영화 두편 이상을 제작한 중견 제작사들이다. 과거 제작사들이 공동 제작을 진행하거나 코스닥 상장을 위해 인수·합병하는 사례가 많았고, 한국영화제작가협회에 소속된 회원사들이 공동으로 출자해 배급사인 리틀빅픽처스를 출범시킨 경우도 있었지만, 6개 제작사가 새로운 법인을 설립한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이들이 한데 모여 새 법인을 만든 건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 좀더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다. 플랫폼 프로듀서의 조합원인 최아람 영화사 람 대표는 “극장은 침체기를 겪고 있고,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를 중심으로 시장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제작사가 거대 플랫폼 사업자들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뜻이 맞는 제작사들이 힘을 모으는 게 절실”했다고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아직 자세한 그림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플랫폼 프로듀서는 거대 플랫폼들과의 협상을 대리하는 에이전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조합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단체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완충제 역할을 하는 우산의 필요성이 여러 제작사들 사이에서 수차례 제기되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플랫폼 프로듀서라는 새로운 협업 모델이 나왔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제작사들간의 합종연횡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예측하기 힘든 산업 흐름 속에서 리스크를 줄이고 상생하기 위한 생존 전략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지난해 김용화 감독이 이끄는 블라드 스튜디오가 CJ ENM으로, 장원석 대표의 BA엔터테인먼트가 JTBC 스튜디오로, 영화사 월광과 사나이픽처스가 카카오M으로 들어간 것도 스튜디오의 우산 아래에서 안정적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집중하기 위한 목적이다.

장원석 BA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제작사 혼자서 여러 투자배급사들과 협상하던 과거와 달리 스튜디오의 우산 안은 영화나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콘텐츠를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인 것 같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관객이 예년만큼 극장을 찾지 않고, 많은 영화들이 개봉을 거듭 미루고 있으며, 투자 허들이 더욱 높아진 데다가 글로벌 OTT에 줄을 선 창작자(감독 혹은 프로듀서)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혼돈의 코로나19 상황에서 제작사들간의 협업과 분배의 모델이 앞으로 더 다양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시기가 됐다.

이상윤 쇼박스 투자제작본부 본부장은 “소규모 운영이 불가피한 국내 제작사들이 플랫폼과 콘텐츠 형식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재 시점에서 힘을 합쳐야 규모의 경제가 생기고 작품 기회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면서 “제작이라는 업무 속성상 의사결정 권한을 나누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합리적인 권한과 성과 분배 룰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평호 쏠레어파트너스 대표 또한 “다양한 플랫폼이 생겨나는 산업 흐름에서 각기 다른 역량을 지난 제작사들이 힘을 합쳐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제작 규모를 확대해나가는 노력은 제작사들이 보다 경쟁력 있게 플랫폼과 협상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한 제작자는 “플랫폼 프로듀서는 이제 첫발을 내딛었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갈지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외부로부터 투자를 받거나 향후 법인 매각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도 보인다”고 말했다.

〈D.P.〉

최근 들어 제작사들간의 협업 및 분배 모델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제작자가 혼자서 기획부터 시나리오 개발, 촬영, 후반작업까지 영화의 전체 공정을 이끌었던 과거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영화를 기획·개발하는 기간이 길고, 비용이 많이 들면서 초기에 기획한 아이템을 다른 제작사에 매각하거나 역할을 분담해 공동 제작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허수영 유니온투자파트너스 상무는 “기획만 하거나 제작을 대행하거나 캐스팅을 도와주면서 공동 제작사로 크레딧을 올리는 경우도 많다”며 “제작자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기에는 비용을 감당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집을 가볍게 하면서 각자 잘하는 역할에 집중하고, 다양한 원천 콘텐츠(IP)나 아이템을 공동으로 검토해 제작과 흥행 가능성을 높이려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송효정 쏠레어파트너스 수석 심사역 또한 “최근 제작사들의 전략이 큰 한방을 노리기보다는 꾸준히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바뀐 것 같다”고 전했다.

제작사들의 ‘따로 또 같이’ 합종연횡은 최근 대형 투자배급사들이 투자·제작 방향으로 선회하는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수년 전부터 CJ, 롯데, 쇼박스, NEW 등 대형 투자배급사들은 단순히 라인업을 확보해 극장에 배급하는 투자배급사 역할에서 벗어나 할리우드 스튜디오 방식으로의 진화를 시도해왔다. 양질의 IP를 확보하고 직접 시나리오를 개발해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감독이나 프로듀서 같은 창작자와 함께 제작을 진행하는 게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투자·제작 방식이다. 이런 진화는 코로나19로 인해 콘텐츠 제작, 유통, 관객의 관람 환경의 변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이태원 클라쓰>

특히 CJ ENM의 경우 영화사업부문을 제외한 나머지 부문은 IP를 자체적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자체 제작하거나 제작 대행을 맡겨 작품을 제작·배급하는 형태가 사업의 기본 전략이다. 그간 투자배급에 집중한영화사업부문이 예외적인 경우였지만, 최근 몇년간 영화 제작비가 치솟고 양질의 시나리오 확보, 스타 감독과 배우 모시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영화사업부문도 제작사 못지않게 제작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NEW 또한 자사 계열사인 제작사 스튜디오앤뉴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제작하고 있다. 쇼박스는 지난해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를 제작한 뒤로 자체 기획팀을 통해 영화,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양질의 IP를 확보하고 있다. 롯데컬처웍스 역시 <보좌관> <날아라 개천용> 등 여러 드라마를 연출한 곽정환 PD를 드라마사업부문장으로 영입해 “확장성이 큰 슈퍼 IP를 발굴하며 다양한 유형의 콘텐츠를 개발하는 종합 콘텐츠 기업으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니까 투자배급사가 스튜디오로 진화하는 건, 양질의 IP를 최대한 확보하고, 인접 장르나 인접 매체로 확장 가능한 IP 비즈니스를 성공시켜 수익성을 강화해 생존하기 위한 절실한 선택인 셈이다.

이처럼 투자배급사들이 제작 영역을 넘나들고, 디즈니+, 애플TV+, 아이치이 등 글로벌 OTT 플랫폼들이 차례로 한국 시장 진출을 앞둔 현 상황에서 제작사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또 어떤 선택을 할지가 지금 한국 영화산업을 바라보는 주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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