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한 제작사가 영화와 드라마, 디지털 콘텐츠를 두루 작업하는 일이 보편화됐지만 필름몬스터는 일찌감치 그 경계를 허물어왔던 곳이다. CJ ENM에서 10여년간 투자·전략기획·영업전략 등의 업무를 맡으며 제작 시스템의 기반을 다져왔던 박철수 대표는 2015년 드라마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등을 연출한 이재규 감독과 이 회사를 설립했다. OCN의 드라마틱 시네마 첫 번째 작품 <트랩>, 순제작비 38억원으로 관객수 530만여명을 동원한 <완벽한 타인>,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등 영화와 드라마, OTT 시리즈를 넘나들며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박철수 대표를 만났다.
-영화인과 드라마 PD가 함께 제작사를 설립했다. 어떻게 이어진 인연인가.
=그전부터 친한 친구의 친구라서 사적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사를 만들고자 하고, 이재규 감독은 영화 연출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 의기투합하게 됐다. 10년 정도 CJ ENM에서 전략기획·배급·부가판권 관련한 디지털 배급·투자 관련 업무를 하다가 회사를 나와 몇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붙어서 영화도 드라마도 만드는 제작사를 함께 세우게 됐다.
-드라마 PD와 오래 친분을 쌓아왔던 걸 보면 원래부터 영화 외 다른 콘텐츠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제조업체에서 10여년간 일하다가 CJ ENM으로 이직했다. 원래는 신규 사업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미경 부회장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이벤트가 발생하면서 초기 스탭으로 합류하게 됐다. 3~4년 정도 영화·공연·극장 비즈니스 전략기획 업무를 담당했다.
-CJ ENM이 할리우드식 스튜디오 시스템을 벤치마킹할 때 함께한 것으로 안다. 당시 경험이 지금 제작 일을 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고 있나.
=CJ ENM에 있을 때 미국의 5대 메이저 스튜디오의 전략적 사업 모델에 대한 보고서를 쓴 적이 있다. 그들이 어떻게 기획·개발을 하고 소싱을 하며 1년간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지, 어떤 배급·홍보·마케팅 전략을 구축하는지 분석했다. 2000년대 중후반 당시 CJ ENM은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가장 큰 조직을 가지고도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확고부동한 업계 1등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사업의 선진화 사업 모델의 도입과 실행에 대한 모델의 일부를 제공할 수 있었다. 다분히 천재적인 작가와 감독, 배우 혹은 몇몇 제작자에 기인한 성공 공식은 지금도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지만, 그것은 산업이 아니다. 투자배급사는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갖춰야 한다.
-한국 콘텐츠 산업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배경에는 글로벌화가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초월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시간과 공간과 매체와 언어까지 전부 다. 세계화와 IT 기술의 발전에 의해 대한민국의 스튜디오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 제작사 및 콘텐츠와 경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영화는 영화끼리, 드라마는 드라마끼리, OTT는 OTT끼리의 경쟁이 아니다. 우리는 해외 예능 프로그램과도 경쟁해야 하고, 가장 무서운 라이벌은 유튜브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할 때 고민이 많겠다.
=요즘은 유튜브 영상을 1.5배속으로 보고 웹툰도 스킵하면서 본다더라. 이런 호흡에 맞춰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든지 자기검열을 하면서 어떻게 편집하고 구성할지도 계속 고민하게 된다. 소싱 회의를 할 때 50대 남자인 내 의견은 한표도 안된다. 여자가 아니라서, 그리고 같이 회의하는 사람들보다 나이가 많아서.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옳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의사 결정에 반영한다.
-<완벽한 타인>은 10월 비수기에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SNL 코리아> 출신의 배세영 작가는 이후 <극한직업>까지 성공시키면서 충무로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가 됐다. 발굴의 의미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제작자로서 목표는 손익분기점을 맞추거나 그보다 좀더 수익을 내는 것,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크게 흥행하는 것은 상당한 운이 따라야 한다. 혹자는 더 흥행할 수 있었는데 같은 날 개봉한 <보헤미안 랩소디>가 더 입소문을 탄 것이 아쉽지 않느냐고 묻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단,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운이 따른다. 그래서 기본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작가 출신의 약진이 두드러지지 않나 싶다. 영화나 드라마도 참 잘 쓴다. 또한 예능 대본을 쓸 때처럼 집단 창작 형태로 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능 프로그램 <코미디 빅리그> 작가 출신인 이남규 작가와 준비 중인 작품도 공동 집필하는 작가들이 세명 있다. 이남규 작가가 쇼러너 개념으로 참여하는 거다. 시종일관 호호하하 웃으면서 매우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할리우드처럼 집단 창작 시스템을 구축한 것인가.
=작품마다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천성일 작가 단독으로 쓴다. 콘텐츠 제작은 다른 개성을 가진 주체들이 모여 일을 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 옳고 적합하다는 게 존재할 수 없다.
-2019년 제이콘텐트리가 필름몬스터 지분 100%를 200억원에 인수했다. 최근 업계에서 제작사들간의 합종연횡 움직임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대형 방송사와 플랫폼이 투자배급사와 매니지먼트를 인수·합병하면서 산업 지형도가 변하고 있다. 한 회사가 모든 것을 가졌을 때의 폐해, 가령 독과점 같은 이슈는 분명히 언급될 수 있다. 그런데 동전의 양면처럼 장단점이 모두 존재한다. 지역과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전세계 스튜디오를 상대로 한 무한 경쟁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인수·합병은 가치 사슬(생산, 판매, 원료 관리, R&D, 인적 자원, 정보 시스템, 그리고 그 회사 지원시설을 포함하는 일련의 가치 창조활동)상의 수직 계열화와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세계적인 기업과 맞서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전략과 시스템과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 자본을 중심으로 한 합종연횡이 필수불가결하며 미래 산업에 좋은 기반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글로벌 경쟁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 된다. 대형 스튜디오가 성과를 내고 산업이 성장하면 이너 서클에 들어온 회사뿐만 아니라 그 밖에 있는 회사도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일종의 롤모델이 되어줌으로써 산업 전체에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다.
-<킹덤> <스위트홈>에 이은 넷플릭스 장르 드라마로서 <지금 우리 학교는>(감독 이재규)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현재 후반작업 중인데 어떤 작품인지 간단히 소개해달라.
=지금처럼 좀비물이 대세가 되기 전에 이 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도시락 싸갖고 다니면서 말렸다. 이미 미국·유럽에서 검증된 좀비 장르는 지속 성장 가능한 콘텐츠이기 때문에 시차가 있을 뿐이지 언젠가 인기를 얻을 날이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좀비는 소재일 뿐이다. 순수성을 간직한 학생들이 큰 재난을 만났을 때 어떻게 사고하는지, 성장은 물론 협업과 배신, 희생 등 여러 내용을 고등학생의 시각에서 판단해볼 수 있다. 이재규 감독이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모습이 이런 스토리에서 에지 있게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윤찬영, 박지후, 조이현, 로몬, 유인수 등 뉴페이스들의 등장도 기대된다.
=인지도가 높은 배우들이 아닌데, 그렇게 표현해주셔서 감사하다. 예전부터 천만 영화 한편보다 500만 영화 두편, 300만 영화 3~4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성 감독·작가·배우보다는 신인 감독·작가·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들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요즘 주목하는 작가, 감독, 배우
“예능 작가 출신의 전성 시대가 아닐까 싶다. 예능 출신인 이남규 작가가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쓰고, 지금은 우리와 함께 정신병동에 대한 드라마를 작업하고 있다. <암살> <도둑들> 각본을 쓴 이기철 작가도 눈여겨보고 있다가 현재 드라마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는 이미 좀 알려진 배우들 외에 로몬이라는 신인을 언급하고 싶다. 고전 미남 같은 마스크를 가진 친구다. 에너지가 아주 좋고 자세가 바른 배우라 크게 성장할 기대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