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는 <미나리> <노매드랜드>와 함께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 후보(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편집상, 미술상)에 이름을 올렸다. 앤서니 홉킨스가 앤서니라는 이름의 노인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관객이 그의 시점에서, 또 그의 딸 앤(올리비아 콜맨)의 시점에서 미로같이 얽힌 시공간을 통과하게 만든다. 부녀는 흐르는 시간과 바래는 기억 사이로 자꾸만 서로를 놓친다. 혼란스러운 상실의 시간을 오롯한 영화적 체험으로 구현한 <더 파더>의 얼굴들을 돌아본 이지현 영화평론가의 리뷰와 더불어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자신이 8년 전 만든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 인터뷰를 전한다.
그사이에 상황은 더 나빠졌다. 캐릭터의 눈과 관객의 눈앞에서, 변신하듯 앤서니(앤서니 홉킨스)의 런던 아파트가 변하기 시작한다. 불쑥 낯선 사람이 나타나거나 사라지기도 하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앤서니의 딸 앤(올리비아 콜맨)은 오늘 새로운 간병인 후보를 불렀다. 고집스런 성격의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이전의 간호사가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장된 농담을 던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은 복잡하다. 분명 앤서니가 말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들과 연관된 일들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간과는 상관없다. 이 80대 노인의 머릿속을 망각이라는 질병이 파고들면서, 세상의 모든 일관성은 뒤집어졌다. 영화 <더 파더>가 제시하는 현실의 문제는 이후 끊임없는 혼란의 미로를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진정으로 끔찍한 것은 ‘어긋난 시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모순된 상황’을 맞게 된 개인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프랑스에서 플로리안 젤러 감독은 이미 유명한 극작가였다. 2012년 초연한 연극 <르 페르>(아버지)가 미국 공연에 성공하며, 이후 동일한 작품을 각색한 영화 <플로리다>(2015)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에 본인의 연극을 직접 각색해서 이 영화 <더 파더>를 만들었다. 영화가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의 후보로 오르면서, 그는 프랑스영화계의 루키로 떠오른다.
물론 영화의 주요 소재인 ‘치매’라는 타이틀은 다소 고루해 보이지만 그의 관점만큼은 신선하다. <아무르>(2012)나 <스틸 앨리스>(2014), <노트북>(2004) 등에서 상황의 설정을 위해 사용된 소재가 <더 파더>에서는 관점의 주요 요인이 되어 등장한다. 시종일관 부서진 현실의 조각이 스크린에 나타나고, 일련의 상황이 수수께끼처럼 ‘스릴러’나 ‘초현실적 심리드라마’의 장르적 색채와 결합한다. 이때 남자가 처한 혼동의 시간을 관객은 캐릭터가 겪는 사건으로 경험한다. 이 방식이 너무나 비밀스러워서, 이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주관적인 시점을 영화는 ‘배우의 얼굴’이란 불가결한 요소로 붙잡는다.
주인공의 이름대로 앤서니 홉킨스가 합류
처음에 각색을 시작하며 플로리안 젤러는 주인공의 이름을 ‘앤서니’로 정했다고 한다. 그의 바람처럼 캐스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진짜 앤서니 홉킨스가 영화에 투입되었다. 이후 다소 삐걱거리는 투자 과정을 거쳐 모든 제작 과정이 영국에서 진행되기로 결정되었다. 실제로 홉킨스는 젤러의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예스”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배우의 등장은 기대만큼 영화를 최고의 컨디션으로 올려놓는다. 특히 결말부의 황망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이 캐스팅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깨닫게 된다. 마침내 도착한 요양병원, 그곳에서 앤서니는 자신의 모든 의미심장한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카메라가 그의 상황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포착한다. 포기한 듯 반쯤 구부린 육체, 그러면서도 감지 않은 두눈, 순간의 왜곡에 관한 모든 상황을 이 인물은 되짚는다. 하지만 어떤 파괴적인 에너지도 이 순간에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빠르게 순응하는 포기의 마음이, 육체의 얇은 막을 감싼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양들의 침묵>(1991)에서 보았던 한니발 렉터의 캐릭터는 이곳에 없다. 한동안 우리는 그를 오해했던 것 같다. 오직 환상적이거나 끔찍해 보이는 배역에만 관심을 둔다고 착각했었다. 굳이 ‘왕’이나 ‘교황’ 같은 역할을 떠올리지 않아도 <조 블랙의 사랑>(1998)에서처럼 사업가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도, 그가 화려하길 원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더 파더>에서 앤서니 홉킨스는 그간의 해석을 모두 잊게 만든다. 일상적인 평범한 노인으로 등장한 그의 모습은 의외로 담백해서 눈길을 끈다.
영화에서 앤서니는 혼자이고 병에 걸린 상태다. 간혹 딸이나 그녀의 남편, 간병인이 그와 독대하지만 그 어떤 인물도 이 남자를 깊숙이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에서 예측 가능한 드라마가 펼쳐질 리는 없다. 관객은 그저 이 거물급 배우가 ‘침묵’이라 불리는 움직임의 언어를 완성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렇게 마치 유령과도 같은 솔로극이 서서히 진행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인물이 덜 움직일수록 배역의 심리적인 상황은 더 부각되는 것을 느낀다. 침묵을 향한 미세한 어긋남의 박자, 여타 메소드 연기자들과 구분되는 앤서니 홉킨스 연기의 장점은 여기 있는 것 같다.
단언컨대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주변 상황을 이용하는 배우를 본 적이 없다. 모든 배경의 지배적인 시각 체제를, 앤서니 홉킨스는 캐릭터를 통해 지배한다. 이 점은 어쩌면 그의 연기 철학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들의 상대역을 살펴도 마찬가지다. 조디 포스터, 브래드 피트, 엠마 톰슨 같은 배우들의 젊은 시절에는 앤서니 홉킨스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더 파더>를 통해서도 관객은 ‘액팅’이라 불리는 움직임의 영역이 픽션의 회로로 이용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는 주변 인물들을 이용하고, 그리고 창밖의 풍경을 영화에 흡수시킨다.
앤서니 홉킨스와 올리비아 콜맨, 두 배우의 앙상블은 도리어 이들이 등장하지 않을 때 더 강조되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 올리비아 콜맨이 사라진 뒤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라고 울먹이는 남자를 바라본다. 그의 등 뒤로 바람이 불고 있다. 창밖의 커다란 나무 둥치를 감싸던 이파리가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그리고 카메라가 한 장소에 멈추어 선다. 이 마지막 시퀀스의 창밖 풍경을 통해 관객은 방금 눈앞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느낀 혼란을 고스란히 전달받는다. 그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역행이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꿈꿀 수 있다.
실제로 올리비아 콜맨이 스크린 뒤켠으로 사라진 후 극의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마치 집의 구조가 변화하듯, 그들은 ‘아버지와 딸’이란 사실을 잊은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앤은 울음을 터뜨리고, 무의식의 표식이 된 노인의 얼굴은 현실로 돌아온다. 우울감에 취한 환영의 귀의, 이제 갓 태어난 아이처럼 그는 간호사의 품에 기대어 있다. 이 순간 방 안은 상상계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사실과 연루된 실재계의 진행 공간이 된다. 처음부터 완전히 갇힌 ‘실내극’의 형태를 띠던 드라마가, 이 장면에서 폐쇄된 개인의 내면을 포착하는 장소로 변한다. 그 어떤 파괴도 혼동도 이곳에 없다. 이토록 포괄적인 풍경을 위해 이 영화의 아이스테시스(감성적 지각)는 구상된 것 같다.
질문을 위해 존재하는 여백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관객은 여태껏 움직인 것이 인물들의 ‘비극적 운명’이 아니라, 다름 아닌 ‘배우들의 얼굴’이었단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과 망각을 연결하던 딸의 역할이 사라지자마자, 그나마 유지되던 불완전의 균형이 완전히 흐트러진다. 이 과정에서 올리비아 콜맨은 주요한 반사 장치로 이용된다. <더 파더>에서 그녀는 ‘바뀌지 않는 현실의 좌표’를 제시하고 있으며, 관객의 리액션을 대변하고 있다. 이 인물이 나타나면 관객은 즉시 상황에 몰입하고, 절대적인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유연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위해 그녀의 육체는 활용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구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변화가 아닌 딸의 일시적인 반응이야말로 이 영화에 진짜 감정선을 구축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반성은 그녀 자신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그녀는 완벽한 조연이며 또한 영화가 제시하는 질문을 위해 마련된 여백이다.
환영을 현실화한다는 점에서 <더 파더>의 이야기는 기억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죽음과 관련된 내러티브의 환상을 품는다.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이전의 내면적 충동, 이 욕망의 움직임을 영화 속의 배우들이 표현한다. 비록 관객이 바라보는 감정의 클라이맥스가 완전한 해소를 맞지 못하더라도, 이 역시 비가시적 영역의 카타르시스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생각과도 같은 현실을 끌어당겨서 스크린의 은유를 완성하는 영화, <더 파더>의 클로즈업은 오직 앤서니 홉킨스의 연기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서도 감각을 전달하는 몽타주의 메커니즘, 어쩌면 이야말로 영화적 연기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